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뎐의📌 짧은 생각(19)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비가 주룩주룩
내립니다.
앞유리에 빗물이 자꾸 흘러서
시야를 가립니다.
그래서 와이퍼를 켭니다.
쓱-싹-쓱-싹,
와이퍼가 작동합니다.
빗물을 쫙쫙 밀어냅니다.
덕분에 전방이 잘 보입니다.
<진흙에서 연꽃이 올라오는 이유가 있다.
진흙과 연꽃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공부도
이런 풍경과 비슷합니다.
명상을 하려고,
참선을 하려고 앉았는데
자꾸만 잡념이
올라옵니다.
1분, 2분, 3분만 지나도
이런저런 잡념이 떠올라서
집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스님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명상할 때의 잡념은
빗속을 운전할 때
작동하는 와이퍼와 같다.
왔다 갔다 하는
와이퍼에 집중하면
전방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와이퍼를 잊어 버려라.
그리고
전방에만 집중하라.
그럼 잡념이 올라와도
상관하지 않고
명상에 집중할 수 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잡념을 접어두고
명상에 집중할 수 있는
나름의 방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는
우리 눈의 들보를
완전히 빼내지는 못합니다.
왜냐고요?
내가 아무리 전방에만 집중해도
와이퍼는 뒤에 계속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실은
내가 와이퍼를 잊으려고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잠시만 집중력을 놓쳐도
와이퍼는 다시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니
이런 방식은
본질적인 해법은 아닙니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요.
명상이나 참선,
그리고 묵상에서
잡념의 문제,
와이퍼의 문제,
들보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와이퍼를 제쳐 두고
전방만 봐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와이퍼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할 때,
비로소
본질적 해법이 나옵니다.
그럼
와이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잡념(雜念)은
앞에 잡(雜)자가 붙기 전에는
그저 념(念)일 뿐이었습니다.
그냥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잡(雜)자가 붙으면서
잡념이 됐습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성가시게 만드는
잡념이 됐습니다.
이 잡념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떡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잡념의 정체를
뚫으면 됩니다.
다시 말해
‘잡념’에서 잡(雜)자를
떼버리면 됩니다.
그럼
생각(念)만 남습니다.
생각은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잡생각이
나를 괴롭힐 뿐입니다.
그때 깨닫게 됩니다.
아,
잡념도 염일 뿐이구나.
잡생각도 생각일 뿐이구나.
굳이 비유하자면
명상이나 묵상의 깨달음은
이런 식입니다.
자동차 앞유리를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와이퍼도 마찬가지입니다.
와이퍼의 정체를
뚫어야 합니다.
<잡생각이 그저 생각일 뿐임을 깨치면,
모든 생각에서 꽃이 핍니다.
비어 있음의 꽃이.>
그런 뒤에는
어떻게 되냐고요?
평안해집니다.
아무리 잡념이 올라와도,
아무리 와이퍼가
쓱싹쓱싹 움직여도
평안해집니다.
잡생각이
그저
생각일 뿐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서
들보를 빼는 방식도
이와 통합니다.
내 눈에 박힌
들보 하나를 빼내어도
들보는 다시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본질적 해법은
들보의 정체를
깨닫는 일입니다.
들보를 뚫어서,
들보를 통해
신의 속성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문제 속에 답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문제가 바로 답입니다.
“번뇌가 보리(菩提·깨달음의 지혜)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출처:중앙일보]
⑲ 숟가락은 왜 국 맛을 모를까
목회자들조차 설교할 때
‘자기 십자가’를 말하면
성도들이 부담스러워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는 왜 굳이 십자가라는 부담을 주려 했을까.
거기에는 깊은 이유가 있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통과할 때
들보가 부서지기 때문이다.
내 눈의 들보 말이다.
나는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몸소 걸어갔다는 예루살렘 성안
시장통의 계단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십자가’를 꺼린다.
‘십자가=고통’이라고 생각한다.
안에서 물음이 올라왔다.
‘자기 십자가는 정말 고통일까?’
우리 삶의 본질적 평화는
늘 자기 십자가를 통과할 때 만난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과연 고통일까. 백성호 기자
아름다운 시구로 가득한 불교 경전
법구경(法句經)』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평생 동안
어진 사람을 가까이 모셔도
진리를 알지 못한다
숟가락이 국 맛을 모르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잠깐 동안
어진 이를 가까이 모셔도
재빨리 진리를 이해한다
혀가 국 맛을 알듯이.”
