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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르호봇의 축복이(2247.2024.4.28)
창26:12-22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누구나가 갈등을 갖기도 하고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 한번 살아가는 인생 순탄하기를 바라지만 순탄하기만 한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갈등이 없는 곳은 무덤밖에는 없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건강과 경제와 사람들과의 갈등과 싸움이 있습니다. 가장 큰 고통은 적들이 공격하는 것과 전쟁일 것입니다. 성경은 원수를 대적치 말라고 하십니다(롬12:19-20,잠25:21-22).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시니까 너희는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베풀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어렵지만 하나님의 힘과 능력과 약속으로 순종하기만 하면 놀라운 화평과 승리의 기적을 이루십니다. 어려운 관계와 시대에 마음을 넓혀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상주감리교회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르호봇(장소가 넓은)의 축복을 베푸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 역시 당시에는 보잘것없는 이주민들 중에 끼인 한 집안의 족장에 불과했습니다. 그 역시 하루하루의 삶을 연명하는데에 전력해야 하는 생활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인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겠지만 당장 그의 식솔들을 먹여 살려야하는 일에 눈코 뜰새 없는 한집안의 가장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생활터전은 일가친척 하나 없는 타지였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의 아버지때처럼 당장 내일 먹어야할 것을 오늘 마련해야 하는 극심한 가뭄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도 약속의 아들이고 뭐고 당장 목구멍에 풀칠하는 것이 급선무 였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는 굉장히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블레셋땅인 그랄에서 그는 부전자전이라고 그의 아버지가 했던 실수를 똑같이 저지르게 됩니다. 이것이 실수라기보다는 저와 여러분도 이와 똑같이 위기 앞에서 연약하기 짝이없는 인간의 모습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같은 사건을 반복하여 격게 하신 것입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자기부인 리브가 보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삭으로서는 왜 이렇케 꼬이는 일만 자꾸 일어나는지 환장할 노릇입니다.
그의 단점은 또한 창25장에서도 기록되어있듯이 자식을 편애함으로 자녀 교육에 실패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우유부단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가는 곳마다 자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임을 알리기 위해서 여호와의 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말로 하면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예배드렸다는 것이 2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토록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이삭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복 주셔서 오늘 본문12절에서처럼 그 땅에서 즉 타지에서 많은 역경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삭을 큰 부자가 되게 만드셨습니다.
이삭은 흉년을 피하여 애굽으로 가려고 하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그랄 땅에 거하라 그리하면 땅과 자손과 재물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애굽은 신앙이 없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내 마음대로 이리 가고 저리 가고 그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살기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더 잘되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에 머물렀습니다. 그랄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의 수확을 얻었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여 아브라함 때에 파놓았던 우물들을 메워 버렸습니다. 비가 적고 건조한 팔레스틴 지역에서 우물은 사람과 양떼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물을 메워 버렸다는 것은 전쟁을 선포하는 행위나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서 또 우물을 팟습니다. 그런데 그랄 사람들이 계속해서 이삭의 우물을 메워 버리고 시비를 걸고 좇아내고 네 번이나 괴롭혔습니다. 물론 이삭은 그들과 싸울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삭은 신앙의 사람이라 할 수만 있다면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괴롭혀도 대항하여 싸우지 않고 참고 인내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손해가 나도 끝까지 순종하면 더 좋은 길이 열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이삭이 우물 파는 곳마다 물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파면 안되는데 이삭이 땅만 파면 물이 나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도 이런 사람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애굽에는 나일 강이 있어서 아무리 가물어도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시한 곳에 머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애굽으로 가지 않고 그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랄은 가뭄이 들었을 때 거주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삭이 하나님께서 머물라고 한 곳에 머물렀을 때 이삭은 큰 복을 받았습니다.
