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시편 14편 1-7절
어리석은 자,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시편을 통해 우리가 끊임없이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의인과 악인의 대조입니다. 시편 1편만 보더라도 의인과 관련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들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인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면 악인은 의인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자들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시편 1편 마지막 절에 보면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한다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나 이런 서론의 내용과는 달리 이후 시편의 내용을 보면 의인과 악인의 대조를 말하지만 악인의 경우 의인을 괴롭히며 박해하는 자로 있다면, 의인은 그런 악인 앞에서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둔다는 것이 주된 내용으로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즉 인생의 많은 부분 악인으로 인하여 의인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 의인의 유일한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1편을 통해 처음부터 말씀하신 것처럼 의인의 결국과 악인의 결국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의인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다면, 악인은 그렇지 않은 자로 있을 뿐입니다. 의인의 모든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반면, 악인의 결국은 망하게 되는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의인을 괴롭히는 자들로 있지만 시편 2편을 통해서는 그것이 곧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연장선에 있다는 것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피게 되는 시편 14편은 이런 악인에 대하여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표제를 보면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는데, 다윗은 1절을 통해 악인의 정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먼저 악인은 어떤 자냐? 어리석은 자로서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리석다고 말할 때는 사전적 의미로서 슬기롭지 못하고 둔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지금 성경이 어리석다고 말할 때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롬1:18)에 대하여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세상적인 의미에서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의 탁월함을 나타내 보이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결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적인 의미에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학식이 많고 그 수준이 높은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굉장히 불쾌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 때문에 어리석다고 말한다면 오늘날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도리어 우리더러 어리석은 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혹은 누군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는 식으로 따지고 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매일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가 했을 때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물을 통하여 알리신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따라 그들이 하나님을 찾는가 하면 찾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을 뿐입니다(롬1:21).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롬1:22-23).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란 분을 증명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 마음 가운데 종교의 씨앗이 있고, 종교의 씨앗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모든 나라와 모든 도시, 그리고 어느 가정이라도 종교가 없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방금 언급한 로마서 1장에 있는 표현,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으로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일반계시로서 자신을 드러내셨고 지금도 드러내고 계십니다. 온 천하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타락의 결과일 뿐입니다. 타락의 결과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 것입니다. 아니 멀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 즉 악인의 특징이 무엇인가 했을 때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패하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적 생명력을 상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죽었다, 혹은 썩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에베소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엡2:1). 이처럼 부패했기 때문에 그 행실이 어떠한가? 가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몹시 싫어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고, 혐오스러운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53편, 즉 시편 14편의 거의 동일한 표현을 하고 있는, 아니 본 시편을 그대로 옮겨놓았다고도 할 만한 시편 53편에서는 ‘가증한 악’을 행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다윗은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표현으로 강조하자면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롬3:12).
여러분,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단지 하나님이 없다는 사고로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반드시 가증한 행동을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경우에 가증한 행동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가증한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어리석은 자, 악인의 특징은 선이라고 할 만한 것을 결코 내놓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회 속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선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극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이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선과 일치하느냐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선 율법을 통하여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을 때 그 명령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명령을 통해 뜻하는 모든 면들이 고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단지 외적인 살인, 외적인 간음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도 살펴야 되고, 심지어 하지 말라고 했다면 적극적으로 해야 될 바는 무엇인가도 살펴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하나를 지키지 않으면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어느 하나라도 점과 흠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선이란 바로 이 모든 것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문제는 율법이라는 틀 안에서 사람이 선이라고 할 만한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느냐 하면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는 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내어놓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가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행하는 것을 선이라 말씀하시기 때문에, 분명 선 자체로서는 점과 흠이 있지만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온전하고 완전한 선으로 여겨주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며, 그때 선은 하나님을 부정하고서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선은 일반 사회에서 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선처럼 보이는 것을 내 놓을지라도 그리스도가 없는 이상, 그리고 믿음 안에서 행하지 않는 이상 결코 선이 아니라 악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선이란 무엇인가? 