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아무래도 칼은 너무 지저분하지 않나? 배를 쑤시든 멱을 따든 감당 못할 핏줄기가 전신을 붉게 적시고 온 방안을 질척이게 만들 텐데. 잔인하기로 치자면 그게 최고이기는 하지만 위험성이 너무 크다. 지문이야 어찌어찌 없앤다 하더라도 온몸에 뒤집어쓸 게 뻔한 피와 나오고 들어갈 족적은 또 어쩔 것인가.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건 다 옛말이다. 범인의 지능이 높아질수록 형사들의 지능도 발달해서 어지간한 트릭에는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설사 모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여타의 증거를 남기지 않고 강도가 들었던 것처럼 집안을 난장판으로 어질러 놓는다 해도 형사들은 일차적으로 나를 용의자로 지목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그 시간에 어디 있었다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아니고서는 시시각각 좁혀올 그물망을 피하기 어렵다. 증거로 채택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거짓말 탐지기까지 심심찮게 사용되는 마당에, 유력한 용의자로 낙인찍히면 물 붓듯 쏟아질 수많은 질문과 밤마다 잠못 이루는 고통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그래, 집안에서는 아무래도 안 되겠지? 여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그는 머리맡의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한 모금을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후, 한숨처럼 내뱉는다. 심부름센터에 맡겨? 그들이라면 베테랑일 터이니 돈은 좀 들겠지만 깔끔하게 처리해 줄지도 모른다. 사건 25시였던가? 몇 가지 인적사항 만으로도 누가 어디에 있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양쪽에서 최대한의 돈을 우려낼 것인가 까지를 항상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들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본 듯하다. 의뢰자가 원하는 선, 즉 죽이느냐 살리느냐는 둘째로 치더라도 팔과 다리를 못 쓰게 한다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앉은뱅이로 만들어 버린다거나 하는 세밀한 부분까지 의뢰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적인 일처리가 가능하다는 심부름센터. 그런 그들이니 사회적으로 유명하지도 않고, 요즘 부쩍 집에 있는 사람에게 괜한 어깃장이나 놓아대는 식당 아줌마 하나 쯤 실종자로 만드는 것은 우스울 것이다.
다만, 단점이라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만만찮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을 시작하는 착수금만으로 몇 백을 요구할지 알 수 없고, 일이 끝난 다음의 액수는 또 얼마가 될지 모른다. 머리맡의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게다가 더 불안한 것은, 무슨 작업이든 공범이 있거나 청부에 의한 것이거나 인간관계가 얽히면 꼬리가 밟힐 가능성이 많다. 범죄에 관한 TV채널과 수많은 비디오테이프를 섭렵하며 얻은 지식 중 하나는, 대개의 완전범죄는 단독범행이라는 사실이었다.
끄응, 그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며 신음소리를 낸다. 밤늦게까지 마신 술 때문인지 뱃속이 쓰리다. 그는 방문을 열고 거실 쪽으로 걸어 나온다. 시간이 꽤 되었는지 거실의 절반쯤까지 햇살이 번지고 있다.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어수선하다. 커피 생각이 난다. 그는 설거지거리가 잔뜩 쌓인 싱크대 옆 가스렌지의 불을 켠다. 그런 다음 커피 주전자를 찾아 주변을 둘러본다. 어디 있을까. 사기그릇이 제멋대로 쌓인 싱크대 안을 헤집자 맨 밑쪽에 주전자의 주둥이가 보인다. 손잡이를 잡고 칡뿌리라도 캐듯 신경질적으로 주전자를 쑥 뽑아 올린다. 사기그릇들이 와그르르, 저희끼리 부딪히며 소리를 낸다.
그래, 이렇게 뽑아내는 거야. 가스렌지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나자 내력을 알 수 없는 허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싱크대 옆 냉장고의 문을 열자 확 끼치는 신 김치 냄새. 프라스틱 김치통 옆으로 작은 양푼 안의 생닭이 하나의 선반에서 서로의 냄새를 섞고 있다. 다리와 몸통과 날개와 목이 토막토막 잘린 채 뒤죽박죽 포개어진 한 마리의 닭. 문득 그 위에 겹치는 얼굴.
