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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물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18
주간조선 2012년 12월 17[2236]김용규 철학자·‘철학카페’ 시리즈 저자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신앙인과 공산당원의 광기 다르지 않아, ‘수단을 마치 목적처럼’ 여기는 이데올로기가 우상숭배로 이어진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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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1987년 사망 전, 정의채 신부(서강대 석좌교수)에게 존재 진리에 대한 24가지 궁금증을 물었다. 그는 병세가 급속히 악화돼 정의채 신부로부터 답을 들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지난해 차동엽 신부가 책을 내고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뒤늦은 답을 시도했다. 철학자 김용규씨가 이 회장이 가졌던 의문을 자신의 철학과 인문학으로 풀어낸다. 주간조선은 그의 답을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라는 제목 아래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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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9년 6월 7일 평범한 농민과 민중을 중심으로 형성된 제1차 십자군은 출정 3년여 만에 마침내 최후의 목적지인 예루살렘 성에 도달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간구했다. “우리는 신의 자녀입니다. 신의 뜻을 이루고자 왔사오니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트리게 도와주소서.” 신이 기도를 들어주어서였을까? 7월 15일에 예루살렘성이 함락됐다. 그리고 그때부터 역사에 남을 만큼 잔혹한 살육이 자행됐다. 십자군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학살하고, 강간하고, 방화한 다음, 약탈한 재물을 들고 예수의 무덤으로 달려가 헌물했다. 그리고 기쁨과 감격에 차 통곡하며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자신들의 행위가 반(反)그리스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곧 “신의 뜻이다(Deus Le Volt)”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원정에 동참했던 대수도원장 기베르는 자신의 ‘연대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예루살렘의 큰 거리나 광장 등에는 사람의 머리나 팔, 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 병사나 기사들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성전이나 회랑은 물론이요, 말 탄 기사가 잡은 고삐까지 피로 물들었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모독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더럽혀졌던 이 장소가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찬양할 만하다.” 그렇다! 고 이병철 회장의 말대로 신앙인은 때때로 이렇게 광인처럼 된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당시 러시아 인민들은 전제정치와 농노제도에 혹독하게 시달리고 있었다. 수많은 러시아 감옥에서는 황제의 압제에 저항한 시민들이 죽음을 맞았고 대부분의 러시아 농경지대에서는 봉건영주들의 폭력에 소작인들이 노예처럼 부려지고 인신매매 당했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인간이 천하고 속박되며 버림받고 경멸당하는 존재가 되는 모든 관계를 철폐하기 위한” 혁명, 곧 인민을 위한 혁명이라는 숭고한 목적이 탄생했다. 목적이 서자 합당한 수단들이 곧바로 강구되었고 그 수단들은 어떤 경우에도 목적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그 결과 197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솔제니친이 ‘수용소 군도’에서 적나라하게 고발했듯이, 인민을 위한 혁명에 의해 약 2000만명에 달하는 인민들이 숙청, 박해, 기아 등으로 희생되었다. 그렇다! 이 회장의 표현대로 공산당원들도 때때로 이렇게 미친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가진 광기와 공산당원들이 보이는 광기가 어떻게 다르냐고 이 회장이 물었다. 매서운 눈매와 날선 판단에서 나온 질문이다. 사실상 그 둘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지 않으냐는 비아냥거림도 바닥에 깔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 과연 그런지,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런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매우 유감스럽지만 신앙인과 공산당원이 때때로 보이는 광기는 전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의 이성이 가진 특성이자 질병이기도 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엉뚱한 소리가 아니다. 또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당신도 잘 아는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제부터 살펴보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화형에 도스토옙스키가 1879년에 발표한 마지막 장편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는 ‘대심문관’이라는 짤막한 이야기가 따로 들어있다. 그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가톨릭교회와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작품 속에 끼워 넣은 것인데,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화형에 처하려는 어느 추기경에 대한 이야기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이야기를 통해 그의 대표작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그리고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일관되게 다룬 문제, 곧 이성적 인간이 왜 그리고 어떻게 악마가 되는가 하는 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극화했다. 요약하면 대강 다음과 같다. 종교재판이 극성을 떨던 16세기 스페인 세빌리아였다. 성당 앞 광장에서는 국왕을 비롯해 신하, 기사, 사제들, 궁녀들, 그리고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날마다 여기저기 장작더미가 타올랐다. 대심문관인 추기경의 지휘 아래 이교도로 몰린 사람들이 ‘신의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groriam Dei)’ 죄 없이 불에 타 죽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없이 자비로운 그리스도가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어두운 죄악의 심연에 빠져 있으면서도, 항상 어린애처럼 자기를 사랑해주는 민중 사이에 잠시 나타났다. 그리스도는 연민의 미소를 띠고 말없이 군중 속을 걸어갔다. 