가장 기본적으로는 율법이 명하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금하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온전하게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우리 대신하여 율법을 온전하게 이루신, 그리고 그렇게 이루신 공로를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선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없이는 선을 말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에게서 선을 찾아볼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들의 모든 열매는 가증한 악 외에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 1절과 관련하여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자면 어리석은 자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할 때 ‘그의 마음에’ 말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공공연하게 떠들어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자기들 입으로 발설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가? 열매로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한 것을 열매로 삼을 뿐 결코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라고 할 만한 것을 내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 다시 말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은 그들 역시 열매로서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드러내 보여야 할 당위성을 갖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0-21)는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거룩한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시편 1편에서는 그 말씀을 즐거워하라,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말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악인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로, 그리고 그들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악을 행하는 자로 있다면, 우리는 그들과 같은 생각, 그들과 같은 길, 그들과 같은 자리에 있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길, 자리는 어떤 길인가? 결코 율법을 통해 말하고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아니 외적으로는 율법을 어떤 계명들, 그러나 그 계명의 전체가 아니라 어떤 면을 지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온갖 살인, 온간 간음, 온갖 도적질, 온갖 거짓 증거, 온갖 탐심이 가득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사랑이라는 뿌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고 할 때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이라는 뿌리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위해서도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한다고 할 때 단지 외적으로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도록 하십니다. 때문에 성도는 무엇보다 마음을 살피셔야 합니다. 마음을 살피시되 하나님이 없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 그것도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심지어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외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까지도 살피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2절과 3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온갖 가증한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 2편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분으로서 언급하는 사실을 살핀 적이 있습니다. 시편 2편 4절에 보면 “하늘에 계신 이기 웃으심이여...”라고 말하는데, 여기서도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어디에나 계십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십니다. 영이십니다. 그러나 범신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디에나 계시다고 해서 이것도 하나님, 저것도 하나님이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시편을 통해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장소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그런 방식으로 알리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땅 위에 있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다 알고 계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신다고 할 때 외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의 외적인 것도 보시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까지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런 면에서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실 때 인생은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시편 2편이나 오늘 우리가 살피고 있는 시편 14편에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신다고 할 때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을 연상해 볼 수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11:5) 그러나 사람들에게 지각이 있느냐 하면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내려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인생을 만드신 이유가 결국에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함이었지만, 그들은 다 자기 이름을 내고 지면에서 흩어지는 것을 면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았던 것입니다(창11:4). 하나님이란 존재와 그 이름은 빠지고 사람들의 이름만 기억하도록 만든 것, 그것이 바벨탑이요 오늘 본문에 근거하자면 어리석은 자의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철저히 인본주의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탑을 쌓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겠습니까? 그러나 탑을 하늘에까지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할 때 그들의 사고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도전과 자기 영광을 위한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마치 시편 2편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시2:2-3)고 말하는 것과 같은 사고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타락 이후 그들의 부패한 본성을 끊임없이 나타내었는데, 그 모든 것이 누구를 향한 것인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려는 것이고, 하나님을 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서두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는 것은 의인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을 핍박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어리석음은 단순히 어리석음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처럼 어리석기 때문에 모든 악을 행하는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부패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향하되 돌이키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리석음은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할 때 참된 지혜와 지각은 하나님을 찾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거기에 선의 시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결코 선을 시작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을 주시지 않을 때 사람들은 다 치우치게 됩니다.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바른 길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더러운 자가 되는 것이고, 선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의 전체 생활은 역겨운 부패와 냄새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서 3장에 의하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10-18)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 속에 없는 사람들은, 그가 아무리 다른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빈 껍데기 인생에 불과할 뿐입니다. 물론 세상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 자체로서는 선하고 유익한 지식들이 있어 어느 정도 사회에 선과 유익을 끼치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욥기 표현으로 하자면 그저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따름입니다(욥35:8, 개역한글). 그것은 마치 모레 위에 지은 집처럼 언젠가는 다 무너져 없어질 것들에 불과할 뿐입니다(마7:26-27).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배설물에 불과할 뿐입니다(빌3:8).
