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본토의 도서관인으로서 이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관광, 유람이 반이었지만, 당시 조선의 도서관인으로서는 이 대회를 조선 도서관 진흥의 일대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이 시기에 조선의 도서관 수가 1932년 52개 관을 정점으로 줄어드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조선총독부는 직접 도서관을 사상의 선도기관, 식민지 이데올로기 주입 기관으로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는데, 특히 이 대회에서 “도서관에 바란다.”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우가키 총독은 도서관의 2대 사명을 ‘사상(思想)의 관측소(觀測所)’이자 ‘양서선본(良書善本)의 선택소(選擇所)’가 되는 것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당시 일본도서관협회는 문부성의 보조금을 얻어 양서 보급사업(1931년)을 하며 중앙도서관제도(1933년)를 실시하고 있었다. 이 대회에서 총독부는 도서관 사업을 자치적으로 실시하라고 하였지만, 사실상 국가의 강제적 개입 의도를 노골화하였다.
이 대회에 참석한 한국인은 인정도서관을 설립·운영한 김인정 여사를 비롯하여 훗날 국립도서관 부관장이 된 박봉석, 서울대학교 초대관장이 된 김진섭, 농촌 문고 발전을 위해 헌신한 강진국, 서울대학교 부관장이 된 김구경, 당시로서는 드물게 시러큐스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장을 지낸 이묘묵, 문부성이 발급한 ‘사서 자격증’을 한국인 최초로 보유하고 훗날 조선서적회사 지배인과 어문각 전무를 지냈던 최장수, 경성도서관연구회에 활동한 성달영 등 20여 명이었다.
이들은 도서관계 실력자들로서 사실상 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에 한국 도서관의 발전을 이끈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도서관계 선구자였던 이들 가운데 많은 인사가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거나 행불되어 그 소식을 모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