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일분
소운/ 한경희
2012년 8월 28일 아침 8시
아주 바쁜날이다
꼭 듣고 싶었던 교수님의 문학 강좌
설렘으로 일주일을 기다렸는데........
이게 뭐람? 이건 아니야,
하루를 혼자 보낼 남편 심심치 않게 간식 만들어 놓고, 평소에는 씽크대에 설거지 감을
잘도 담가 놓건만, 외출 하는 날은 늘 완벽하게 해 놓으려고 두 배는 바쁘다.
이것이 아내의 마음일까?
초스피드로 해 치웠건만 시간이 너무 빡빡하다.
도보로 삼분 거리의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대전역으로 고 고 씽___
아 뿔 사, 계산 착오였다. 출근시간이라서 지연된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구, 서울에서는 이것저것 계산하고 잘도 다니는데 지방이라고 얕봤던 게
화근 이었구나. 아무튼 뛰고 또 뛰어도 일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 조치원행 열차는
플렛홈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등교시간 말고 이렇게 전력질주 했던 일은 처음이니까.......
나 스스로에게 아직 남아있는 열정에 박수 보내며 천안행 열차에 몸을 싣고 천천히
교재를 읽어 내려가며 ' 참 잘 쓰셨구나' 감탄 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강의를 기대 하며
역에서 내려 민 여사를 찾으니 보이지 않는다.
무선 넘어로 들려오는 소리,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열차 이용을 자주 안 하다보니
천안을 건너 뛰고 조치원에 정차하는 차를 탔단다. 적절한 약속을 하고 거금 1,2700원이란
대가를 지불하고 찾아간 동 천안 교회.
어쩜.........
이미 삼십여분 늦게 도착해서 귓볼이 빨개질 만큼 죄송스런 마음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어수선한 강의실 분위기, 아직 시작도 못한 상태....
이곳에 오려고 <볼라벤> 이란 강력한 태풍도 아랑곳 하지 않고 꿈에 부풀어 달려 왔는데,
또 우여곡절 끝에 오는 민 여사한테는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그러나 상념은 잠깐,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모두 잊을 수 있었으며 후회는 없었다.
이곳까지 오던 택시 안에서 비쳐지는 바깥풍경은 옛일을 기억해내기에 충분했다.
2002년이던가, 샌프란시스코 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다섯째 동서가 다니러 왔었는데 눈꺼풀이 내려와 근무하기 불편하다고 수술비도 절약할 겸 자기 남편친구 에게서 수술 받은 일이 있었다.
꼼짝도 안하고 시커먼 안경만 쓰고 있는 동서가 안쓰러워 여행 제의를 했더니,
여섯 동서들 중 넷이 의기 투합했다.
정동진에서 일출을 보고, 모래시계 촬영지 들러 여주인공처럼 한껏 포즈도 취해보고, 유서 깊은 오죽헌에서 조선시대의 유명한 학자인 율곡 이이(1536-1584)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을 만나보고, 낙산사와 경포대에서 비단을 곱게 펼쳐놓은 듯한 호수를 바라보며 시 한 수
읊고, 노래 한곡조 멋드러지게 뽑아보고 맛 집, 멋 집 찾아 등등 일박이일의 멋진 계획을 세웠다.
우린 꿈 많던 학창 시절 수학여행을 회상하면서 여행의 묘미를 만끽하기로 하고 청량리에서
정동진행 야간 열차를 탔다. 일출을 보고나니, 예기치 못했던 빗방울이 흩뿌렸다. 서둘러 택시에 몸을 맡기고 오죽헌으로 경포대로 , 그러나 더이상은 움직일 수 없음을 자각하기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신사임당의 채취가 채 가시기도 전이었으니.......
갑작스런 돌풍과 함께 퍼붓는 비를 무엇으로 표현하랴. 택시 또한 돌풍때문에 멈출 수
없었고 ' 하늘과 바다 사이' 라는 전경 좋은 스카이라운지에서 차 한 잔에 몸을 녹이려 했건만 하늘은 그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세상이라도 다 집어 삼킬 듯 험악한 승량이가 되어가는 날씨 앞에 우린 속수무책........
8층, 가장 전경이 좋은 곳에 자리 잡고 관망 하려는 순간 넷째동서가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아쉬운 마음으로 카운터 쪽으로 걸어오는 그 찰나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도 크고 두껍던 전면 유리창이 통채로 날아가고, 그토록 무겁던 클래식 쇼파가 마치 하늘을 나르는 양탄자처럼 춤을 추며 산 위로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그 자리에서 일어 난지
채 일분도 안되었건만, 화가 난 대 자연의 위력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멍 하니 바라만
볼 뿐 .
주인이나 객이나 모두 정신 줄은 놓을 수 없어서 이런저런 사투 끝에 간신히 일층 로비로 내려오고 보니 투숙객들은 물론 너 나 할 것 없이 물에 퐁당 빠진 생쥐 꼴 이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아이러니 하게도 깔깔대고 웃고 말았다. 일박 이일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그 시간 이후로 공칠까봐 전전 긍긍하는 택시기사, 너무나 황당한 현실에 웃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다섯째 동서 눈두덩이에 염증 생길까봐 모텔의 수건을 약속이나 한 듯 한장씩 들고 감싸주었던 기억, 고속터미널로 돌아오는 도중에도 아름드리 가로수가 뚝 끊어져 도깨비가 빗자루 타고 날아다니듯 이리저리 유희하며 차창밖을 떠도는데 자동차에
와서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영락없이 화살촉이 뚫고 나가듯 관통 할 것만 같아 기사님은 물론
혼연일체가 되어 몸을 굽혔다 세웠다를 반복했던 그 공포스런 기억이 되살아났다.
물론 그에 비하면 오늘은 새발의 피지만____
모래가 종아리를 때리는 세찬 바람이기는 하나 시원한 바람이 좋고, 간간히 흩날려 주는 빗줄기도 싫지 않은 하루였다. 오늘 잘 못 계산한 시간으로 인해 결국 일분의 안타까움과 아쉬움은 있었으나 그로인해 지금은 추억으로 곱게 접어 둔 강릉을 초토화 시켰던 태풍 루사의 기억도 꺼내 보았고, 비슷한 상황의 안타까운 일분과 하마터면 떼거지로 홀아비 만들 뻔 했던 눈물 나게 고마운
일분의 차이를 떠 올리게 했다.
런던 올림픽에서 펜싱의 여왕이 될 수 있었던 잘못된 일초와 오늘의 일분, 기억속에 두고두고 꺼내 보아야 할 지난 시간속의 일분은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은 내 인생의 좌표에 어떤 빗금으로 남아 있을까.
오늘의 일분도 지금보다 더 하얀 머리, 늘어진 피부, 가브락 거리는 눈썰미 속에
어떻게 살아 남을까.........
일분! 그 역시 내인생에서 잊지못할 의미 부여를 또 한 번 해주는구나 .
허.............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