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사이클 매니아 라이온즈가 세운 스왈로 사이드카제작소로 시작한 재규어는 벤틀리와 비슷한 생김새에 그 1/3에 불과한 차값으로 인기를 끈 SSI과 최고시속 100마일을 돌파해 고성능 스포츠카로 기록된 SS100의 연이은 히트로 자동차 메이커로 입지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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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미국에서 인기를 모은 XK120과 레이스에서 활약한 C, D, E타입으로 고급스럽고 스포티한 이미지를 심는 데 성공했다. 지난 88년 포드에 합병된 재규어는 XK, XJ시리즈와 S타입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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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규어는 경제력만 있다고 탈 수 있는 차가 아니다. 그 매력에 반하고 우수 어린 호소력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탈 수 없는 차다. 독특한 기품과 멋 그리고 따를 수 없는 고성능은 재규어만의 색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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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규어는 1922년 21세를 갓 넘은 젊은 모터사이클 매니아 월리엄 라이온즈가 그보다 10살 많은 사이드카 제작업자 윌리엄 웜슬리와 세운 스왈로 사이드카제작소(Swallow Side Car)가 모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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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만든 사이드카는 가벼운 알루미늄을 썼고 앞선 디자인을 지녀 큰 인기를 얻었다. SS(스왈로 사이드카)사 대신 재규어라는 이름을 쓴 것은 45년부터다. 2차대전 후 악명을 떨친 나치 친위대(SS)의 약자와 같아 회사이름을 바꾸기로 하고 인기차종인 재규어를 회사이름으로 쓴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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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사이클 사이드카를 만들던 회사가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한 데는 라이온즈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사업가적 기질이 다분했고 디자인적 감각도 풍부했던 라이온즈는 맨체스터에 있는 크로슬리 자동차회사에 근무하던 시절 야간대학을 다니며 배운 기계공학 이론 덕택에 뛰어난 기술능력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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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허버트 오스틴이 개발해 출시한 가볍고 운전이 쉬운 오스틴 세븐이 인기를 끌던 1927년, 예쁜 디자인의 2시터 섀시를 오스틴 세븐에 얹는다. 이 차가 바로 오스틴 스왈로로 라이온즈가 앞날이 불투명한 사이드카 제조업보다 자동차제작에 힘을 쏟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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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 스왈로에 이어 코울리 스왈로를 내놓는 등 사세확장에 성공한 라이온즈는 공장을 영국 자동차산업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코벤틀리로 옮긴다. 29년 런던 모터쇼에 피아트 티포 509A 등을 변형한 세 가지 차를 선보인데 이어 31년에는 SSI와 SSII 쿠페를 런던 모터쇼에서 선보여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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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는 가격에 비해 고가치를 제공하는 라이온즈의 능력을 강조하며 1천프랑의 외형을 갖춘 310프랑의 자동차로 소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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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즈는 가능한 한자동차의 높이를 낮추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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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그당시 일반적인 방법과 달리 엔진을 샤시에서 보다 뒤쪽으로 옮기고 로드스프링을 측면에 놓음으로 길고, 낮으며 스포티한 외관의 자동차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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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로 성장한 스왈로사는 SSI의 후계차로 SSII 2.5ℓ 모델을 내놓았고 경제형 SSI 1.5ℓ 모델을 선보이기도 했다. 35년에는 진정한 의미의 첫 스왈로 스포츠 모델로 2.7ℓ 20마력 엔진을 얹은 2인승 SS90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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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규어란 이름은 2.7ℓ 오버헤드 밸브 엔진을 얹은 SS100 재규어가 나오면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후 SS모델은 재규어라는 이름을 꼬리표처럼 달고 나왔고 메이커 이름처럼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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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II가 고급 설룬으로 재규어의 전통을 세운 모델이라면 고급 스포츠카의 이미지를 만든 모델은 SS 재규어 100이다. 흔히 SS100으로 불리는 이 스포츠카는 104마력을 내는 엔진을 얹어 당시로는 고성능의 기준이었던 최고시속 100마일(약 160km)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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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SS는 공영화되고 웜슬리가 회사를 떠났다. 대주주가 된 라이온즈는 자산을 정리해 회사를 몇 개의 사기업으로 분리했는데 스왈로 코치빌딩이 사이드카 전문생산공장으로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도 이때다. 2차대전 동안 SS는 폭탄 등 군수품을 생산했다. 전쟁이 끝난 45년, 라이온즈는 회사이름을 재규어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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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재규어는 당시로는 센세이셔널한 스포츠카 XK120을 발표한다. 