12절‘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이삭이 그랄에서 어떻게 복을 받았는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머문 곳에서 하는 일마다 잘되었던 것입니다. 가물어서 목초지가 넉넉하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양들이 건강합니다. 양들이 보통은 한 마리 아니면 두 마리의 새끼는 낳는데 이상하게 이삭의 양들은 꼭 두 마리씩 새끼를 낳습니다. 양들은 새끼 때는 보통 많이 죽는데 이상하게 새끼들이 죽지 않고 건강하게 어미로 자랍니다. 이 모든 것이 재수가 좋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지 않고, 운이 좋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지 않고,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1.이삭이 말씀에 순종할 때 르호봇의 축복을 주시니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에 머물렀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하는 일마다 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 꼭 싫어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본문 14절을 보니까 이삭이 복을 많이 받는 것을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를 해서 이삭이 판 우물을 흙으로 메웁니다. 이삭이 힘들여서 판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워버립니다. 에섹은 다툼이라는 뜻입니다. 우물을 양보하였습니다.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방해하고 빼앗았습니다. 그 이름을 싯나라고 하였습니다. 대적함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니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서 이삭을 쫓아냅니다. 참 이상합니다. 이삭이 복을 많이 받으면서 그들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 없습니다. 이삭이 그들의 것을 빼앗거나 그들에게 손해를 입히면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이삭은 그냥 하나님께서 잘되게 해 주셔서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우물을 메우고, 아비멜렉 왕은 이삭을 쫓아내는 것일까요? 이것이 세상의 죄악된 습성입니다. 세상에는 ‘너의 행복은 곧 나의 불행’이라는 못된 심성이 뿌리 깊이 내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는 참으로 이상한 속담이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도 다 아시는 속담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사촌이 땅을 샀는데 왜 내 배가 아파야 하는 것입니까? 사촌이 열심히 살아서 땅을 사면 좋아서 축하해주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내 배가 아프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심성 안에 이 고약한 심성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비록 세상은 그렇다고 해도 우리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를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는 함께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이 복을 많이 받는 것을 보았다면 미워하고 우물을 메울 것이 아니라, 이삭과 함께 이전보다 더 사이좋게 지내야 정상입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도 이삭이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는 것을 보았다면 이삭을 쫓아낼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맞습니다. 그랄 왕 아비메렉이 볼 때 이삭이 하나님을 잘 믿어서 복을 많이 받으면 이삭이 믿는 하나님을 자기도 믿고 싶은 마음이 들 수는 없었을까요? 왜 이삭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 싶다는 참 좋은 생각은 들지 않고 이삭을 쫓아내려는 생각이 더 들었을까요?
이 사람들이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은 모두가 땅의 복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땅의 복은 현재 땅에 있는 것을 얼마나 쪼개서 나누어 먹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너의 것을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어야 그것이 나의 복이 되는 것이 땅의 복입니다. 당신이 그만큼 복을 받으려면 내가 그만큼 손해를 본다는 것이 땅의 복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복은 땅에 있는 것을 쪼개서 나누는 복 그 이상입니다. 내가 이득을 보기 위해서 너는 손해를 보아야 하는 그런 복이 아닙니다. 하늘의 복은 나에게도 넘치면서 너에게도 넘치는 복입니다. 하늘의 복은 함께 나누었는데 이상하게 모자라지 않는 복입니다. 하늘의 복은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장정만 오천 명에게 나누었는데 이상하게 열두 광주리가 더 남는 그런 복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늘의 복의 원리를 믿지 못하면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입니다.그래서 나도 못 먹고 너도 못 먹게 우물을 막아버리는 고약한 짓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의 원리를 믿는 사람은 다른 성도님이 복을 받는 것을 기뻐하고 축하 해주었더니 나에게도 그런 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무슨 일이든 서로서로 기뻐하고 축하했더니 그 좋은 일이 각 가정에도 생기게 되는 그런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는 서로서로 잘 되면 축하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잘 되는 축복이 내게도 임하시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2.이삭은 그랄 왕이 쫓아내면 고분고분 그곳을 떠납니다.
