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다른 체험
*여탕에 들다
영선탕에서 일한지 1년 후 구정 이틀 전쯤에, 밀려드는 손님으로 탕안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빌 때에, 나는 매우 특별한 부탁을 받았다.
여자목욕탕에 들어가서 욕조의 물을 모두 빼내고 새물로 채우라는 것이다.
한 어린이가 북새통의 탕안에 그만 대변을 본 것이다.
난감한 부탁이었지만 그 일을 해낼 수있는 남자직원들 중에는 내가 가장
나이가 어렸기때문에 나설 수 밖에없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알 것도 아는
16살인 나는 용기를 내어서 여탕으로 들어갔었다.
그런데 비록 어리긴 하지만 내가 남자이므로 모두 부끄러워서 피할 줄로
알았는데 그러질 않았다. 북새통이라 경황은 없겠지만 남자인 나를 전혀
개의치않아서, 나는 맨 몸인 여자손님들과 살을 부딪치며 탕안으로 진입
했었고, 탕바닥의 배수벨브를 열고서 더러워진 물을 모두다 빼낼 때까지,
벌거벗은 여자손님들에 싸여 선 체 도리어 어디다다 눈길을 두어야 할지
난감해 했었다.
그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다른 직원들은 호기심을 갖고 나에게 느낌을
물었지만, 군중심리 탓인지 전혀 부끄러워하지않던 여자손님들의 심리에
대해서 나는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때 그 경험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매우 특별한 나만의 경험이었다.
*정이 많던 여직원
그 곳에서 일을 할 때 많은 직원들이 들고나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여직원이있다. 나보다 한살 위이던 그 녀는 시골에서 왔었고
얼굴이 무척 예뻤으며, 나를 무척이나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곱상한 얼굴로 열심히 일하며 주인의 신뢰를 (간혹 카운터에서 입탕료를
받음)받으면서 야간학교에 나가서 공부하는 것을 무척 부러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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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가 많이 외로웠던지 교대로 먹던 식사시간에는, 꼭 나와 시간을
맞춰 식사를 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고, 식사 할 때면 일부러 밥을 떠서
나에게 먹여주곤 했었다. 그러나 지나친 그녀의 관심를 멀리하려고 내가
마음 먹었을 때에 그녀는 그 곳을 떠나고말았다.
그런지 2달 후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그녀는 부산시내 한 요식업체서
일을 해서 번 돈으로 많은 먹거리를 사와서 직원들과 나눠먹으면서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그 날 밤 다른직원들과 함께 그녀와 많은 정담을 나눴다.
그러나 그 후 내가 그곳을 떠났던 탓에 더 이상 만나지 못했지만 외롭던
나에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주던 그녀를 지금도 고마위한다.
*자전거 운송
3학년이 되자 새로운 일거리 하나가 더 생겼다. 옆 건물 공장에서 생산한
알미늄 가구손잡이를 거래처에 실어다주는 일이 추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큰 자전거에다 무거운 짐을 싣고서 영도다리를 건너 초량역 부근의
배송업체까지 운반을 했고 그 일은 나에게 무척 힘에 부쳤다.
어느 날은 짐을 실어다 주고 돌아오던 길에, 타고 있었던 자전거핸들의
연결철사가 부러진 것을 모른체 영도다리 경사길을 오르다가 자전거와
함께 도로위로 넘어지면서 막 출발하려던 시내버쓰 뒷 바퀴에 치일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 못치룬 시험들
야간 중학을 다닐 때 직장에서 일과중에 학교에 다닐 수 있음은 나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그래서 더 부지런히 일을했고 공부도 더 열심히 했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허락해준 것만도 너무 고맙게
생각했었기 때문에, 등록금을 내야 할 때에 차마 등록금을 달라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여러번 중간시험과 학기말 시험을 치루지 못했다.
그래서 제대로 내실력을 평가받을 기회가 없었으나, 간혹 선생님 허락을
받아 치룬 시험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받곤했다. 그러나 그때 야간학교는
오후 5시에 시작해서 저녁10시가 되면 끝나는 짧은 수업시간 때문에 미술,
음악, 체육 등의 예체능과목의 시간이 거의 없었고 수학과목 진도는 정규
학교에 비해서 많이 뛰떨어졌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50
귀한 분과 만남
그 때 목욕탕집(이하 부산집)에는 서울에서 젊고 잘 생긴, 동향인 전라도
사투리를 쓰시던 가정교사 한 분이 오셨다. 그 당시에 나는 영어교과서
한권으로 영어를 배우며 혼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이 없던 때었다.