직렬 6기통 3.4ℓ DOHC 엔진은 160마력의 힘으로 XK120의 최고속도를 시속 193km까지 낼 수 있게 했다. 이 차는 런던 모터쇼 최고의 히트작이 되었고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로 이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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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K120은 거의 대부분 수출되었는데 미국이 가장 큰 수입국이었다. 오늘날 재규어의 스포티한 고품격 이미지는 XK에서 비롯되었다. 또 51년에 데뷔한 마크Ⅶ은 트윈캠 엔진을 얹고 57년까지 3만 대 이상 팔리면서 재규어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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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초 재규어는 자동차 경주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 처음에는 XK시리즈로 뛰어들었고 나중에는 C와 D타입의 경주차를 별도로 만들었다. 이때의 목표는 르망 24 우승이었는데 재규어는 C, D타입으로 출전해 5회의 르망 우승을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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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년 2.4ℓ 엔진을 얹은 세단 마크Ⅰ이 나왔다. 59년에는 XK150에 쓰인 3.8ℓ 엔진을 얹은 마크Ⅰ도 더해졌다. 60년 재규어는 BSA그룹에서 340만 파운드를 주고 데임러를 사들이고(현재 데임러는 XJ시리즈의 4.0ℓ와 6.0ℓ 모델에 호화장비를 갖춰 판매중), 트럭을 만드는 가이(Guy)도 합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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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년에는 마크Ⅱ 살롱이 데뷔하고 61년 제네바 모터쇼에는 E타입이 소개되었다. 미국에서 XKE라고도 불리던 이 스포츠카는 스피디하고 민감한 액셀링, 유연하고 안락한 승차감으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뒷날 E타입은 V12 엔진이 얹혀 4인승 럭셔리 스포티카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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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 재규어는 브리티쉬모터사와 합병했다가 레일랜드(Leyland)사가 더해지면서 68년 브리티쉬 레일랜드모터사(약칭 BL) 산하에 들어간다. BL 산하에서 재규어가 처음으로 선보인 모델은 68년 나온 XJ6 살롱이었다. 프레스티지 세단으로 등장한 XJ시리즈는 큰 인기를 모았다. 72년 XJ시리즈는 V12 5.3ℓ의 엔진을 얹은 XJ12로 발전한다. 당시 XJ12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4인승차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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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라이온즈가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여러 명의 경영자를 거치면서 과도기를 맞았다. 80년대 들어 재규어의 사장이 된 존 이건은 라이온즈와 닯은 점이 많아 의욕적으로 새차를 개발했다. XJ6의 후속모델은 86년 데뷔했고 E타입 후계모델인 XJS 카브리올레는 83년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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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 XJ6는 앞선 XJ 모델들과 스타일 흐름이 같지만 6기통 2.9ℓ, 3.6ℓ의 새로운 엔진이 더 얹혔다. XJS 카브리올레는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경량 6기통 3.6ℓ DOHC 엔진을 얹었는데 판매가 급증했다. 82년 2만2천 대이던 것이 83년에는 2만8천 대로 늘었고 85년에는 데임러 리무진을 포함해 3만8천500대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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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국가소유의 레일랜드 산하에서 재규어는 사유화된다. 그러나 판매부진과 경영난으로 88년 포드그룹에 합병되었다. 포드에 합병되기 전 86년 신형 XJ40이 등장했고 포드 산하에서는 신형 XJ6인 X300이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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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V8 엔진을 개발해 V12 엔진을 대체하게 된다. 이어 91년부터 생산한 XJ220이 르망24에서 선전함에 따라 레이싱 부분에서 잘 알려진 재규어는 옛 명성을 되찾고 미국에서 폭발적인 판매를 기록하게 된다. 포드의 지원에 힘입어 재규어의 판매는 계속 늘어나 93년에는 지난해보다 22%나 늘었다. 최근에도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데 특히 미국시장에서의 판매증가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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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규어는 96년 3월 제네바 모터쇼에 스포츠카 XK8을 데뷔시켰다. 전설적인 E타입의 명성을 잇는 이 차는 V8 엔진과 자체 개발한 5단 자동변속기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재규어의 도약을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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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에는 MKⅡ와 오리지널 S타입의 전통적인 디자인을 현대적인 뉴 에지 디자인으로 해석한 S타입이 데뷔해 판매를 시작하기 전부터 1만5천 대가 계약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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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는 포드의 링컨 LS와 플랫폼을 공유하는데 재규어의 장인정신과 포드의 전략적 마케팅이 접목되어 개발된 첫 번째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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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5만 대 이상 팔리는 XK와 XJ시리즈에 이어 S타입이 더해진 재규어는 요즘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국내에도 지난 98년 3월 포드세일스서비스코리아 산하에 재규어코리아 사업부 를 세워 재규어의 공식 판매 및 서비스를 총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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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도로용 모델은 125C의 엔진을 키운 166 인터로 1947년에 등장했다. 