이삭은 첫 번째 우물을 빼앗겼지만,두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싸우거나 다투지 아니하고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그랄의 목자들이 와서 그 우물도 자신들의 것이라며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이삭은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고 복수도 안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서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삭이 우물을 파니까 더 좋은 우물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삭이 우물을 팠던 그 지역은 물이 잘 안 나오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하시니까 사막에도 물이 나오고 산꼭대기에도 물이 나왔습니다.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고 양보하는 이삭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을 보상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상주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시는 여러분도 선으로 악을 이기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삭은 그랄 목자들이 와서 힘겹게 판 우물을 메우면 다시 또 다른 곳에 우물을 팝니다. 그 당시 그곳 지형에는 우물을 파면 아무 곳에나 물이 솟아나는 곳이 아닙니다. 우물 하나 얻으려고 부족 간에 전쟁을 할 정도로 우물물이 나오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 우물을 포기하고 다른 곳에 또 우물을 판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우물 하나 팔 것인지, 아니면 전쟁을 해서라도 현재 물이 있는 우물을 지킬 것인지 고민을 해야 할 정도로 우물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우물을 양보합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이삭의 이런 행동은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냥 좀 손해 보는 정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그곳에서는 우물은 생존과 직결된 것입니다. 양보할 것이 따로 있지, 우물은 양보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랄 목자들과 싸워서라도 우물은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삭은 무슨 배짱으로 우물을 양보했단 말입니까? 아니면 이삭은 싸울 자신이 없어서 물이 없어 죽더라도 그냥 양보한 것이었을까요? 이삭의 아들 야곱 같았으면 악착같이 싸웠을 텐데 말입니다.
성경에는 생각보다 전쟁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싸우라고 하신 전쟁도 많이 나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서 싸우시는 전쟁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에는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까지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전혀 반대의 말씀들을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 화평의 하나님, 화목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는 싸워야 할 때이고, 언제는 참아야 할 때인지 참으로 분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아야 할 때에 싸우기도 하고, 싸워야 할 때에 참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이것이 함정이고,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이것 아니면 저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놓친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싸우는 것이 유리한지, 참는 것이 유리한지 그것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삭은 우물물을 솟아나게 하실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랄 목자들에게 자존심 상하게 졌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일,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생각하니깐 또 다른 우물을 파면 되겠다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주도권을 항상 내가 잡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내가 결정해 놓고 하나님은 도와주기만을 바라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주도권을 우리에게서 빼앗으려고 하십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가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주도권을 모두 다 막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주도권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셔서 전적으로 성령님의 주도권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싸우기에도 만만치 않고, 그렇다고 다 양보하기에도 너무 아쉽고 자존심 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삭처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찾아야 합니다. 이삭이 했을 때는 계속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또 우물을 파면 또 다투어서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고 지었습니다. ‘에섹’은 ‘다투었다.’는 뜻입니다. 또 우물을 파면 또 다투어서 ‘싯나’라고 했습니다. ‘싯나’는 ‘대적하다.’란 뜻입니다. 이삭은 안 싸우려고 했는데 그랄 목자들이 시비를 걸어오니 안 싸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싸우고, 또 대적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힘과 내 방법으로 살아가는 인생 속에는 늘 다툼이 있고, 대적하는 세력이 있어 쉴 수 없는 인생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다 싸우려고 해서 우리는 피곤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양보하려니 자존심이 상했던 것입니다.
3.이삭은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이삭처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찾아야 합니다. 이삭이 양보하고 또 양보하여 이제 더 이상 한계를 느낄 때 하나님께서 이삭의 생애에서 다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지었습니다. ‘르호봇’은 ‘장소가 넓다.’는 뜻입니다. 드디어 이삭의 생애 속에 다툼은 멈추고, 그의 삶의 영역이 넓혀지게 되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르호봇 처럼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르호봇은 ‘번성의 축복’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번성하기를 원합니다. 사업이 번성하고, 가문이 번성하고, 경제가 번성하고, 교회가 번성하고, 믿음이 번성하기를 원합니다. 본문에서 이삭이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르호봇의 축복은 어떤 번성이겠습니까?