다윗은 오늘 본문 4절 이하에서 여느 시편과 동일하게 악인이 의인을 괴롭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앞서 저들이 부패하고 가증하여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들의 열매는 악을 행하는 데 있고, 그 악은 바로 의인을 괴롭히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일단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 자로서 말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참된 지식은 여호와를 부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입으로만 주여, 주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지혜가 하나님 경외에 있다면 하나님을 부를 때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부를 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지식인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서부터 인간들의 행위를 감찰하심에도 불구하고 모두 곁길로 나가버린 것으로 말씀할 뿐 아니라, 더욱 심하게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 먹는다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양심이라고는 없는 듯 보이며, 사탄의 종으로 완전히 눈이 멀게 되어 선한 분별력과 이해력을 전적으로 상실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성도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뭐냐? 지금 4절 말씀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무지한 자들, 다시 말해 우리를 떡 먹듯 먹는 자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실 때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마10:16).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은 이리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 앞에서 양입니다. 양이 어떻게 이리를 이기겠습니까? 오히려 양은 이리 속에서 불안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힘도 없습니다. 아니 힘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나에게 무기를 들고 나올 때 성도가 똑같은 원리로 무기를 들고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이 아닙니다. 세상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갑니까?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찾아 “너는 내 밥이다.”라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양육강식의 원리입니다. 칼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결코 그런 원리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리 가운데 양의 모습과 같이 살아갈 뿐입니다. 칼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과 우리가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저들은 하나님을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부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지만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그것들을 부를 뿐입니다. 소위 하나님을 믿을 바에 내 힘을 믿으라는 논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창조하지 않은 죄조차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이리 가운데 양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분만을 의지해야 하고, 그분에게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아뢰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저들이 칼을 든다고 해서 동일하게 칼을 들로 싸우는데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생각과 그들이 가는 길, 그리고 그 자리는 칼을 들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런 그들의 생각을 따르지 않는 것, 그들의 길에 서지 않는 것, 그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만 살아가는 자, 그것이 성도의 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과 6절로 오시면 4절에서 저들이 떡 먹듯 하나님의 백성을 먹는다고 말했지만 바로 그러한 때에 저들이 두려워 떨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왜 저들이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게 되는가?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부패한 행위를 서슴없이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이지만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하나님께서 양심의 법을 주시고 또한 나라들마다 어느 정도 법을 세워 죄악 된 본성을 억제시키셨지만, 그러나 여전히 사람의 눈을 속여 가며 악을 행하는 것이 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의인을 향하여 악을 행하되, 마치 자기 밥이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행하는 것이 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무엇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드러내시되 누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시느냐? 의인의 세대에 함께 계심을 드러내십니다. 특히 여기 보면 의인에 대하여 가난한 자로 표현하고 있는데, 악인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겼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말을 사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하나님 외에 가진 것이 없다는 측면에서 저들이 우리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면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영적인 것을 채워줄 수 없지만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가난한 자들인 것입니다.
악인은 바로 그런 자들을 향하여 악을 행합니다. 그래서 그들 때문에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습니다. 계획을 세워보려고 하지만 번번이 저들의 악한 계획이 가난한 자들의 계획을 막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의 부요함은 하나님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데 있습니다. 가난한 자로 불리고 있지만 하나님이 피난처인 이상 가난한 자가 아니라 누구보다 부한 자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성도의 위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옹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리 가운데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 끝까지 우리 편에 서 계시는 하나님 때문에 위로를,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겁니다.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 달리 말해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수가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나타나실 때는 결코 긍휼과 은혜가 아닌 공의를 실행하시는 분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저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 감히 누구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갑자기 심판대 앞에 선다면, 그것도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신 하나님 앞에 선다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결코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저들의 밥으로 있는 듯 한 상황에 놓였다고 해서 그들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우리에게 있어 두려움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외에 없습니다. 다만 성도에게 있어 하나님이 두렵다는 것은 저들처럼 심판이라는 것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것,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며, 끝까지 우리 편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다윗은 피난처 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는데, 여기 보면 시온에서 구원이 나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시온이란 다윗 당시 이스라엘의 중심지였습니다. 다윗은 이곳으로 법궤를 옮겨왔으며, 후에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도록 했습니다. 다시 말해 시온이란 하나님께 계신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 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다윗의 시라고 밝히고 있는 만큼 바벨론 포로와는 분명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훈의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 된 곳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14편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 그리고 그들의 부패성 때문에 끊임없이 가증한 악을 행하는 세상,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저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치 밥이라도 된 것처럼 있는 그런 모습이 포로 되었다는 그런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로 된 곳에서 돌이키실 것입니다.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마지막 때는 반드시 나타나실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한시적으로 때를 따라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서 펼치기도 하십니다. 그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지금 현재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어느 때든지 기도할 수 있는 대상, 그것도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데 있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시기도 하시고, 실로 우리의 구원이시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이리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그 가운데서 건져내실 것이며, 궁극적으로 이리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시편 1편만 보자면 우리가 굉장히 복된 자로 보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분명 복된 자이지만, 현실은 악인이 의인을 괴롭힌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저들의 밥인 것처럼까지 표현할 정도입니다. 이리가 아니라 양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시길 바립니다.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로만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아뢰어야 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로 피하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세우셨다는 것도 아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있어야 합니다. 양인데 이리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그런 부패한 본성과 싸우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더 높은 자리 더 좋은 자리를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당연히 선을 행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로서 무지한 자가 아니라 선을 행하는 자로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마치 거짓처럼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 싸움이 쉽지는 않습니다. 이 땅에서 완성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부패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운 싸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을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시편 15편은 그런 점에서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이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냐 할 때 정직한 자, 공의를 행하는 자,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 등을 말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의인의 세대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서 항상 앞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구원은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이 시작이요, 하나님이 과정이며, 하나님이 끝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더더욱 하나님을 의뢰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