아줌마, 빨리 좀 안돼요? 손님들이 육회 빨리 안나온다고 난리예요. 식당 여주인의 성화에 마음은 더 조급해진다. 그녀는 송글송글 맺힌 이마의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불에 그을린 채 잔털이 뽑힌 닭의 다리를 묶는다. 도마 위에 닭을 얹은 뒤, 면도날로 정중선을 따라 정수리 부위까지 조심스레 피부를 절개한다. 닭은 자기의 피부가 벌어지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닭은 눈만 말똥거린다. 갈라진 피부의 틈으로 조심, 손가락을 집어넣고 양 옆으로 잡아당긴다. 백짓장처럼 얇은 껍질은 너무도 쉽게 벗겨진다. 물론, 혈관이 다치지 않았으므로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피부가 완전히 제거된 뒤, 날이 선 회칼로 가슴살을 얇게 저민다. 혈관을 피하면 거의 투명에 가까운 육회를 얻을 수 있다. 그녀가 손에 쥔 칼이 가슴살을 다 떠낼 때까지 닭은 움직이지 않고 가끔, 젖은 눈을 끔벅일 뿐이다.
처음, 어깨 너머로 이 일을 배울 때만 해도 닭의 그런 모습에 소름이 돋았지만 이제는 습관적이고도 일상적인 일처럼 무덤덤하다. 닭 한 마리 더 있어요. 홀에서 들려오는 여주인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 들려온다. 오전부터 잡은 닭의 수를 헤아려본다. 가슴살을 뜬 횟수만 열 번을 넘는 것 같다. 이러다가 나도 백정이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가슴속으로 되뇌는 말끝에 그림자 하나가 짙게 배어온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제법 유망한 철강회사의 과장으로 근무하던 그가 구조조정의 서릿발 아래 퇴사를 당한 게 벌써 오년이 넘는다. 냉정한 성격에 가부장적이기는 하지만 남편은 성실했다. 그녀는 남편이 벌어다주는 월급을 알뜰하게 모아 이 도시에서 그런대로 산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A아파트의 중형평수에 입주를 했고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남편이 퇴직하기 전 해부터는 아파트 주민들과 어울려 에어로빅이며 골프연습장을 드나들었고, 하나뿐인 딸이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자주 반항적인 태도를 드러낸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을 뿐, 모든 일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그러나 남편의 퇴직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는 적지 않은 나이 때문에 쉽게 취직이 되지 않았고, 채 반년이 지나지 않아 자포자기했고, 물처럼 술을 마셨고, 급기야 그녀는 식당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손님이 많네. 주 여사님, 두 마리 더요. 식당 여주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주 신이 난 목소리다. 지나치게 일이 많다. 도마에 칼을 꽂고 앞치마를 벗어버리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불에 그을리기 전 괜한 악을 써대는 암탉의 울음만큼이나 공허한 짓거리일 뿐이다. 그녀는 잠시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잡는다. 회칼을 집어 든다. 주방 천장의 형광등 불빛을 받아 번쩍이는 칼날. 문득, 집안에 틀어박혀 대낮부터 소주나 마시고 있을 그의 뻔뻔한 얼굴을 닭 가슴처럼 회로 떠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닭의 가슴에 칼을 깊숙이 넣어 살을 절개한다. 혈관을 다친 닭이 꽤액 꽥 소리를 내고 가슴 속살에 조금씩 붉은 물이 든다. 아마도 하나 뿐인 딸이 아니었더라면 그와의 관계는 벌써 끝장났을 거다. 그와 함께 했던 수천의 날들이야 이미 닭 가슴살처럼 한 날 한 날 얇게 떠내어 버렸지만 피로 맺어졌다는 건 함부로 손님 술상에나 올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요즘 들어 자꾸 엇나가는 홍화의 모습이 그녀의 눈자위에서 일렁이다 사라진다. 주 여사님, 오늘 무슨 일 있어요? 벌써 두 번째네? 색이 나오면 안된다니까요. 단골들이 여우가 다 되어서 조금만 붉어도 입맛을 쩍쩍 다셔요. 신경 좀 써줘요.
어느새 어둠이 조금씩 내려오고 있다. 홍화는 교문을 나선다. 곧장 학교 근처의 공원을 향해 걷는다. 마른 플라타너스 잎들이 바람이 불때마다 서걱이며 떨어진다. 오늘은 서클 가입을 거부하는 전학생 하나를 손보기로 되어있다.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홍화는 화장실에서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아마 지금쯤 아이들은 이 공원에서 가장 후미진 노인정 뒤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벌써 작업을 시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홍화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노인정 건물을 끼고 돌자 한 아이를 가운데 두고 여럿의 아이들이 빙 둘러서 있다. 홍화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빨리 왔네?
