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비열전 9-2
제9대 성종(이혈)의 여자들
제헌왕후 폐비 윤씨!
성종실록 144권(1482.8.16)에 나와있다.
"과인을 경멸하여 노예와 같이 대우하며,
심지어는 발자취까지 없애겠다고 말하였으나,
이러한 것은 다만
자질구레한 일들이므로 더 말할 것도 없다."
참 대책없이 포악하고 흉악하며 심지어
왕인 성종을 노예같이 대우했다고 한다.
이러니 어떠하겠는가?
당신이 남편 입장이면?
정내미가 늦가을 홍시가 높은 곳에서
바닥에 떨어지듯이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윤씨, 폐위 되어 어머니 신씨 집으로 갔다.
폐위되었으니 근신하고 있으라고 했다.
성종, 아무리 후궁들이 많아도
가끔은 본처 생각이 나는 법이다.
안중경을 시켜 폐비 윤씨가 잘 근신하고
있는지를 파악해서 보고하라고 했다.
그래도 한 때 정을 주고 받았고 세자 생모이니
폐비 윤씨 복위를 심각하게 고려해 본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설이 있다.
폐비 윤씨가 잘 근신을 하면서
성은이 내려지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설과,
독기를 품고 있었다는 설...
인수대비는 이 사실을 알고 안중경에 윤씨가
반성의 빛이 없다고 성종에게 보고하라고 한다.
안중경, 당시는 왕을 대신하여
정희 대왕대비와 인수대비가 수렴청정하는
시기인데 어찌 대비 말씀을 거역하겠는가?
허위보고를 했다.
독기를 품고 있다고...
게다가 인수대비 한 술 더 뜨신다.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폐비 복귀는 어림 턱도 없다.
감히 누구 맘대로 폐비를 복위시켜..."
한번 눈 밖에 나면 피도 눈물도 없다..ㅠㅠ
드디어 폐비 윤씨에게 사약이 내려진다.
1482년 8월 16일!
이세좌와 이극균이 폐비 윤씨 집에 도착한다.
오매불망 임금의 부름을 기다리는 윤씨!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이게 아닌데..."
저승사자, 두 사신이 전서를 읽고
윤씨에게 사발을 내민다. 완샷하라고..
윤씨, 약사발을 먹고 피를 흘린다.
금삼의 소매에...
죽기 전에 엄니 신씨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오마니, 이 피묻은 소매를 잘 간수했다가..
원자에게 원통한 이 사연을 꼭 전해 주세요~."
그리고 숨을 거둔다. 참 무섭다~~~.. ㅠㅠ
여자가 오뉴월이 아니라
팔월에 죽어도 서리가 내리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된서리는 아들 연산군에 의해서
피에 젖은 칼이 된다. 금삼의 피로...
긍게 왜 그렇게 질투를~?
시대정신을 잘 따랐어야지..
세번째 부인 정현왕후 윤씨!
파평 윤씨다.
성종 4년(1473년)에 후궁으로 들어왔다가
성종 10년(1479년) 12월
폐비 윤씨 후임으로 왕비가 된다.
같은 파평 윤씨인 정희 왕대비마마 낙점으로
원래 성종의 어마마마인 인수대비는
정소영 후궁을 왕비로 추천했으나
정희대비는 폐비 윤씨에 반대한 사람들을 고려
중도파인 19살 정현왕후를 선택한 것이다.
같은 윤씨라고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것을 숨기면서 말이다.
"그럼 어디 팔이 밖으로 굽을 수 있나?"
당연히 안으로 굽지..^^
정현왕후 윤씨!
절대 질투하면 아니 된다는 똑똑히 보았다.
그래서 질투를 버렸다.
死則生 生則死(사즉생 생즉사)...
죽기를 마음 먹으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질투 안 하기로 굳게 다짐한다.
우리가 지금 태극기에 맹세하듯이...
그래서 어찌 되었은가?
자식인 진성대군이 반정으로 왕이 된다.
중종으로...
자고로 참으면 복이 온다고 했다.
그러니 참자.
그리고 또 참자!
오늘의 교훈이다 !!
성종, 왜 부인을 많이 두어서
많은 시 편집자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
원망스럽다.
그래도 성종의 업적은 알고 가자.
세조가 없앴던 경연제도 부활과
홍문관 설치(학문 자문기구)..
유향소 부활(지방의회),
사림 등용과 악학궤범 편찬..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 완성..
태조가 좋은 집터를 마련하고
태종이 자갈 골라내고
세종이 집 짓고
성종이 집 사용설명서를 완성한 것이다.
성종, 주야로 참 분주하셨던 왕이었다.
내일 또 계속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