그럼
‘들보가 눈에 박힌 사람’은 숟가락일까 아니면 혀일까.
그렇다. 숟가락이다.
국 맛을 모르는 딱딱한 숟가락이다.
숟가락은 아무리 찍어 먹어도 맛을 모른다.
‘예수의 맛’을 모른다.
성경의 맛, 영성의 맛을 모른다.
눈에 박힌 들보로 인해 ‘영성의 미각’이 마비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다.
딱딱한 숟가락이 자신을 무너뜨리게끔 말이다.
그래서 유연하고 피가 도는 혀가 되라고 말이다.
국 맛을 아는 혀, 예수의 맛을 아는 혀 말이다.
나는 다시 묻고 싶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는 고통일까, 아닐까?”
그 역시 아니다.
그럼 무엇일까.
딱딱한 우리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문(門)이다.
국 맛을 모르는 숟가락에게 국 맛을 아는 혀가 되게 하는 문(門)이다.
그러니 ‘자기 십자가=고통’이라는 등식은 틀렸다.
그것은 십자가의 정체를 모르는 이들이 꾸며낸 착각의 등식이다.
성경에는 ‘숟가락과 혀’에 대한 일화가 있다.
예수의 제자 필립보(빌립)가 졸랐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하느님)를 뵙게 해주십시오.”
필립보는 왜 졸랐을까.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하느님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예수를 졸랐다.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런 제자를 향해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요한복음서 14장 9~10절)
필립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서 있는 예수를 보고 또 봐도 예수만 보일 뿐이었다.
그 안에 깃든 하느님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의 눈에 들보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눈은 다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훤히 본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예수의 눈에는 들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나는 예수의 지적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루카 복음서 6장 42절) 이 구절을 묵상했다.
그러다 ‘뚜렷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그리스어 성경에는 ‘뚜렷이’가 ‘diablepseis’라고 표기되어 있다.
‘뚫어서 보다(Thru+look)’라는 뜻이다.
‘관통해서 보다’라는 의미다.
무엇을 관통해서 무엇을 보는 것일까.
그렇다.
예수를 관통해서 그의 안에 깃든 ‘신의 속성’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뚜렷이’의 깊은 뜻이다.
그러면 이제 ‘자기 십자가’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다.
세상을 뚫어 신의 속성을 보게 하는 눈이다.
그 눈으로 진입하는 통로의 이름이 ‘자기 십자가’다.
예수는 그것을 우리에게 건넸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복음서 14장 27절)고 말한 이유가 명쾌해진다.
그렇다.
‘예수의 눈’을 쫒는 이가 예수의 제자다.
내 눈의 들보를 뽑아내지 않고선 ‘예수의 눈’에 다가설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는 몇 번이나 강조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아니다”라고 말이다.
이슬람 신비주의 영성가 루미가 쓴 「나는 작은데」라는 시가 있다.
넉 줄짜리 짤막한 시다.
이 시는 ‘들보가 빠진 눈’을 노래하고 있다.
그 눈이 얼마나 큰 눈인지 말이다.
나는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작은데
이 큰 사랑이 어떻게 내 몸 안에 있을까?
네 눈을 보아라, 얼마나 작으냐?
그래도 저 큰 하늘을 본다.
―『루미 시초(詩抄)』(이현주 옮김) 중에서
2000년 전 이스라엘에 살았던 예수는 ‘작은 인물’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갈릴래아 촌놈’으로 여겼다.
예수는 그저 나사렛 시골에서 자란 목수의 아들이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볼품없었다.
고기 잡는 어부와 천대받는 세금 징수원 등이 고작이었다.
예수는
수천 년간 내려오는 유대의 율법을 마음대로 어기고,
유대인들이 ‘오랑캐’쯤으로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들과 어울리고,
매춘부나 간음하는 여인 따위를 감싸고 돌았다.
유대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들보가 박힌 눈’으로 보면 그랬다.
‘들보’를 빼면 달리 보인다.
예수의 작은 몸 안에는 ‘큰 사랑’이 들어 있다.
우주를 품는 무한의 사랑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런 무한의 우주, 무한의 하늘을 우리의 작은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예수는 강조했다.
눈에 박힌 들보를 뽑아내라고.
그러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말이다.
루미의 시와 예수의 메시지를 곱씹으며 예루살렘의 시장 골목을 걸었다.
“네 눈을 보아라, 얼마나 작으냐?
그래도 저 큰 하늘을 본다.”
이런 눈을 가질 때 비로소 보인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