홍화를 보자 아이들이 한쪽으로 비켜선다. 어서와, 아직 시작 안했어. 이번 작업 대상이 된 아이는 벌써 반쯤 사색이 되어있다. 얼굴이 반반하다. 얼짱이다. 서클엔 이런 얘가 꼭 필요하다. 그래야 다른 서클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홍화가 다니는 학교에서 두 블록 쯤 시내 중심가 쪽으로 남고가 하나 있는데 이 학교는 오래전부터 명문이다. 다른 학교에서는 전교생을 통틀어도 한해에 겨우 대여섯쯤 가는 K대에 십수 명이 들어갈 정도로 공부들을 잘한다. 공부뿐인가. 그 학교 일진은 이 도시의 고등학교 다섯 곳 중 서열 일위다. 이른 바 이 도시의 연합짱이 그 학교의 짱이다. 그 주먹짱에게 잘 보여야 홍화가 짱으로 있는 서클이 학교 내의 다른 여러 서클을 다스릴 힘을 얻는다. 학교에서 고르고 골라 오늘 데려온 아이는 그 주먹짱에게 상납할 먹이에 불과하다. 어쨌든 오늘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겠다. 벌써 눈동자가 풀리고 있으니까.
대항은 엄두도 내지 못할 스타일이다. 이런 아이는 속전속결이 최고다. 질질 끌면 끌수록 빈틈은 노출된다. 홍화가 서클의 한 아이에게 눈짓을 한다. 남자처럼 짧은 머리를 한, 불량기가 줄줄 흐르는 아이가 바지 주머니에서 면도칼을 꺼낸다. 그러더니 제 팔뚝을 걷고 실금을 긋는다. 가늘디가는 절개지 사이에서 조금씩 피가 배어 나온다. 면도칼을 주머니에 넣고 오른 팔로 왼팔을 움켜쥔다. 이제 제법 피범벅이다. 그 모양을 보는 얼짱은 다리에 힘이 풀린다. 동공의 초점이 사라진다. 게임 끝이다. 홍화가 제 팔을 그은 아이를 한 쪽 귀퉁이로 부른다. 이제부턴 네가 짱이야. 손가락에서 서클을 상징하는 반지를 빼어주며 그렇게 말한다.
얼짱과 아이들을 다 돌려보낸 뒤 홍화는 벤치에 걸터앉아 누군가를 기다린다. 가로등 불빛이 홍화의 얼굴에 닿자 붉은 빛을 띤다. 저편에서 한 남자가 홍화를 향해 걸어온다. 홍화가 손을 든다. 남자가 씨익, 홍화를 향해 엷은 웃음을 띤다. 어때, 컨디션은? 음, 좋아, 아주. 남자는 전에 없이 다정하다. 홍화의 학교 옆 남고의 일진 멤버다. 싸움을 아주 잘해서 연합 짱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친구. 성인으로 치자면 행동대장격인 그는, 역시 성인으로 치자면 홍화의 기둥서방 격이다. 홍화가 가방에서 스타킹과 마스크와 모자를 꺼내 보인다. 이정도면 되겠어?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어두운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소주 두병 째. 결론은 났다. 목을 조르는 걸로. 늦은 밤 퇴근하는 그녀가 집 근처 정류장에서 내려 아파트 쪽으로 걸어오는 두블럭 쯤의 거리에서 끝장을 본다. 4차선의 한적한 도로에서 차들은 과속을 하느라 굵은 플라타너스가 도열해 있는 인도 쪽으로 눈길을 돌릴 새가 없을 것이다. 인도 옆으로 상가가 형성되어 있지만 대부분 가구점이거나 카센타거나 철물상회 등으로 낮 장사를 하는 곳이다.
아파트로 걸어오는 중간쯤에 작은 옥수수 밭이 있다. 가을이라곤 하지만 수확을 한 뒤에 아직 밭을 갈아엎지 않았으므로 제법 빽빽하다. 힘없는 여자 하나쯤 그리로 끌고 들어가 목을 조르는 일은 생각보다 쉬울지도 모른다. 물론 옷을 벗긴다. 여기저기 멍 자국을 남겨 반항하다 죽은 걸로 처리한다. 경찰은 애초에 강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홧김에 목을 조른 걸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는 소주 두 병째의 마지막 잔을 들이키고 멸치대가리 하나를 꾹꾹 눌러 씹는다. 지어미보다 더 늦게 들어오는 딸의 진술은 그의 혐의를 벗겨줄 것이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라고. 술 마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폐인이라고. 그러므로 그는 작업을 끝내는 즉시 집에 돌아와 죽어라 술만 들이키면 되는 것이다. 알리바이는 그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 내일부터 그는 형사처럼 옥수수 밭 잠복근무에 들어갈 생각을 한다. 왠지 가슴이 설렌다.
