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6:14-23, 사울과 다윗, 24.5.1, 박홍섭 목사
사무엘상 15장부터 31장까지는 사울과 다윗의 모습이 일관된 대조로 나타납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백성이 원한 왕의 전형으로 택함을 받은 인물이라면 다윗은 그와 비교되는 왕으로 세워진 왕입니다. 이 둘은 오늘 본문에도 극명한 대조의 모습을 보입니다. 먼저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택하여 기름 부었을 때 다윗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반면에 14절은 무엇을 말합니까? 사울에게는 여호와의 영이 떠나고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사로잡아 괴롭게 했다고 합니다.
무엇이 대조됩니까? 성령의 임재와 부재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삶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사울은 성령이 떠나고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임하여 번뇌와 괴로움으로 대변되는 비극적인 삶이 진행됩니다. 여기 번뇌는 고민과 걱정과 염려로 인한 정신적 쇠약과 쇼크 증상으로 사울의 경우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불 신앙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과 종교 행위를 자신을 위해 이용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다른 왕을 세우겠다는 결정적인 말씀을 듣자 사탄의 격동으로 큰 고민과 정신적인 쇠약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때 사울은 신하들의 조언에 따라 수금 타는 자를 찾도록 지시하고 다윗이 궁중에 들어오는 계기가 됩니다. 다윗은 악한 영으로 고통을 받는 사울을 위해 수금을 연주하여 사울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고 악신을 그에게서 떠나게 합니다(14-23).
여기서 다윗의 수금 연주를 음악치료의 효시라든지, 나아가 찬송이 마치 악신을 쫓아내는 능력인 것처럼 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열심히 찬송을 부르면, 특별히 보혈 찬송을 부르면 귀신이 도망간다는 식의 생각은 찬송 자체에 주술적인 효과가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지금 다윗의 수금 연주도 동일합니다. 만약 다윗이 아닌 다른 사람이 수금을 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도 악신이 사울에게서 떠났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악신이 떠나는 일은 오직 여호와의 신이 임한 다윗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수금 연주가 아니라 다윗의 수금 연주를 통해 역사하신 성령님에게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 앞에 세우실까요? 이미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왕으로 택하셔서 기름을 부었고 성령도 주셨지 않습니까? 그랬다면 하루속히 왕을 교체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왜 굳이 사울에게 악신을 들게 하시고 다윗을 그 앞에 세워서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의 악신을 떠나게 하는 모습을 보게 하고 악신으로 번뇌하는 사울을 섬기도록 합니까?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령이 떠난 사울의 모습을 똑똑히 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마치 주사의 힘으로 연명하고 있는 중환자처럼 다윗의 도움으로 겨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왜 이 모습을 보게 하십니까? “다윗아 네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먼저 기름 부음 받은 사울을 보라, 성령이 떠나면 너도 저렇게 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실제로 시편 51편을 보면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를 죽이는 악한 죄를 범한 뒤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고 회개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11절에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왜 이런 기도를 했을까요? 여호와의 신이 떠난 사울의 상태를 목격하고, 그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령이 떠나버린 사울의 비참한 인생을 똑똑히 보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인생은 왕이라 할지라도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비참한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회개하면서 제발 나를 그 자리까지는 가지 말게 해 달라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 달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비참하게 합니까? 돈 없고 힘없고 가난한 삶도 비참합니다. 그러나 비교할 수 없이 큰 비참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성령이 떠나는 인생입니다. 사울은 돈이 있었습니다. 권력과 지위와 힘이 있었습니다.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악신에 들려 번뇌에 사로잡힌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오직 자신의 힘과 자신의 재주로만 살아야 합니다. 그 본질은 욕심과 죄가 다스리는 삶이고, 마지막은 악한 영에게 휘둘리면서 번뇌와 번민으로 고통받는 삶입니다. 그러면서도 권력과 부와 힘을 누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런 사람들을 잠깐이라도 회복시키고 평화롭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사울이 처음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성령이 임했을 때는 성령의 은사로 예언을 했습니다. 다윗에게는 사울에게 처음 있었던 예언의 은사만 아니라 다른 어떤 외적인 은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다윗을 통해 사울을 괴롭히던 악신이 떠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다윗을 통해 사울의 영혼이 잠깐이라도 평안을 누렸다면 이보다 큰 성령의 역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믿음의 고백이었고 영혼의 노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랑의 고백이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믿음의 일상이었습니다. 이 일상의 노래와 고백이 모든 번뇌를 물리치는 성령의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살전 5:16-22을 찾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예언,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지 않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성령의 임재, 감동이 없으면 우리도 외적인 지위와 부의 여부와 상관없이 번뇌와 고통, 근심과 염려, 범죄와 그로 인한 상실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울을 통해 무엇이 성령의 감동을 소멸시키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려고 하나님과 신앙마저도 이용했던 사람입니다. 그 결과 마지막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가 택함을 받은 이유는 그 중심이 다른 사람보다 깨끗하고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택함을 받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악신 들린 사울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는 다윗 자신의 타고난 재능이나 유능함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안다면 절대로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교만하지 않도록 사울의 비참한 모습을 직접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지금껏 우리가 살아온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택함 받지 않았더라면, 부름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성령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가 없었더라면 우리도 사울처럼 비참하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뭐가 다르겠습니까? 이런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우리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성령이 탄식하시면서 그 감동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선택받은 자는 버림받아 마땅한 나를 택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에 머물기 위해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살려고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성령은 역사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십니다. 이 혼돈의 시절에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내가 하는 말과 사역과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을 격발시키는 악의 도구가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성령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