사랑의 태양이 그의 가슴속에 타오르고, 신의 영광과 권능의 빛이 그 눈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어릴 때부터 장님이 된 노인의 눈을 뜨게 하고, “탈리타 쿠미(소녀여, 일어나라)!”라는 한마디로 죽은 소녀를 살려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분은 예수님이다. 이분이 바로 예수님이야”라며 탄성과 통곡을 터트리며 그의 발이 닿은 땅에 입을 맞추었고, 아이들은 그의 발 앞에 꽃잎을 던지고 노래를 부르며 “호산나”를 외쳤다. 그때 나이가 구십쯤 된 노인 하나가 멀리서 이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대심문관이다. 그는 손가락을 뻗어 호위병들에게 저 남자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순간 광장에는 죽음과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고, 호위병들은 서둘러 그리스도를 끌고 갔다. 밤이 되자 그리스도가 갇힌 감방으로 아무도 몰래 대심문관이 찾아왔다. 그리고 강하게 항의했다. “당신이 정말 예수요? 예수냔 말이오?”라는 말로 시작하는 그의 항변은 대강 이랬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교회를 세우고 구원이라는 사역을 떠맡아왔다. 그리고 일찍이 예수가 광야에서 거부했던 ‘지상의 빵’과 ‘노예의 환희’와 ‘세속적 행복’(마태복음 4:1~11)까지도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구원이 그것들이니까. 그런데 이처럼 숭고한 교회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다. 때문에 그들은 제거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설사 당신이 예수라고 해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니 제발 다시 나타나 방해하지 말아 달라. 그렇다! 세빌리아의 아침, 성당 앞 광장에서 그리스도를 잡아 옥에 가둔 늙은 대심문관의 정신 속에는 분명 이런 갸륵한 생각과 영특한 지혜가 들어있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서는 교회가 있어야 하고 교회를 위해서는 반(反)그리스도적 사역이라도 감행해야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대심문관의 진실이다. 그리고 또 이것이 십자군의 진실이자, 16세기 유럽의 가톨릭이 중남미 각국에서 행한 숱한 학살과 17세기 이후 프로테스탄트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자행한 온갖 만행의 진실이고, 오늘날에도 교회가 끊임없이 반복하는 서글픈 진실이다. 그렇다면 따져보자!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리스도의 사역이라는 목적이? 아니면 교회의 사역이라는 수단이? 아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서라면 교회의 어떠한 사역도 허용된다는 바로 이것이 악마적 영혼들이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무슨 소리냐고?
이데올로기의 구조적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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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이란 본디 목적에 의해 제한될 때에만, 그럼으로써 목적에 합당할 때에만 정당한 법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수장이었던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도구적 이성’에서 사용한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수단의 정당성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절차적 방법의 적합성”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런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면-마치 늙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막내둥이처럼-그 정당성을 등에 업고 수단이 목적에서 벗어난다. 그 이유는 막내둥이가 철이 없듯이 수단은 ‘체계적 적합성’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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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종교재판의 마녀 화형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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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에 의해 목적이 마치 막내둥이의 말에 놀아나는 늙은 부모처럼 왜곡된다. 그럼으로써 막내둥이에 눈이 먼 늙은 부모와 버릇없는 막내둥이 사이와 같이 목적과 수단 사이에 순환적 폐쇄성이 완성된다. 이것이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이데올로기의 구조적 특성이다.
모든 개념의 정의가 그렇지만 사회과학 전 영역에서 가장 난해한 개념으로 꼽히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가 도달하려는 목표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구조적 특성인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목적과 수단 사이에 존재하는 ‘순환적 폐쇄성’이다. 이념을 뜻하는 이데아(idea)와 논리 또는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logos)의 합성어인 이데올로기(ideology)를 문자가 지시하는 대로 ‘이념의 논리’라고 해석한다면, 이때 말하는 논리가 곧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수단이 목적을 왜곡하는 폐쇄적 순환구조’다. 이 말은 비단 정치적 이념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이념들이 이 같은 폐쇄적 순환구조를 가질 때에는 언제든지 이데올로기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념이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는 아니지만 모든 이념은 이데올로기로 변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형식의 문제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율법주의 이데올로기, 과학주의 이데올로기, 소비주의 이데올로기 등과 같이 각종 정치·경제·사회·종교·문화 이념들의 뒤에 이데올로기라는 용어가 붙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일상적 삶 안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정치학’에서 든 예를 빌려서 설명하자면 이렇다. 돈벌이란 원래 가정에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때문에 돈벌이의 정당성은 본래의 목적인 ‘가정의 행복’에 의해 제한받아야 한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돈벌이에 정당성을 부여하면, 마치 돈벌이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벌이를 하게 된다. 그에게는 한도 끝도 없이 재산을 모으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수단에 의해 목적이 왜곡된 것이다. 그러고 나면 결국에는 자신의 건강을 해치거나 가족에게 소홀해져 원래의 목적인 가정의 행복을 깨트리게 된다. 이데올로기와 우상숭배 이데올로기는 이처럼 원래의 이념을 왜곡하고 결국 파괴한다. 