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5:33-39,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24.6.16, 박홍섭 목사
살다보면 울어야 할 때가 있고 웃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서야 할 때가 있고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잔칫집에서는 기뻐하고 초상집에서는 애통해야 합니다. 신앙도 그러합니다. 기뻐해야 할 때가 있고 애통하며 금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은 그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즐거워해야 할 때 애통합니다. 애통해야 할 때 잔치합니다. 오늘 본문에 그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묻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들이 다시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는데 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왜 먹고 마시기만 하는가?” 당신이 경건하다면 금식해야 하고 당신의 제자들에게 금식을 가르쳐야 하는데 왜 금식하지 않고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냐는 도발입니다.
이들이 도발의 주제로 사용하고 있는 금식이 무엇입니까? 금식은 자신과 공동체의 죄에 대하여 애통하며 하나님 앞으로 돌이키겠다고 결심할 때 하는 신앙 행위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할 수 있다는 절대적인 의존의 고백으로 금식을 하기도 합니다. 육체적 생명의 공급원이 되는 음식을 끊으므로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만으로 이 일을 진행해 나가겠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시오.” 이런 절대적 의탁이 금식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을 주리실 때도 바로 이런 전적인 의탁과 자기 포기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금식은 이런 신앙의 의미가 아니라 자기 경건의 과시와 자기 자랑의 수단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금식의 원래 정신이 아니라 금식의 횟수입니다. 일 년에 한 번 보다는 한 달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보다는 일주일에 한 번, 그 한 번도 얼마나 연속으로 하는가? 3일인가? 일주일인가? 40일인가? 에 따라서 경건의 척도가 매겨졌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금식하지 않는 예수님은 경건과 거리가 먼 사람일 뿐입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34-3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금식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금식해야 할 때가 있음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님을 당시의 결혼풍습을 가지고 설명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결혼식을 마치면 일주일 동안 집에서 손님들과 먹고 마시는 혼인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때 신랑은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자기 일생에서 단 한 번 누릴 수 있는 그 잔치를 즐겼고 초대 손님들도 신랑과 함께 기쁨으로 혼인 잔치를 즐겼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으로 비유합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대답은 자명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누가 잔칫집에 온 손님에게 금식을 요구하겠습니까? 말도 되지 않는 처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세리나 다른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는 지금이 어떤 순간입니까? 인류 역사 내내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기다려왔던 바로 그 순간입니다. 우리 죄를 구속하고 우리를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고아원에 있던 고아가 오래 기다렸던 부모를 만나는 순간과 같습니다. 고아원에 아이를 맡긴 부모가 아이를 찾아가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직 그날만을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그날이 왔다면 이날은 마땅히 기뻐해야 할 날이고 춤을 추어야 할 날입니다. 이날보다 기쁜 날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와 있습니다. 신부가 오랫동안 학수고대하고 기다렸던 신랑으로 와 있으며 고아원의 자녀가 오랫동안 만날 날을 고대해왔던 아빠로 와 있습니다. 그러니 금식할 때가 아닙니다. 기뻐하며 환영하면서 그를 영접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수천 년을 기다려왔던 구원의 순간인데 어떻게 금식할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런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어떻게 금식도 하지 않고 제자들을 훈련 시킬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금식도 하지 않고 경건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새 옷의 생베 조각과 낡은 옷, 그리고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비유로 다시 대답하십니다. 36-38입니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트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주님은 신랑이 주는 새 포도주의 기쁨을 잘못된 의미로 변질된 금식의 낡은 부대에 넣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과 그로 인해 맛보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은 금식과 기타 여러 가지 종교적 틀로 다 담을 수 없는 너무나 새로운 기쁨과 평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주시고자 하는 이 나라를 율법주의의 종교적인 틀로 담으려고 하면 마치 새 옷의 생 베 조각을 헌 옷에 붙일 때 헌 옷이 헤어져 찢어지는 것처럼 찢어집니다.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으면 헌 부대가 새 포도주의 발효를 이기지 못해 터지는 것처럼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낡은 옷과 헌 부대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주의의 낡은 종교적 사고의 틀과 형식과 전통을 의미합니다.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전락한 금식이라는 잣대 하나로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는 낡은 사고의 틀로 어떻게 성령과 복음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담을 수 있겠습니까? 