언약에 기초한 번성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번성은 결코 우연한 번성이 아닙니다. 이삭이 받은 번성, 야곱이 받은 번성, 요셉이 받은 번성, 욥이 받은 번성, 모두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삭에게는 창 26:3-4 에서 하나님이 번성을 언약하셨고, 야곱에게는 창 28:13-15에서 번성을 약속하셨고, 요셉에게는 창 37:7과 37:9에서 언약하셨습니다. 아담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노아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아브라함에게는 ‘강대한 나라가 될 것이라’,‘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번성입니다. 창 26:14-21에서는 이삭이 번성하니까 블레셋이 시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랄 목자들이 또 시기하여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었습니다. 출 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땅에서 엄청나게 번성을 하니까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머지 않아 이스라엘이 애굽보다 수가 많아져 다른 나라와 합세하여 애굽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왕은 히브리 민족을 박해하는 갖가지 억압정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황속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번성케 하셔서 약속하신 가나안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원수 마귀들이 여러 권세자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 뜨릴려고 수 없이 도전해 왔지만, 결코 무너 뜨릴 수 없었으며, 오히려 더 왕성하고 번성하여 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번성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주시는 번성입니다. 찬송가 384장 1절에 보면‘믿음으로 사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번성의 축복을 주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살 때에 창성의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복종했을 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창했습니다. 이삭이 시기하는 불레셋이나 그랄족들과 싸우지 않고 믿음으로 문제를 풀었을 때, 요셉이 정직하고 순결하게 믿음으로 살았을 때, 번성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도가 믿음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타락의 길을 갈 때에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의 앞길에는 큰 역사가 있고, 승리가 있으며, 반드시 번성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르호봇은 넓다는 뜻과 번성한다는 의미입니다. 양보하면 넓어지고 번성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게 하십니다. 블레셋이 이유 없이 빼앗는 추태를 부려도 이삭은 성품과 신앙에 따라 끝까지 양보하였습니다. 그런데 백 배의 농사 축복을 받아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26:12-13). 블레셋 사람들의 훼방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하며 양보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축복을 받았고 최후 승리와 최후 번영을 체험하고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손해보면 하나님이 100배로 번성하게 하시고 거부로 축복하십니다. 이런 르호봇의 번성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4.이삭은 화평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어느 날 이삭에게 누군가가 찾아왔습니다. 이삭은 누군가 나가 보았더니 어디서 많이 본 사람입니다. 얼마 전 이삭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을 보고 이삭을 내쫓았던 그랄 왕 아비멜렉입니다. 친구와 군대장관까지 데리고 이삭을 찾아왔습니다. 또 시비를 걸려고 온 것인가 이삭이 화들짝 놀랍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비멜렉이 매우 겸손한 태도로 이삭을 만납니다.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화친조약을 맺자고 제안을 합니다.
창26:28절‘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이삭이 자기의 땅에서 번영하는 것을 관찰하여 본 아비멜렉은 그의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고 자진하여 그랄에서 찾아와 이삭과 동맹을 맺게 됩니다. 아비멜렉 왕과 친구 아흣삿과 군대장관 비골이 나그네 이삭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랄의 실세들입니다. 이삭은 동맹을 맺기전에 일단 과거의 잘못을 따집니다. 그랄인이 부당하게 이삭을 박해하여 이삭이 어렵게 땅을 파서 샘이 나는 우물을 만들었을 때에 우물을 빼앗을때 모든 악행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나아가 그들과 동조하여 이삭을 미워하여 그랄에서 떠나게 한 것입니다. 이삭이 이러한 부당한 박해와 손해를 당하고 추방을 당했으나 계속하여 번영하는 것을 본 아비멜렉은 그것은 여호와의 신이 내리신 복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이제 이삭에게 와서 화평의 동맹을 맺고자 한 것입니다.
말꼬리 잡지 말고, 트집 잡지 말고, 말꼬리 잡다 보면 말끝은 끝이 없고, 트집을 잡다 보면 말끝마다 트집이 있고, 말 한 마디에 엄청 싸우게 됩니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웃과 친구 사이와 부부 사이도 함부로 생각 없이 말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말 조심하려고 항상 결심을 해보지만 세 치의 혀가 생각보다 먼저 덥석 말을 해버리니 여과도 되지 않는 말이 입 밖으로 나가버리니 입이 화근이 됩니다. 이 혀가 말하기 전에 머리를 거쳐 생각을 해본다면 실수되는 말은 없을 것인데 이익도 없는 일에 혀가 신이 나서 속상한 언쟁만 합니다. 이놈의 말을 혀가 입 밖으로 내보내니 입은 모든 화를 불러들이는 문이 되어버립니다. 하고 싶은 말도 1초의 여유를 가지고 머릿속에 거친다면 말조심 필터가 걸러내면 실수를 줄이게 됩니다. 머릿속 필터는 말조심하려 했는데 모든 화의 근원은 입이라 했거늘 입 때문에 항상 미안해 사과를 하니 입조심 해야 합니다(시141:3).
