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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청춘의 가슴 아픈 사랑을 그리며 존재와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BIFF 제공 |
고등학교 문학 교사로 사는 시가(오구리 슌)의 현재를 비추는 것으로 막을 연 영화는 그가 학교 도서위원을 하던 10여 년 전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과거의 시제로 넘어간다.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독서에 몰두한 채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던 시가는 그런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오는 사쿠라를 통해 서서히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나중에 학생들을 만나고 가르치는 교사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스스로 “사람 보는 눈은 있다”던 그녀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연인 비슷한 관계로 감정이 무르익어가는 사쿠라와 시가 사이에 그녀의 오랜 동성 친구 쿄코가 배치된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두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친구가 남긴 유산을 품고 현재를 살게 될 두 사람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시가에게 ‘공병(共病)문고’라는 제목이 붙은 일기, 결혼을 앞둔 쿄코에게 유품인 사진과 벚꽃 귀걸이가 오브제로 남아 그녀의 존재를 환기하게 한다.
시가와 쿄코는 사쿠라를 만나 받았던 영향을 바탕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두 사람의 삶은 이제 죽고 없는 사쿠라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된다.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1889~1976)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가와 쿄코라는 ‘존재자(das Seiende)’를 통해 사쿠라의 ‘존재(Seins)’는 두고두고 이어지며 ‘상기(aletheia)’될 수 있다.
벚꽃(일본어로 벚꽃을 뜻하는 사쿠라와 주인공 이름 사쿠라는 발음이 같다)과 도서관은 영화의 중심 모티브로 활용된다. 봄에 화사하게 피었다가, 만개하는 정점에 금세 사그라드는 벚꽃의 이미지는 비록 찰나이지만, 시가와 쿄코에겐 생애 마지막까지 기억될 사쿠라의 모습 자체에 대한 은유이며, 철거될 예정인 낡은 도서관과 장서들은 오랜 세월의 층위가 겹겹이 포개진 시간성의 장소, 기억의 환유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연애물의 표면을 쓰고 있지만, 존재와 시간에 관한 한 편의 아름다운 우화이다. 유쾌하고 발랄하며 친절했던 소녀의 모습은 연인과 친구의 인생을 바꿔놓고 영원으로 남았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일찍이 노래했다.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려거든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붙들고, 한 시간 속에 영원을 간직하라.’(‘순수의 전조’)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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