그래서 어느날은 나는 용기를 내어 그분께 도움을 청했더니 쾌히 “틈이
나면 언제든 좋으니 찿아 오시오.”라고 흔쾌히 대답을 했었다. 그 후부터
나는 그분으로 부터서 여러차례 따뜻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지
얼마 후 어느 날은 심부름을 다녀와서 보니 그분이 떠나고 없었다.
그 분은 가정사정으로 동국대를 휴학하고는 독일광부를 지원한 후에 잠깐
틈이 나는 동안에 가정교사로 오셨던 것이었다. 그 고마운 분을 결코 잊을
수가 없어서 나는 오랫 동안 마음속에 담고서 그분을 그리워했었다.
(그런지 20년 후 인 1985년에 나는 새로 샀던 전공도서의 지은이를 찿아
수소문을 한 끝에 그분을 반갑게 만났다. 고려대학교 공대 건축과 양동양
교수실에서……
고마웠었던 그 분은 광부생활을 마치고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한국에 다시 돌아와 후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신문배달 보조원
그렇게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면서3학년을 거의 마친 12월에 나는 2년
반 동안 열심히 일을 했었던 영선탕을 떠났다. 그리고 그 후 1달정도 짧은
기간에 나는 야간학교수업이 시작되기 2시간 전에는 석간신문 국제신보
배달보조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그 일은 별로 재정적 도움이 되지않았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만 더욱 키우고 말았다. 51
신문을 돌리면서 저녁밥을 먹으려고 둘러앉아 있던 가족들의 모습을 본
탓이었고 그 때 나는 그들이 그토록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고향에 돌아가서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자서 식사하고 싶은 소망을 갖게
되었고 가족의 소중함을 뼈가 저리도록 깊이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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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때 이윤덕 선생님을 모시고 급우 박찬실과
잘못 보낸 입학원서
1964년 겨울에 내가 야간학교를 다닐수 있게 배려를 해 준 영선목욕탕을
떠나야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겨울철은 대중목욕탕이 바쁜 철이라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할 수가 없던 탓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잘
알아보지 않고 서울에 있는 명문고인 경동고등학교에 성급히 입학원서를
제출 한 까닭이었고 그렇게 된 사연이 있었다.
그러기 반년 전인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어느 날, 나는 그 당시에 부산으로
유학을 와서 대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여수중학교 때 같은 반원이었던
박재식이란 친구를 일터인 목욕탕에서 만났다.
그런데 손님으로 온 그 친구를 통해서, 여수중학교 2학년초에 급우였던
임정웅형( 6.25 전쟁으로 나이가 2살 차이였음)이,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방학을 맞아서 고향 여수에 내려올 때면, 만나는 친구들 마다
붙잡고서 나에 대한 소식을 애써 찿고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52
반가운소리를 들은 나는 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친구에게 내주소를 주면서
전해주길 부탁했었다. 그래서 나는 정웅형과 편지연락을 했었고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길 바라고 있었던 나에게 그 형은 경동고등학교의
입학원서를 사서 보내 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별다른 걱정을 않고서 그냥
서둘러서 경동고등학교에 입학원서를 우편으로 보내어 접수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 후 때마침, 부산경남고를 졸업한 후에 서울에서 연세대학교를
다니다가 겨울방학을 맞아서 내려 온 이웃집 형을 만났엇다. 그래서 나는
그 형께 서울 경동고등학교에 관해 물어 보았다. 그런데 그 때 그 형으로
부터 나는 정말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소리를 듣게되었다.
“야야! 니 경동고등학교에 입학을 할라카면 이곳 부산에 있는 경남고나
부산고에 합격 할 만한 실력이 되야한데이”그 소리에 나는 정신이 바짝
들었고 절망에 빠져서 허탈해졌다. 그렇게 되자 나는 진지하게 학교의
수준을 제대로 알아보지않고 성급하게 입학원서를 써서 보내버린 나의
경솔함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안타까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