그 뒤를 따라 195 인터(1951)와 212도 제작했다. 당시 페라리 모델은 완성도가 떨어졌지만 기본적으로 레이싱카를 개조한 것이기 때문에 고성능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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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차 만들기는 레이스 활동자금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 페라리는 F1 시작부터 지금까지 출전하고 있는 유일한 팀일 정도로 예나 지금이나 레이스에 힘을 쏟고 있다. 페라리는 1951년 영국 그랑프리에서 첫 우승을 거두었다. 알파로메오를 누른 엔초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눈물을 흘린 일화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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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에서의 활약과 함께 페라리의 높은 성능을 바탕으로 점차 명성을 얻어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 메이커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기능성에 치중하던 디자인도 카로체리아 피닌파리나와의 만남으로 예술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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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한 최초의 페라리는 1952년형 212였다. 그 후 250GT 시리즈, 디노, 365GTB, 512BB, 테스타로사 등을 거쳐 최근의 F50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페라리 차를 디자인했다. 최고의 엔지니어링과 디자인의 만남은 최고의 스포츠카를 완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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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기계장치가 아닌 예술과 감성이 살아 숨쉬는 페라리는 엔초 페라리에 의해 탄생했고 전세계에 퍼져 있는 수많은 페라리 팬들에 의해 키워져 왔다. 비록 엔초는 세상을 떴지만 페라리를 사랑하고 저켜보는 수많은 사람이 있는 한 페라리의 명성은 변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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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결코 많지 않은 모델을 만들었다. 비교적 싼 가격으로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게 한 디노나 308, 328 등 '리틀 페라리'와 수퍼 아메리카나 500 수퍼 패스트, 456GT 등 GT카 등 두 계열이 있다. 그러나 역시 페라리를 대표하는 차종은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포츠카 혹은 수퍼카로 불렸던 고성능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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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년대 등장해 클래식 페라리 중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는 250GT 시리즈나 275GTB, 365GTB/4, 512BB, 테스타로사 같은 베를리네타(쿠페) 계열과 별도로 치는 288GTO, F40, F50 등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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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288GTO와 F40을 제외하고는 모두 V12 엔진을 얹었다. 288GTO와 F40은 레이싱카 엔진을 기본으로 한 V8 트윈 터보다. 288GTO와 F40이 시대를 대표하는 수퍼카임이 분명하지만 V12만이 최고의 페라리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창업 당시부터 레이스 트랙과 도로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것이 바로 12기통 엔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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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F355의 후계차인 360 모데나(쿠페와 스파이더), 테스타로사의 후계모델인 550 마라넬로, 456GT 등 세 모델이 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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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의 엔진이 V8이건 V12이건 F1에서의 노하우를 투입한 이 시대 최고성능의 엔진임에는 변함없다. 누구나 갖기를 원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고,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지만 모두가 즐길 수는 없는 그런 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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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 엔진으로 시작해 모터사이클, 자동차로발전해온 BMW의 역사는 곧 고성능 추구의 역사다. 합리적인 경영과 끊임없는 연구개발이 오늘의 성공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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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여 개국에서 20개 공장을 가동하고 1천여 개 공식딜러를 운영하고 있는 BMW는 98년 롤즈로이스도 인수함으로써 ‘세계 최고급’이라는 명성까지 손에 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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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는 가장 성공한 자동차 메이커 중 하나다. 40년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BMW는 최근들어 더욱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준다. 