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더 G. 웰번"(Arthur Garner,Welbon, 吳越番.1866.8.4-1928.4.5)
"아더 G. 웰번"은 1866년 미국 미시간에서 출생하여 1897년 마가레타(Macalester)대학을 졸업했다.
1900년 "샌 안젤모"(San Anselmo)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1900년 10월 17일 내한했다.
1901년 9월 대구 간호 선교사 "새디"(Sarah Harvey)와 서울에서 결혼하였으며,
1909년까지 서울 선교부 소속으로 활동했다.
그는 제1회 독노회(1907. 9. 17)때에 전도 위원으로 참여하고
제3회 독노회(1909.9.3)에는 경기노회 총대로 참가했다.
선교 구역의 분할로 원주가 감리교 구역으로 편입되고 안동에 새로운 선교부가 개설되어
1909년 2월 "플래처"(Archibald Gray Fletcher : 鷲義湫, 성소병원 설립자)와 안동 선교부로 전임 되면서
선임 선교사로 안동의 선교 기지(基地)와 가옥을 매입했다.
1909년 8월 안동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고, 10월 "소오텔"(Chase C Sawtell,史佑大)선교사와 안동 주변지역 전도여행을 계속했다
안동 선교부 책임자로 "안동군 부내면 옥리동"에 거주하며 안동 지역 교회의 공동관리,
한국어 연구 감독, 보조 교역자(助師)와 성서 판매원 감독 업무 등을 수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과묵한 성격에 안면이 검은 수염으로 뒤덮혀 야성적인 인상을 주었고,
교인들과 인간적인 접촉은 별로 없었으나 "금곡동"에 우물을 파주어 주민들의 식수(食水) 해결을 해 주었다.
안동 교회 동사목사(同使牧師)로서 초대 당회장을 역임하였고 지곡, 내매 교회에서도 사역했으며,
1921년에는 안동지역이 7천여명 교인으로 늘어나 130여 교회로 확장되어
경안노회가 분립되었을 때 임원으로 참여하여 노회발전에 기여하였다.
1917년 평양으로 전임되어 1919까지 순회 전도와 계몽 교육에 힘쓰다가
부인 "새디"의 건강 악화로 가족들과 미국에 일시 귀국했다가1922년
다시 돌아와 안동지역 선교 사업을 계속하다가 1928년 4월 6일 61세로 소천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대구 최초의 간호 선교사 "새디 웰번"(Mrs. Welbon, Sadie. 일명: Sarah)
미 북 장로회 간호선교사로 1899.9.22에 내한하였다.
대구에서 최초 독신 간호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01년 9월 "아더 G. 웰번"(Welbon)목사와 결혼했다.
그 후 서울로 전임되어 여성 성경반을 지도하며 순회 선교를 했다.
남편 "웰번"이 안동에 부임 한 뒤에는 1910년 6월 합류하여,
젊은 여성층과 노년층으로 2개의 성경반을 조직 운영하고
많은 새 신자들이 성경반을 통하여 교회에 나오도록 했다.
1914년 5월에는 안동 지역을 15일간 6백여리(150마일)를 걸어서 전도하며
12개 교회를 순방하고 400여명을 전도한 기록이 있다.
건강이 악화되어 1919년 미국으로 돌아가 1925.7.20일
"테네시州"(Tennessee)의 "메리빌"(Maryville)에서 53세로 사망하였다.
"아더 G. 웰번"(Welbon, Arthur Garner)선교사와 두 자녀의 묘.
가운데의 "아더 G. 웰번"(Welbon, Arthur Garner)의 墓標.
"웰번"의 장남 "토마스"(Thomas Harvey.Welbon)의 墓標.
"웰번"의 딸 "엘리스"(Alice. Welbon)의 墓標.
한편 차남 "헨리"(Henry G. Welbon)는 1904년 출생하여 1919년까지 평양 외국인학교와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뒤 목사가 되었다.
1932년 "도로시 클린"(Dorothy Klein)과 결혼하였으며,
한국에서 미 군정청 통역관으로 봉직(1946-1947)하였다.
"바바라"(Barbara B.)는 1962년 한국에 돌아와 영어교사로 봉직하고,
"매리"(Mary F.)는 미국 아이오와(Davenport)에서 여배우로 활동했다.
"찰스"(Charles P.)는 L.A.에서 미국 우편사업에 종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