주여사님, 여기요. 젊은 주인이 그녀에게 흰 봉투를 건넨다. 한 달 동안 수고 하셨어요. 매월 말일이 그녀의 월급날이다. 이 가게로 자리를 옮긴 게 석달 전, 전에 있는 곳에서는 찬모 일을 했었다. 반찬을 만들고 음식의 간을 보고 바쁠 때는 설거지까지 거들어야 했다. 하기야 워낙 작은 가게였으니 일을 구분 짓기도 애매했다. 홀이 바쁘면 홀로, 주방이 바쁘면 주방으로, 닭 잡는 일이 딸리면 그것도 거들어야 했다. 그렇게 바쁜데도 닭 가슴살 뜨는 남자는 자기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집중력이 흩트러진다나 뭐라나.
그때 알았다. 설거지보다는 찬모가 찬모보다는 칼잽이가 한수 위라는 것과 주방장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게 칼잽이라는 사실을. 쉬는 날이면 시장에서 생닭을 잡아와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고, 그런 날마다 여러 마리의 암탉은 가슴을 유린당해야 했다. 이 집으로 옮기고 난 뒤로는 월급이 제법 두둑하다. 집에 있는 남편만 아니라면 정말 살만할 것이다. 그녀는 아직 일이 마무리되지 않은 설거지 아줌마를 뒤로 하고 가게를 빠져나온다.
한 시간에 한 대, 집으로 가는 버스도 한 대 뿐이다. 집에서 두 블럭쯤 못미처 마지막 정류장이 있고 거기가 종점이다. 이번 차를 놓치면 막차만 남는다. 꽁무니 매연 빠지는 소리 요란하게 내며 칠사오번 버스가 그녀 앞에 멈춰 선다. 사람이래봐야 대여섯이 꾸벅꾸벅 졸고 있을 뿐이다. 뒤편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피곤하지만 졸리지는 않다. 그 대신 며칠 전의 일들이 꾸물거리며 머릿속을 헤집는다.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어주는 남편에게 또 술 마셨느냐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술에 미쳐 살 거면 나가 죽으라고 했지만 남편은 나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뻔뻔스럽게 여편네가 어떻고 하면서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궁시렁 거렸다. 순간, 그녀의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루 종일 피곤하게 일하고 들어온 사람에게 인사불성 제 몸도 못 가누면서 뭐가 어째? 여편네? 벗어든 구두를 들어 그의 면상에 냅다 던져버렸다. 정확히 얼굴에 맞으리라곤 미처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는 입술이 터지고 피를 흘렸다. 그때부터였다. 술에 취한데다 정신마저 흐릿한 남자는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그녀의 뺨을 때렸고 그녀는 달려들었다. 지난 오년간 쌓인 불만과 설움과 증오 같은 것들이 일시에 터지면서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 하지만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해도, 그녀 안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하더라도 남자의 완력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온몸에 멍 자국이 나도록 그녀는 맞았고, 마침내 울었고, 울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한 때 동네 깡패였다는 처남이 달려왔다. 그는 처남에게 죽도록 얻어맞았다. 다음날 그들은 경찰서에서 가해자로,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로, 그리고 또한 피해자로 얼굴을 맞댔다. 그녀는 처남이 저지른 일 때문에, 그는 그녀에게 저지른 일 때문에 악감정은 그대로 남겨둔 채 합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남편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졌다. 홍화 때문에 참아왔던 이혼을 지금에 와서는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래, 도장을 찍자. 지난 일주일 동안 마음속의 날을 세우듯 되뇌어왔다. 흔들리는 버스가 자신의 인생 같다. 그녀는 후, 하고 낮은 한숨을 내쉰다. 버스에서 내려 고지대에 있는 허름한 임대 아파트까지 내딛는 발걸음이 천근이다. 한순간이라더니, 어떻게 순식간에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 인간이 퇴직하고 주식에 손을 대지만 않았어도 이지경은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엔 대기업 우량주에 투자를 하던 그가 벤처기업 쪽에 눈을 돌리더니, 제법 짭짤한 수익을 냈고 그것이 미끼였다. 욕심에 눈이 먼 그는 증권가 루머에 휩쓸려 다녔고 곧 주식이 상장될 거라는 소문이 난 회사에 모든 돈을 쓸어 부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 회사의 주식은 상장은커녕 주가가 폭락을 거듭했고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더불어 그는 폐인이 되었다. 그녀가 지금 계단을 타고 오르는 것처럼 주가가 올랐다면 모든 것은 또 어떻게 변했을 것인가. 알 수 없다. 그녀는 현관 문 앞에 서서 실타래처럼 엉킨 생각의 끈을 놓는다. 초인종을 누르려다 말고 그녀는 핸드백을 뒤져 열쇠를 찾아낸다. 도어 록 돌아가는 소리가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술 냄새, 담배냄새가 뒤섞인 퀴퀴한 곰팡내가 역겹다. 그는 그녀가 들어온 걸 알면서도 방 밖엔 나와 보지도 않는다. 오늘도 변함없이 술에 취해 지난날을 곱씹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의 방으로 가 문을 연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방안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본래의 흰색이 바래 누렇게 뜬 이불, 언제 청소를 했는지 한 박스는 됨직한 빈 소주병, 재떨이에 수북한 담배꽁초, 가래를 뱉었는지 코를 풀었는지 여기저기 화장지 뭉치들이 온방의 바닥을 점령하고 있다. 거기다 퀴퀴하다 못해 코를 찌를 듯한 비린내가 코를 감싸 쥐게 한다.