이러한성공의 바탕에는 성능과 안전 제일주의가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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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의 역사는 섣부른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끊임없는 개선을 통해 정상에 도달하는 독일 마에스트로(장인)의 전통을 담고 있다. ‘이 시대 최고의 명차’를 생산한다고 자부하는 BMW는 1916년 뮌헨에서 창업자 구스타프 오토, 칼 라프 등에 의해 항공기 엔진공장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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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의 상징이 된 엠블럼은 당시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형상화한 것이고 파란색과 흰색은 본사가 있는 바이에른주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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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의 상징은 콩팥모양의 키드니 그릴이다. 이 형상은 1931년 일(Ihle) 형제가 처음 만들었고, 33년 베를린 모터쇼에 소개된 신형 303시리즈에 달리면서 BMW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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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이듬해인 1917년 바이에리쉐 모토렌 베르케(BayerisheMotoren Werke)라는 설비회사를 인수하면서 약자인 BMW를 회사이름으로 쓰기시작했다. BMW가 만든 항공기 엔진은 1차대전 때 독일 공군기에 쓰였다. 패전국이 된 독일은 베르사이유조약에 의해 항공기 엔진을 포함한 무기류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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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맞은 BMW는 모터사이클로 눈을 돌렸다. 항공기 엔진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한 BMW의 모터사이클은 뛰어난 성능으로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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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유럽에는 경제불황으로 자동차가 줄고 모터사이클 붐이 일어 BMW의 새 사업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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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에는 당시 오토바이 경주를 석권하고 있던 영국의 트라이엄프를 제치고 유럽 모터사이클경주를 제패했다. 이후 2차대전 때 이름을 떨친 R75 사이드카를 비롯해 시속 280.22km로 세계 최고기록을 세운 500cc 월드 사이드카, 세계 최초로 ABS를 단 K100LT 등을 내놓아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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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의 모터사이클 사업은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되어 미국 하레이 데이비슨에 견주는 유럽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크루저(Cruiser)가 소개된 97년에는 사상 최고의 판매고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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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생산은 1928년 시작했다. 영국의 오스틴 세븐을 라이센스로 만들던 딕시사를 흡수해 3/15 딕시를 선보인 것이 그 시작이다. BMW는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고유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해 1932년 827cc 20마력 엔진을 얹은 3/20을 내놓았다. 1932년 1.5X 엔진을 얹은 315를 개발했고, 33년에는 2.0X의 319를 내놓았다. 319는 BMW의 첫 경주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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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에는 6기통 2.0X 80마력 엔진을 얹은 로드스터 328이 각종 자동차경주에서 우승을 휩쓸면서 BMW 최고의 명차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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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기로 접어든 BMW는 2차대전으로 다시 위기에 몰리게 된다. 자동차생산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모터사이클은 아이제나크 공장에서만 생산하게 되었다. 종전후에는 해체위기까지 맞았다. 이 때도 모터사이클로 위기를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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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전후 첫모델로 6기통 엔진을 얹은 501을 발표했다. 평화무드가 정착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대형차 붐이 일기 시작할 때다. 이에 맞춰 56년 V8 엔진의 대형 로드스터 502, 503, 507을 차례로 선보였다. 그러나 유럽 전체가 불황이어서 고급차는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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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상황에 맞춰 내놓은 차가 오토바이 엔진(단기통 245cc 12마력)을 얹은 이태리 라이센스모델 이세타다. ‘거품차’라는 애칭으로 불린 이세타는 300, 600, 700cc로 배기량을 늘이면서 계속 생산되었고, 독일의 국민차 역할을 하면서 전유럽에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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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타의 성공에도 BMW의 경영난은 계속되어 벤츠와의 합병설까지 나돌았다. 다행히 59년 헤르베르트 쿠완트가 대주주로 나서고 노동자와 소액투자가, 딜러들이 힘을 합친 덕분에 BMW는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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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에는 생산기지를 본사가 있는 뮌헨에서 근교 딩골핀으로 확대했고, 1600의 2세대 모델 1600-2로 시작되는 02시리즈가 히트해 명성을 얻게 된다. 