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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17. 서응동호 이슬 같은 인생 어서 바삐 무상 깨치시라
석전.금파.진응스님 문하서 공부한 강백 석전(石顚).금파(錦坡).진응(震應) 스님 등 대강백 문하에서 교학을 연찬하고 평생 후학 양성을 위해 정진했던 서응동호(瑞應東濠,1876~1950)스님. 조선불교와 계율 수호를 위해 1941년 3월 열린 유교법회(遺敎法會)에 증명법사로 참석하는 등 근대 한국불교의 초석을 놓은 선지식이다. 손상좌인 수진스님(부산 해인정사 주지.전 해인사 강주) 증언과 서응스님의 자필 문집을 중심으로 행장을 살펴보았다.
<사진설명> 1932년 7월 6일 고성 옥천사 강주로 머물 무렵 후학들과 함께 한 서응스님.(앞줄 가운데) 사진제공=수진스님
지필(紙筆)이 귀했던 시절, 더구나 시골 절에서 종이와 먹을 마음껏 사용하는 것은 힘들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彭�. 떡갈나무 잎을 종이로, 물을 먹물로 삼아 글을 익혔다. 잎사귀가 넓은 떡갈나무 잎에 먹 대신 물을 찍은 붓으로 글을 썼다. 물을 머금지 못하고 뱉어내는 떡갈나무 잎은 스님에게는 너무 소중한 도반이었다. 이마저 전념할 수는 없었다. 대중 소임을 봐야 했기 때문.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는 부지깽이를 두드리며 경전을 외웠다.
<사진설명> 빼곡하게 메모하며 공부했던 서응스님의 서책.
석전 박한영(1870~1948) 스님과는 스승과 제자였지만, 나이가 6살 밖에 차이 나지 않아 평생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 서응스님이 구암사 강주를 지내고, 1941년 유교법회에 참석한 사실도 두 스님의 인연을 보여준다.
1939년 삼각산 개운사에 개설된 대환계단(大環戒壇)의 전계아사리를 석전스님, 동호스님은 갈마아사리를 맡기도 했다. 이때 교수아사리는 일우진룡스님, 존증아사리는 한암중원스님과 만암종헌스님이 맡는 등 당대 고승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던 8월21일. 이날도 새벽 예불을 모신 후 스승 방을 찾았다. 문 밖에서 “스님, 스님”이라고 불렀지만 방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몇 번을 불러도 답이 없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응스님은 가부좌를 하고 고개를 숙인채 원적에 들어 있었다. 좌탈입망(座脫入忘)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이다. 평생 후학을 지도하며 강(講)을 했던 서응스님은 임종게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수행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보여주었다.
부산=이성수 기자 ■ 스님이 남긴 글 ■ ○… 서응스님은 한시로 지은 300여편의 글을 담은 문집을 남겼다.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담은 문집에는 조선불교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은 글도 실려있다. 이 가운데 ‘탄조선불교(嘆朝鮮佛敎)’와 ‘승려단체력(僧侶團體力)이란 글을 전 해인사 강주 수진스님의 도움을 받아 소개한다.
嘆朝鮮佛敎(탄조선불교)
오, 어찌하오리까. 어찌하오리까. /
僧侶團體力(승려단체력)
절집 생활은 일단 화합이니 / 의견이 같지 아니하여 만사가 차이가 나거든 /
■ 행장 ■
8대 강원 강주로 후학 양성 서응스님은 1876년 2월13일(음) 경남 고성군 개천면 원동리에서 태어났다. 원동리는 옥천사 인근 마을로 스님이 옥천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속성은 채씨(蔡氏)였다. 양친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출처 : 불교신문 2429호/ 2008년 5월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