나하고 얘기 좀 해. 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뜬금없이 뭔 얘기? 하는 것 같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마치 고깃덩이처럼 보인다. 이럴 때 회칼이 있으면 저 뻔뻔스런 얼굴을 도륙내고 싶다. 저 두꺼운 살가죽을 수십, 수백 조각으로 회를 떠서 손님들 테이블에 서비스라며 올려놓는 건 어떨까.
흐흐, 역시 우리 주여사가 최고야. 맛있어 보이는데 무슨 고기요? 아마 질겨서 잘 씹히지도 않을 것이다. 집에 선물 들어온 건데 고래라던가? 좀 느끼할지도 모르니까 와사비에 상추쌈해서 드세요. 단골들은 그의 얼굴을 먹으며 카, 오늘 술맛 쥑이는데? 할 것이다. 그의 얼굴 가죽은 단골들의 이빨 사이에서 씹히며 붉은 울음을 흘리겠지. 그들의 입 주변에 묻은 핏자국은 얼마나 짜릿한 전율일까.
당신과 헤어져야겠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그으래?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가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낸다. 아주 잘 되었다는 투다. 뒤이어 쯧쯧 혀를 찬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년이 이혼? 참 나 죽을 때가 가까워 오니까 별 걸 다 하려고 드네? 소원이라면 조금 더 빨리 죽여주지. 저렇게 설쳐대니 할 수 없는 일이다. 계획을 좀 앞당기는 수밖에.
그의 앞에 어두운 옥수수 밭이 펼쳐진다. 달도 없는 칠흑이다. 스타킹을 얼굴에 쓴다. 그 위에 또 모자를 쓴다. 그의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괴물 같다. 기다린다. 20분 쯤 후면 그녀는 버스에서 내릴 것이다. 20분짜리 목숨 하나가 그를 향하여 오는 중이다. 그는 숨소리마저 죽인다. 어둠과 하나가 된다. 드디어 그녀가 버스에서 내린다. 걸어온다. 목숨 끝으로.
그는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잽싸게 나꿔챈다. 그녀가 짧은 비명을 지른다. 입을 틀어막고 옥수수 밭으로 끌어당긴다. 사정없이 내팽개진다. 그녀는 비명을 지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살려달라고 애걸한다. 목을 누른다. 고깃덩이 하나가 그의 몸 밑에서 바둥거린다. 바둥거리는 힘이 점차 약해진다. 드리, 투, 원. 그리고 제로. 내세에는 부디 착한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그와 그녀의 눈빛이 허공에서 뒤엉킨다. 허공을 격하여 불꽃이 튄다. 죽여버리고 말겠어. 서로의 살의가 서로에게 전달된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흠칫 놀란다. 자신에 대한 상대의 증오가 저 정도였던가 하고.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구, 내일 어때? 점심때 법원 앞으로 나와, 서류는 내가 준비해 갈게. 그녀가 아니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당연히 가지, 근데 좀 늦을지 모르니까 기다리고 있어. 요즘 몸이 좀 안 좋아서 말이야. 그가 맞받아친다. 도무지 상대할 수 없는 인간이라 생각하며 그녀가 방문을 닫으려 할 때 초인종이 울린다, 이 시간의 벨은 홍화다. 두 사람의 눈빛이 다시 마주친다. 서로에 대한 증오로 가득하던 아까와는 달리 만감이 교차하는, 혹은, 이제야말로 올 것이 왔다는 눈빛. 홍화가 교복차림으로 현관에 들어선다. 홍화 왔니? 밤늦게까지 공부한다고 고생했다. 홍화는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아무 말도 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딸깍, 하고 문 잠그는 소리가 난다. 안방이 홍화의 방이 된지는 오래다. 그녀는 거실에서 잔다. 그녀가 안방 문 앞으로 가서 노크를 한다.