후속모델인 1600TI, 1802, 2002 등이 잇따라 성공하면서 BMW는 고성능 자동차 메이커라는 이미지를 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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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올림픽이 열리던 72년에는 5시리즈를 생산하면서 세계시장 진출에 적극 나섰다. 5시리즈의 성공으로 BMW는 벤츠를 위협하는 메이커로 떠올랐고, 3, 6, 7, 8시리즈를 연달아 발표하며 눈부신 성장과 함께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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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식 모델 3시리즈는 75년 데뷔해 두차례의 석유파동을 넘기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벤츠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부랴부랴 소형차 190시리즈를 내놓을 정도로 위협적인 모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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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함인 7시리즈는 77년 데뷔해 벤츠 S클래스와 접전을 벌이고 있다. 7시리즈의 쿠페형 6시리즈는 88년 선보인 8시리즈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단종되었다. M시리즈는 스포츠 버전으로 M3, M5 등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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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고수하면서도 현대적인 BMW 디자인의 역사는 93년부터 수석 디자이너로 일해온 크리스 뱅글의 말처럼 ‘혁명적이기보다는 진화론적인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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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가 여러차례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합리적인 경영과 높은 기술이 뒷받침된 결과다. 이를 위한 끊임없는 연구개발 노력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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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에 10여군데 흩어져 있던 개발, 연구실을 모아 87년에 문연 피츠(FIZ)연구소에는 과학자, 엔지니어, 디자이너 등 6천여 명이 디자인과 새차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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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보다 너비가 8배나 큰 이곳은 초현대식 기술장비와 정보 시스팀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BMW의 새로운 소재와 재료, 기술, 디자인 등이 나온다. 보통 6~7년 걸리는 모델 개발기간을 33개월 정도로 줄인 것도 피츠의 아이디어를 집약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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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는 현재 세계 120여개국에서 16개의 생산공장과 1천여개의 딜러를 운영하고 있다. 92년에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스파르탄버그에 현지 공장을 설립해 3시리즈와 Z3를 생산하고 있다. Z3는 95년 미국을 비롯한 100여개국에 팔리기 시작했고 97년 10월 29일에는 10만번째 모델을 생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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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베른트 피세츠리더 회장이 취임한 이후 해외시장 개척에 더욱 힘을 쏟고 있는 BMW는 같은해 영국의 로버를 인수하면서 생산규모가 100만대를 넘어섰고 그동안 BMW에 없었던 SUV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인수 6년째 되던 2000년 로버와 랜드로버를 다시 벤처 캐피탈회사와 포드에 각각 넘김으로써 BMW와 미니, 롤즈로이스 브랜드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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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에는 BMW는 영국 비커스그룹과 롤즈로이스사 매입에 합의해 대규모 자동차그룹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99년 들어 BMW는 SUS붐에 맞춰 X5를 내놓았고, 2000년에는 새 스포츠카 Z8도 더했다. BMW는 다음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메이커의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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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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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사를 창업한 사람은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이나 정작 포르쉐라는 명칭으로 불리워진 것은 포르쉐 박사가 일흔 세 살이었던 1950년 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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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9월 보헤미아에 속해 있던 마페르스도르프에서 태어난 포르쉐 박사는 어릴 때부터 전기 기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벨라 에게르라는 전기기계 제작소의 조수로 일하기 시작한 그는, 1899년 마차 제조에 이어 전기 자동차를 만들어 유명해진 야콥로너사시 험부서의 지배인 자리에 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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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포르쉐박사는 전기 및 전기·휘발유 겸용차 개발에 참여했고, 1990년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그가 만든 전기 자동차가 큰 찬사를 받았다. 1905년 비엔나 노이스타트에 있는 아스트로-다임러사에서 오스트리아의 비행기 엔진까지 설계하게 되었는데, 7년뒤 만든 공냉식 수평대향 4기통 엔진은 현재의 포르쉐와 폴크스바겐 엔진의 조상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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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박사는 설계자로서의 위치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1909년 직접 만든 차를 몰고 자동차 경주에 출전하기도 했다. 직렬 4기통 5.7리터 엔진을 얹은 마야 경주 차는 프린스 헬리 트라이얼에서 1, 2, 3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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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포르쉐박사의 아들 페리 포르쉐는 아버지와 칼 라베의 조언을 받아 폴크스바겐의 부품을 기초로 설계한 최초의 포르쉐 356을 선보였다. 