낡은 부대로 새 포도주의 발효력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들의 금식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생명의 금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금식은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멀어졌으며 자기 자랑과 자기 의만 드러나는 자기 과시에 불과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는 이틀 금식하니 우리는 사흘 금식하겠다”는 식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주시고자 하는 나라는 잘못된 금식으로 평가하고 측량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면 금식해야 할 때가 언제입니까? “신랑을 빼앗길 날”입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말은 좁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를 의미하고 넓게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 얻은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세상의 유혹 앞에 마음을 빼앗겨 신랑을 놓치고 있을 때를 뜻합니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는 신부가 갑자기 남편이 죽었다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안고 하루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그런 날에 금식하라고 하십니다. 내 삶에 신랑 되신 예수님이 사라지고 안 계실 때, 세상 재미와 유혹으로 신랑을 빼앗기고 있을 때 우리는 식음을 전폐하고 죄를 내어놓고 애통해하며 다시 신랑에게 돌아가겠다고 결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는 누가 뭐라고 해도, 아무리 먹으라고 해도 목숨을 걸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매어 달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의 요점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느헤미야 8장을 보면 학사 에스라가 수문 앞 광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읽을 때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울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슬퍼하거나 울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오히려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잔치하도록 명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날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난 날이요 성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면 신랑이 나와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금식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형편이 어떠하고 환경이 어떻든지 깨닫게 해주신 그 말씀이 내 삶을 주의 뜻대로 인도해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뻐해야 합니다.
셋방에 살거나 저택에 살거나 건강하거나 병들었거나 상관없습니다. 버스 타는 인생이냐? 고급 차를 타는 인생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삶에 신랑 되신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예수님 때문에 죄 사함의 확신이 생기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들이 나타나는데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고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계속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온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낙망하지 말고 기뻐하십시오. 신랑 되신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고 좋은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는다면, 예배가 지루하고 기도가 형식적이 되고, 신앙생활에 기쁨과 감사가 아니라 짜증과 불평과 원망이 넘친다면, 좋은 차를 타고 맛있는 음식을 철마다 골라서 먹고, 넓은 집에 부러울 것이 없도록 해놓고 사는데도 만족과 평강이 없다면 신랑을 빼앗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잔치가 아니라 금식해야 합니다. 애통하며 마음에 베옷을 입고 울면서 내 심령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오심으로 율법주의의 틀로 담을 수 없는 새 시대가 왔습니다. 율법의 형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들은 율법을 성취하러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각도로 이해해야 합니다.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으니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합니까? 39절을 보십시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그들은 묵은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거부했습니다. 이들이 거부한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새로운 시대는 예고도 없이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오랫동안 말해왔던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에 따라 예수님이 오셨고 새 시대를 여셨습니다. 죄인들을 회개의 자리로 부르시고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죄인들을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에게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성전으로 오라고 하지 않고 친히 성전으로 오셔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구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묵은 포도주가 좋다고 하면서 이런 주님을 율법주의의 낡은 형식으로 해석해서 주님이 주시는 새 포도주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우리에게 이런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없습니까? 범사에 때가 있습니다. 잔치해야 할 때가 있고 금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삶에 예수님의 임재가 있고 말씀의 통치가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며 잔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형통하고 잘나가도 말씀이 들리지 않고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이 없다면 신랑을 빼앗기고 있으니 슬피 울며 금식해야 할 때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속입니다. 기뻐해야 할 때 울게 만들고 통회하고 금식하고 나아가야 할 때 웃게 만듭니다. 언제나 그럴듯한 미끼를 내어 걸고 우리의 신랑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신랑 대신 다른 것을 주겠다고 하면서 내 삶에 그리스도가 사라지게 만듭니다. 나는 지금 어떤 때를 살고 있습니까? 신랑과 함께하고 있습니까? 신랑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삶에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신랑 맞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신랑의 음성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잔치해야 할 때인지 금식해야 할 때인지 잘 돌아보고, 주님이 주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 그 기쁨과 생명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