수단이 마치 목적인 것처럼 변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을 마치 …처럼’이라는 사고형식, 곧 ‘수단을 마치 목적처럼’ 여기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제임스 밀에 대한 논평’에서 허위의식이 곧바로 우상숭배로 연결된다는 것을 역시 돈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돈이란 원래 상품교환이라는 목적을 위한 매개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노동자가 돈을 위해 자신의 상품인 노동을 팔 때 그에게 돈은 더 이상 단순한 수단이 아니고 목적이 된다. 그러고 나면 돈이 ‘진정한 신’ 또는 ‘보이는 신’이 되고 ‘그것의 숭배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된다. 신이 아닌 것을 마치 신처럼 여기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다. 7~8세기 중세 기독교에 파랑을 일으킨 성화상(Icon) 숭배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성화상이란 본디 참된 예배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교회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화상 숭배를 정당화하자 신도들은 그 수단을 마치 목적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지 마치 신처럼 숭배하게 되었다. 7세기 후반부터 사람들은 교회에서 사용하던 성화상과 장식물들을 가정집 문설주나 식탁 위에, 그리고 심지어는 외양간에까지 붙이기 시작했다. 또한 휴대용으로 제작해 여행을 할 때에도 가지고 다녔다. 그것들이 마치 신처럼 악령을 쫓고 병을 치유하며 예언 능력과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본래의 목적인 참된 예배를 해쳤다. 당신도 이제 눈치챘다시피, 이런 일들은 결코 특이한 것이 아니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데 건강을 해칠 정도로 운동을 하거나, 화초를 위해 물을 주는데 뿌리가 썩을 정도로 물을 주는 경우처럼, 허위의식과 우상숭배는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이 얼마나 이데올로기적인지를 말해주는 예이기도 하다. 어떤 특별한 괴물과 악마들이 11세기 예루살렘에서 신의 이름으로 학살하고 강간하고 방화하고 강탈하고, 16세기 세빌리아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를 화형시키려고 하고, 20세기 러시아에서 인민을 위하여 인민의 학살을 설계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나 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 모두는 적당한 조건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이데올로그(ideologue)가 될 수 있다.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자기비판을 감행해야 그럼 이제 풀어야 할 문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데올로기의 특성인 순환적 폐쇄성, 허위의식, 그리고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모두가 함께 숙고하고 고민해야 할 문제지만, 언제나 문제가 있는 곳에 답도 있는 법이다! 따라서 그 해답은 당연히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 수단이 목적을 왜곡하는 것’을 막는 방법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허위의식과 우상숭배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한 가지 눈여겨볼 만한 해법을 ‘계몽의 변증법’의 공저자이기도 한 호르크하이머가 내놓았다. 그는 ‘도구적 이성 비판’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이데올로기적 사고방식을 ‘도구적 이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성이 자기 스스로를 도구화한다면 이성은 일종의 물질성과 맹목성을 갖게 되고 정신적으로 경험하기보다는 단지 수용할 뿐인 마술적 실재, 즉 물신(物神)이 된다”라며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했다. 가령 어떤 운전자가 오직 교통법규에 따라 운행하기 위하여 무단으로 도로를 횡단하던 어린아이를 치었다고 가정하자. 이때 그 운전자를 이끈 것이 맹목적이 되어 오류를 막는 비판적 기능을 상실한 ‘도구적 이성’이다. 따라서 호르크하이머는 그 운전자가 법정에 섰을 때 재판관이 그에게 ‘이성적으로 운전했는지 여부’를 묻는다면, ‘예’라고 답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재판관은 그가 단지 교통법규대로 운전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운전자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법률을 지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이성은 이처럼 목적은 문제 삼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 채 단지 합당한 수단만을 계산하는 능력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호르크하이머에 의하면, 이렇듯 “주관화되면서 또한 형식화”된 도구적 이성에서 아우슈비츠가 상징하는 현대사회의 광기와 야만성이 비롯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이성은 마땅히 목적과 수단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계산하며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자기비판’을 감행하는 ‘객관적 이성’이어야만 한다. 호르크하이머의 처방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우리가 ‘하려고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목적과 수단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계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있어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자기비판’을 감행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수단이 목적을 왜곡하고 있지 않은가를 살펴야 한다. 그래야만 아직도 숱한 대심문관들이 도사리고 있는 교회와 우리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를 화형시키고, 인민을 위해 인민을 학살하는 광기와 야만성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그래야만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라는 처연한 질문 앞에 다시 서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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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과 튀빙겐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영화관 옆 철학카페’ ‘데칼로그’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철학카페에서 시읽기’를 썼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은 신과 관련된 서양철학과 신학의 진수를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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