포르쉐 자동차에는 각각 일련 번호인 프로젝트 넘버가 붙는다. 히틀러의 국민차 설계는 프로젝트 60번, 자체 생산을 하기로 한 계획은 프로젝트 356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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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제네바 오토살롱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스포츠카는 포르쉐 356이란 명칭을 달게 되었다. 아들 페리가 탁월한 경험과 경영 능력을 발휘하여 50년대 말 연간 8천대 수준에 올려 놓았다. 1964년에 빛을 본 새 모델이 바로 911이다. 뒤이어 914, 924, 928, 930, 944, 968, 984 등의 모델이 출하 되었는데, 역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911 시리즈는 아직도 꾸준히 명성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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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mborghini)를 만들어 낸 수퍼카의 대부 페루초 람보르기니를 두고 하는 말이다. 람보르기니의 앰블렘인 성난 황소(fighting bull)나 불같은 인생을 살았던 람보르기니의 인생역정을 반추해 보면 람보르기니의 성격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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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르기니의 탄생 배경은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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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이 일어나자 공군에 들어간 그는 에게해의 로도스 섬에서 정비공으로 복무했고 전쟁이 끝나자 볼로냐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군용차량을 이용해 트랙터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솜씨 좋은 그의 손으로 만들어진 트랙터는 그를 당당한 기업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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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 트랙터로 크게 성공한 그는 그 무렵 성공한 사업가가 대부분 그렇듯이 스포츠카인 페라리를 샀다. 젊은 시절 피아트를 개조해 자동차 경주에 참가할 정도로 스피드광인 그는 가혹할 정도로 페라리를 혹사했고 때문에 페라리는 자주 말썽을 피웠다. 짜증이 난 람보르기니는 페라리를 만드는 엔초 페라리에게 항의를 했지만 트랙터나 만드는 사람이 스포츠카에 대해 뭘 아느냐는 식으로 무시하자 특유의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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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그는 페라리를 능가하는 스포츠카를 만들기 위해 자동차 회사를 세웠다. 불같은 추진력으로 만들어진 첫차는 최고출력 360마력, 최고 시속 265km의 350GTV. 사람들은 단시간 내에 만들어진 엄청난 차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고 다음해에 고객 손에 넘겨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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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스포츠카를 만들어 낸 람보르기니는 3년 뒤인 66년에는 미우라, 71년에는 전설의 명차 카운타크 등의 컨셉트카를 발표하면서 전통의 페라리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1966년에 열린 제네바 오토살롱에 출품된 미우라는 V12 3.0리터 DOHC의 350마력 엔진으로 최고시속 280km를 내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스포츠카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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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 제네바 오토살롱에서 발표된 카운타크의 컨셉트카는 현재 경쟁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수퍼카들의 전형(典型)이 되는 기념비적인 모델이 된다. 60년대부터 시작된 수퍼카 바람으로 지금까지 명멸한 수많은 모델 가운데 단 한 대를 고르라면 많은 전문가들은 주저 없이 람보르기니 카운타크를 꼽을 정도이다. 그만큼 카운타크는 스타일링과 성능에서 충격적이고 혁신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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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트카로 끝날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카운타크는 74년 판매시장에 나왔다. 박력있는 스타일링에 V12 3.9리터 DOHC 375마력의 엔진을 얹고 있는데 최고 시속은 300km를 넘었다. 당시 페라리에서 생산하는 어떤 차종도 카운타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면서도 인상적인 모델이 람보르기니의 페라리에 대한 집념에서 탄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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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페라리를 능가하기 위해 무리한 투자를 한 페루초 람보르기니는 72년 재정난으로 51%의 주식을 스위스의 실업가에게 넘겨주었고 카운타크의 시판을 한 해 앞둔 73년 남아있던 주식 49%마저 넘겨주고 은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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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주가 바뀐 람보르기니는 경영주가 계속 바뀌면서 힘없는 메이커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카운타크는 82년 4.7리터 375마력 엔진을 얹은 LP5000으로 발전하고 85년에는 5.2리터 455마력 엔진을 얹은 LP5000 콰트로 발로레로 더욱 힘을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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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그 동안 누적되었던 적자에 허덕이던 람보르기니는 미국의 크라이슬러 산하로 들어갔고 90년에 카운타크의 후계차 디아블로를 내놓을 수 있었다. V12 5.7리터 485마력의 엔진을 얹은 디아블로는 직선 위주인 카운타크의 디자인을 곡선으로 다듬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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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블로의 최고시속은 325km로 시속 100km로 가속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불과 4.09초. 