홍화야, 문 좀 열어봐. 남편에게 대하던 말투와는 달리 조용하면서도 딸에 대한 미안함이 배어나오는 목소리. 잠시 후 방문이 열린다. 이 방 역시 여고생의 방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책이며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홍화야,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네 아빠하고 이혼하기로 했다. 그녀가 낮은 한숨을 토해내며 어렵게 입을 뗀다.
그래요? 그거 잘 됐네. 진작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홍화는 뻔한 게 아니냐는 듯 거침없다. 그녀가 말을 잇는다. 나나 니 아빠야 어찌돼든 무슨 상관이겠냐만 니가 걱정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홍화가 웃는다.
깔깔깔, 걱정요? 남들이 들으면 딸 생각하는 중 알겠네. 신경 꺼요. 빌붙어 안 살 테니까. 어디 가서 산들 이보다 못할까, 안그래요? 삼촌이라는 작자가 조카를 성추행 하지를 않나, 아빠랍시고 술이나 마시면서 술심부름 안한다고 하나뿐인 딸 때리지를 않나, 내가 그런 삼촌 고발했을 때 사실을 덮기 급급했던 엄마는 어떻구, 완전 콩가루 집안이야. 콩가루! 홍화가 분통이 터지는지 목소리를 높인다.
사실이 그랬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불륜이 들통나 이혼까지 한 동생은 혼자 살면서도 여자에 대한 탐험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사기에다 혼인빙자 간음죄로 일 년 동안 교도소 신세를 진 전력이 있었다.
사건이 나던 날은 남편과 얽힌 싸움으로 인해 세 사람이 경찰서에서 합의를 보고, 악감정은 그대로 가슴 속에 묻어두던 그날이었다. 주말 초저녁이어서 홍화는 집에 빨리 들어와 제 방에서 잠들어 있었고 그와 그녀는 내친김에 결혼 생활에 대한 담판을 짓고자-담판이랄 것도 없지만- 그의 제안으로 동네 호프집으로 갔고, 홍화의 삼촌은 홍화와 함께 집에 남았었다. 이제 고3으로 서클 짱답게 제법 큰 키와 늘씬한 몸매, 거기다 어른처럼 부풀어 오른 젖가슴. 삼촌은 자고 있는 홍화에게 접근했고, 마치 홍화가 어렸을 때, 예쁘다며 안아도 보고 여기저기를 만져보기도 했던 그때처럼 홍화 곁에 누워 홍화를 안았고, 만졌고, 홍화가 놀라 일어나려 하자 힘으로 찍어 누르며 입술과 혀로 홍화의 얼굴이며 목덜미를 더듬었다.
아마 그 때, 홧김에 마신 술로 남편이 빨리 취해버려서 하던 얘기를 접고 술집을 빨리 나서지 않았더라면 삼촌은 틀림없이 홍화를 범했을 것이다. 홍화의 말에 그녀는 아무런 할 말을 찾지 못한다. 일어서서 방을 나선다. 뒤이어 거칠게 방문이 닫힌다. 온 집안에 침묵과 함께 싸늘한 냉기가 흐른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꺼지고 모두들 곤히 잠들었을 시간, 홍화는 잠이 오지 않는지 슬그머니 일어선다. 조용히 문을 열고 거실로 간다. 아빠야 술에 절어 세월 가는 줄 모를 테고, 엄마의 동정을 살핀다. 그녀 역시 하루 종일 일에 시달려 피곤해서인지 작게 코를 곤다. 홍화는 꼿발을 딛고 현관 쪽으로 간다. 도둑고양이처럼 숨소리도 죽인 채 현관문 앞으로 다가간 홍화가 살그머니 잠금쇠를 푼다.