분쟁은 분쟁을 낳고 원수는 원수를 낳습니다. 오직 온유만이 분쟁과 싸움을 그치고 원수를 친구로 만들고 불화를 화평으로 만듭니다. 화평이 없는 나라와 사회와 가정과 교회와 사람은 불행합니다. 불화를 화평으로 만드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마5:9). 양보하고 온유한 이삭이 거부가 되고 범사가 잘 될 때에 그랄 왕 아비멜렉도 두려워하여 이삭을 찾아와 화평의 언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양보와 온유는 르호봇입니다. 양보하는 르호봇은 능력이 있어 화평의 언약을 맺게 합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도 이삭에게 찾아와서 화평의 언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 불화의 싸움의 시대에 화평의 르호봇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르호봇’의 삶이 마련되기 바랍니다. ‘르호봇’은 장소가 넓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장소가 넓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삭은 그랄에 거주하다가 브엘세바로 또 이주합니다. 어차피 이삭의 삶의 영토는 떠돌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삭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더 분명해진 것입니다. 브엘세바라는 장소는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거주하였던 곳입니다. 그리고 브엘세바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 본토입니다. 르호봇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장소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아무리 넓은 땅에서 살아도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면 그 땅은 르호봇이 될 수 없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이 그 동안 주어진 삶에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오셨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아오셨듯이 앞으로도 꼭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삶의 현장마다 르호봇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감동의 축복입니다. 본문29절‘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삭은 아비멜렉의 더 이상의 부당성을 따지지 아니하고 그의 제안에 동의하여 동맹을 맺기로 하고 계약의 식사연을 베풀었습니다. 이삭과 아비멜렉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하였고 아비멜렉은 그랄로 돌아갔습니다. 아비멜렉이 떠나자 마자 이삭의 종들은 와서 우물을 판 작업이 성공하여 물을 얻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 순종한 이삭은 복을 받고 또 받아 거부가 되었고 더욱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감동적인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감동이 넘치며 감동을 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원수에게 온유로 대할 때 인정과 감동의 사람이 됩니다. 화에는 화를 내고 혈기에는 혈기를 내면 다를 바가 없고 감동이 없습니다. 화와 혈기와 싸움에 온유로 대할 때에 감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복받은 자여’라는 감동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가족이나 성도에게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와 다른 사람이나 원수에게도 하나님의 복받은 사람이라는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람이 없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이 세대에 우리 모두가 감동을 주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감동의 르호봇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우리는 에섹이나 싯나에 머무르지 말고 계속 양보하여 르호봇에 이르러야 합니다. 르호봇에 이르기까지는 에섹을 거쳐 싯나를 거쳤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르호봇이 되지 않았습니다. 양보하고 또 양보해서 넓은 그리고 다툼이 없는 르호봇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투지 아니하고 바보처럼 양보하고 또 양보하면 르호봇의 사람과 가정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다투는 것보다 양보하는 것이 지혜이고 결국은 승리입니다. 끝까지 에섹과 싯나에 머무르면 결코 르호봇에 이르지 못하고 모든 것이 끝나고 죽게 됩니다. 끝까지 양보하는 이삭에게 싸움과 대적은 끝나고 전쟁과 다툼이 없는 평화와 넓은 지역이 되었습니다. 무저항 주의의 승리이며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고 풍성한 화평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마5:5,시37:11). 땅을 차지하는 것은 최후의 축복이며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과 영원한 천국의 땅입니다.
이삭처럼 온유하게 살아 번성과 화평과 감동의 복을 누리며 나누는 이 시대의 르호봇 상주감리교회 이삭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르호봇인 우리 성도님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에섹(다툼)이라는 피곤함이 사라지기 바랍니다. 우리 삶에 다툼, 갈등만 사라져도 얼마나 평안할까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르호봇인 우리 성도님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싯나(대적)들이 감히 방해하지 못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르호봇인 우리 성도님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존심도 상하고, 속도 상하고, 억울하기도 한 일들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의 가정과 삶에 르호봇, 하나님께서 그 장막을 넓고 안전하게 하시는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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