그 놀라운 성능90년대 수퍼카의 세계를 역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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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등장한 람보르기니는 모두 기름벌레. 1리터로 2.6km밖에 달리지 못하는 람보르기니 카운타크나 디아블로는 실용성과는 동떨어진 모델이다. 더구나 낮은 차체 때문에 도로사정이 나쁜 곳에서는 기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단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 저돌적인 면에서도 강렬한 인상은 전세계의 카 매니어들을 사로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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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세계 최초의 휘발유 자동차를 개발한 두 사람은 1926년 회사를 합병해 다임러 벤츠를 탄생시켰다. 다임러 벤츠는 수많은 명차를 내놓으며 고급차 메이커로 입지를 다지는 한편 크럼플 존 개발, 에어백과 ABS의 실용화 등 ‘안전의 대명사’로도 명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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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들어 소형차 A클래스를 내놓고 해외생산을 늘리는 등 체질개선을 거듭해온 벤츠는 미국 크라이슬러와 합병해 110여 년 역사 이래 가장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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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는 ‘최고급차의 대명사’, ‘안전의 대명사’로 불리는 독일 메이커다. 이러한 명성은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다’(Das beste, oder nicht)는 창업정신에 기초한다. 110여 년에 이르는 벤츠의 역사는 곧 자동차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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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의 창업자는 고틀리프 다임러(1834∼1900)와 칼 벤츠(1844∼1929)다. 다임러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32세 때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에 입학, 3년 뒤 우등으로 졸업하고 기계회사의 기술책임자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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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세인 1882년 칸슈타트에 공장을 세우고 거듭된 연구 끝에 세계 최초로 휘발유 엔진을 만들었다. 그는 1886년 이 엔진을 얹은 오토바이를 만들어 시험주행에 성공했고 1년 뒤 마차에 얹어 자동차를 만들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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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는 469cc 엔진으로 1.1마력을 냈고 시속 11.8km로 달렸다. 현재 슈투트가르트 다임러 박물관에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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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임러는 1호차 개발 3년 뒤인 1889년에 개량형을 만들어 파리박람회에 출품했다. 이 차는 V형 2기통 565cc 1.65마력으로 시속 18km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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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다임러자동차회사를 세운 다임러는 ‘최고급차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차의 개량에 힘써 1896년 2기통과 4기통짜리 피닉스 엔진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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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개발한 엔진을 자동차뿐만 아니라 선박과 항공기에도 응용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다임러의 엠블럼인 세꼭지별(현재 벤츠의 엠블럼)은 육, 해, 공으로 뻗어나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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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칼 벤츠는 불우한 환경을 딛고 일어선 입지전적인 기술자였다. 그는 16세 때 칼스루에 공과대학에 진학해 장학생으로 학업을 마쳤다. 26세가 되던 1872년에 기계설계제작회사를 세웠으나 경영부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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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년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 만하임에 벤츠사를 세우고 1885년 세바퀴 휘발유 자동차를 만들었다. 이후 1886년 1월에는 3륜구동 모터카로 특허를 따냈다. 삼륜차를 만든 것은 오토의 특허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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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 1호차는 984cc 엔진으로 400rpm에 0.7마력으로 시속 15km를 기록했다(현재 뮌헨 과학박물관에 전시). 벤츠는 1호차를 낸 뒤 곧바로 자동차 판매를 시작했고 1893년 사륜차 빅토리아를 발표했다. 벤츠 최초의 사륜차인 빅토리아는 1기통 2천915cc 5마력 엔진으로 최고시속 35km를 냈고 1894년에는 세계 최초의 양산차인 벨로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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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으면서 비슷한 시기에 휘발유차를 발명한 두 사람은 각자 서로의 영역에서 발전을 거듭했고 한사람은 벤츠사, 다른 사람은 다임러를 만들었다. 20세기 들어 후손들이 경영하던 다임러사는 벤츠사와 자동차시장과 자동차경주에서 맞부딪치면서 라이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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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가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한 것은 다임러가 개발해 1901년 생산을 시작한 메르체데스의 인기 때문이었다. 