평소엔 작게 느껴졌던 금속 긁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 엄마의 코고는 소리를 다시 확인한 홍화가 나올 때처럼 자기 방으로 조심조심 들어간다. 홍화가 잠금쇠를 푼 지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움직인다. 문이 반도 채 열리기 전에 시커먼 물체 하나가 쑥 들어온다.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이 그나마 검은 물체의 윤곽을 그려준다. 스타킹을 눌러 써서 얼굴이 짓뭉개진 문둥이처럼 보인다. 거기다 모자까지 눌러 쓴 모습이 섬뜩하다. 그는 천천히 거실에서 잠들어 있는 그녀 곁으로 다가간다. 손에 쥔 칼이 희미한 달빛을 받는다. 칼날이 번쩍인다. 그는 마치 유령처럼 엷은 코를 고는 그녀 쪽으로 스며들어 간다. 그녀가 덮고 있는 이불을 에돌아 그녀의 머리 위쪽으로 나아간다. 좁은 거실 전체에 이불이 펼쳐져 있어서 이불 이외의 공간을 찾기 힘들다. 이불 가장자리를 밟는다. 사그락, 하는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온다. 그녀의 몸이 감지하기 힘든 곳만을 골라 디뎌야 무사히 일을 끝마칠 수 있다. 그녀의 어깨 쪽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한다. 이제 한발자국만 더 내디딘다면 그녀가 깔고 자는 담요 밑의 지갑에 손이 닿을 것이다. 한발을 더 내딛는다. 순간, 이불 속의 무언가가 물컹, 발에 밟힌다. 그가 흠칫 놀라 동작을 정지한다. 그의 발에 밟힌 물체가 움직인다. 뒤이어 코를 골던 그녀가 신음소리를 낸다. 눈을 뜬다. 그녀는 누워 있는 자기를 바라보는 검은 물체를 본다. 세상에 태어나 단 한번도 본적 없는 인간의 형상. 얼굴이 짓뭉개진 저 모습. 숨 막히는 공포에 온몸을 돌던 그녀의 피가 싸늘히 식는다. 그의 움직임이 멎는가 싶더니 이내 손에 든 칼을 누워 있는 그녀의 턱 밑으로 갖다댄다. 그의 입에서 짧게 쉬잇, 하는 혓바람 소리가 난다. 그녀의 오금이 저려온다. 알 수 없다. 아닌 밤중에 웬 날벼락인가. 그럴 수 없을 만큼 동공이 벌어진다. 그녀를 위협하던 그가 다른 손으로 담요 밑을 뒤진다. 그의 손에 두툼한 지갑이 만져진다. 목적을 달성한 그가 짧은 저음을 내뱉는다. 움직이면 죽어. 그가 몸을 일으킨다. 현관 쪽으로 급히 발을 내디딘다. 누워 있던 그녀가 그의 바짓단을 잡는다. 순간, 그가 몸의 중심을 잃고 앞으로 꼬꾸라진다. 넘어지는 와중에 칼과 지갑을 손에서 놓친다. 그녀가 상체를 일으키고, 그는 어둠 속에서 칼과 지갑을 찾기 위해 거실 바닥을 더듬는다. 그녀가 말타기 자세를 한 채 손을 놀리는 그의 잔등 위로 올라탄다. 올라타서 그의 목을 뒤에서 감는다. 그의 손에 칼과 지갑이 만져진다. 손에 쥔 칼의 손잡이로 그의 목을 조르다시피 감고 있는 그녀의 팔을 힘껏 내리친다. 아, 하고 그녀가 소리를 지른다. 그를 잡았던 손을 푼다. 그가 그녀를 뿌리치고 일어서서 현관 문 쪽으로 간다. 강도야! 그녀의 입에서 악에 받친 쉰소리가 새어나온다. 그가 현관문을 열고 뛰쳐 달아난다.
술에 취해 자고 있는 그는 강도가 들어왔다 나가고, 그녀의 비명 또한 듣지 못했는지 인기척이 없다. 홍화가 안방 문을 열고 부스스 잠 덜 깬 얼굴로 걸어 나온다.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 있었냐라니.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 표정으로 딸을 바라본다. 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니? 그녀가 홍화에게 묻는다. 글쎄요,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난 가위라도 눌렸나 했죠. 이렇게 대답하고 홍화는 주전자의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이내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세상에. 강도가 들어왔다 나가고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가족이라니. 그녀는 날이 희부옇게 밝아오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다, 아침녘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든다.
홍화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오늘은 교복이 아닌 사복 차림에 책가방 대신 배낭용 가방이다. 도로까지 걸어 나와 횡단보도를 건넌다. 차를 기다린다. 횡단보도 건너편 정류장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몰려 서 있다. 역전 행 버스를 탄다.
흔들리는 버스 위에서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아파트를 바라본다. 아침 햇살이 고지대의 아파트 너머에서 부챗살처럼 퍼져 내려온다. 한때 행복했고 아파했던 모든 날들이 그 빛과 함께 굴러 떨어진다. 인도 옆 플라타너스의 마른 잎새 하나가 소리 없이 지고 있다. 홍화는 고개를 돌려 버스 노선이 그려진 안내판을 본다. 회로도 같다. 돌고 도는 그 무엇.
다음 정류장이 역이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버스에서 내려 매표소 쪽으로 빠르게 걷는다. 저 편에서 누군가 손을 흔든다. 행동대장이라는 그 일진멤버다. 표는? 홍화가 묻는다. 응, 끊어 놨어. 시간 다 됐다, 가자. 사이좋게 팔짱을 낀 그들은 플랫폼으로 내려간다. 둘이 함께 나란히 서서 기차가 들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철로 건너편으로 이 작은 도시의 풍광이 아련히 펼쳐진다. 기차가 들어온다. 홍화가 올라탄다.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어. 홍화가 중얼거린다. 기차기 서서히 플랫폼을 빠져나간다.
그녀는 늦잠을 잔다. 햇살이 베란다에서부터 이마 쪽으로 번져오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눈을 뜬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버스에 올라 좌석에서 눈을 감을 채 생각한다. 어제 새벽의 일들을. 그 강도는 분명 월급이 든 지갑의 위치를 아는 눈치였다. 아니라면 어떻게 담요 밑의 지갑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을까. 담요 밑에 지갑을 넣어두고 자는 그녀의 버릇은 그와 홍화만이 안다. 설마 그가? 아니면 홍화?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그럴 리 없다. 요즘 좀 반항적이어서 그렇지 홍화야 원래 착한 아이고, 그 역시 지난 몇 년간 사람들과의 교류가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배짱 있는 위인도 못된다. 모를 일이다. 그녀는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잠시 접는다. 버스에서 내려 ‘비금도 촌닭’이라 쓰인 간판 밑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는 이례적으로 일찍 눈을 뜬다. 정오가 되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다. 어지러운 방 안의 책상 서랍에서 이미 사둔 스타킹과 검은 색 모자를 꺼낸다. 스타킹을 집어 들고 얼굴에 쓴다. 그 위에 모자를 꾹꾹 눌러쓴다. 벽 한쪽에 걸린 거울 앞으로 다가가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아무리 바라봐도 과연 이게 자신의 얼굴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설사 신이라도 나의 정체를 모르리라. 그가 어금니를 꾸욱, 깨문다. 그래, 오늘이 디데이야. 스타킹과 모자를 서랍에 넣고 옷을 벗는다. 썩은 내 나는 런닝이며 스웨터, 바지와 팬티까지 남김없이 벗는다. 욕실로 들어가 정성껏 몸을 씻는다. 그는 자신이 전쟁을 앞 둔 무사 같다고 생각한다. 그가 새 옷과 양말을 챙겨 신고 아파트 현관을 나선다.
그녀는 벌써 도착해 있다. 그가 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잎 지는 플라타너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가 점점 가까워진다. 이런 때 시간 맞춰 오면 어디가 덧나니? 그녀는 다가오는 그에게 아예 말을 내리 깐다. 그녀의 그런 말투를 처음 듣는 그가 어이가 없는지 허허 웃는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법원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평소처럼 열 댓 마리의 닭 가슴살을 뜬 그녀는 퇴근을 서두른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닭집을 나선다. 칠사오번 버스는 텅 비어 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지난날의 추억 같은 것들과 살아가야 할 날들과 그리고 홍화를 생각한다. 내일은 적금을 깨야겠어. 남편 명의의 얼마 안돼는 임대보증금 따위, 어찌 되어도 좋을 것 같다. 적금을 깬다면 홍화와 단 둘이 살 집 정도는 어렵잖케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홍화 하나 키워내지 못할까.
그래, 이것만 있으면. 그녀는 손가방을 열고 자신이 얘용하는 회칼의 날을 만지작거린다. 칼날이 버스 안의 불빛에 닿아 하얗게 반짝인다. 무능한 남편까지 짊어져야 했던 날들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간다. 되었어. 이제 때묻은 껍질을 벗게 되었으니.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그녀의 가슴이 조금씩 부풀어 오른다. 버스가 마지막 정류장에 선다. 어둠 속에 그녀가 내린다. 달도 없는 칠흑이다. 도로가의 차들이 빛살 같은 속도로 내달린다. 셔터가 내려진 카센터를 지난다. 역시 문을 닫은 철물상회와 가구점을 지난다. 어두운 옥수수 밭이 점차 가까워진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달 없는 하늘을 본다. 순간, 바람 때문인지 옥수수대가 사그락,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어두운 옥수수 밭이 그녀 쪽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