이 차는 당시 다임러의 오스트리아 판매대리인이었던 에밀 옐리네크의 딸 메르체데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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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리네크는 자동차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독일의 다임러사를 알게 되고 고틀리프 다임러를 만나 그의 차를 여러대 사게 되었다. 1900년 다임러가 휠베이스를 넓히고 엔진을 개선한 새 모델을 내놓자 옐리네크는 36대의 차를 주문하면서 두가지 조건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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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그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프랑스, 미국의 독점 대리점영업권을 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차에 그의 딸 이름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다임러는 옐리네크의 조건에 당황했지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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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체데스는 나오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다임러사는 모든 차에 메르체데스라는 이름을 썼고 1902년에는 상표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다임러는 사라지고 메르체데스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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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다임러가 내놓은 메르체데스 심플렉스도 인기를 모았다. 메르체데스 심플렉스는 현대적인 기능과 스타일을 갖춘 차로 4기통 4천319cc 40마력 엔진을 얹어 시속 75km의 놀라운 속도를 냈다. 처음으로 공기가 든 타이어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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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는 메르체데스 심플렉스에 대항해 파지할을 내놓았다. 파지할은 4기통 2천413cc 18마력 엔진으로 최고시속 60km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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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메이커의 경쟁은 선박과 항공기에까지 이어지면서 20세기 전반을 장식했다. 두 메이커의 차 만들기는 각각 특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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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에 관심을 가졌던 다임러는 스피드에 역점을 두었고 벤츠는 기술과 안전에 주목했다.1920년대 독일은 1차대전에서 져 극심한 불황에 빠졌다. 자동차산업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쟁중 군수용품을 생산하던 벤츠와 다임러사 역시 심각한 경영난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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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회사는 살아남기 위해 합병을 추진했고 1926년 손을 잡게 되었다. 회사명은 다임러 벤츠, 경영은 칼 벤츠가 맡았다. 이후로 다임러 벤츠의 모든 상품에는 메르체데스 벤츠라는 이름이 붙었고 상표는 1916년부터 다임러가 써온 세꼭지별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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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회사의 합병은 고성능과 안전성을 두루 갖춘 차의 탄생을 의미했고 세계 최초의 자동차 외에도 최초의 자동차경주 우승, 세계 최초의 디젤 자동차, 최초의 트럭, 최초의 버스 등 수많은 기록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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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체데스 벤츠라는 이름을 처음 쓴 차는 슈투트가르트와 만하임이고 1929년에는 고급형 뉘르부르크가 나왔다. 뉘르부르크는 13일 동안 2만km를 계속 달리는 동안 단 한번도 고장나지 않아 뛰어난 내구성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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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벤츠는 세계 각국의 군주나 원수가 즐겨 탄 그로서와 가장 아름답고 호화로운 유선형 스포츠카 MB500K 등을 내놓았다. 1936년에는 세계 최초의 디젤차인 260D를 내놓았다. 4기통 2천545cc 45마력 디젤 엔진을 얹은 260D는 1940년까지 2천대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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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벤츠는 불후의 명차로 기록되는 300SL을 발표했다. 1952년 경주용차를 도로용 스포츠카로 바꾼 300SL은 걸윙 도어를 가진 멋진 스타일에 6기통 2천996cc 215마력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250km를 자랑했다. 300SL은 54년부터 63년까지 3천258대가 생산되었고, 300SL과 뒤이어 나온 190SL은 오늘날 SL시리즈의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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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로 들어서면서 벤츠는 오늘날 벤츠의 상징이 된 라디에이터 그릴과 가로로 세워진 헤드라이트를 쓰기 시작했고 70년대는 엔진 배기량에 따른 숫자로 모델명을 붙이기 시작했다. 82년에는 소형차 190시리즈를 내놓아 더욱 다양한 모델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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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 두가지가 모터 스포츠와 안전이다. 벤츠는 초창기부터 속도경쟁에 뛰어들어 우승을 휩쓰는 한편 일찍부터(1930년대 중반) 승객의 안전을 연구하는 전담부서를 만들어 안전장비 개발에도 앞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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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말 강화측면보호대와 안전도어잠금장치를 개발했고 51년에는 충돌사고 때 엔진이 밑으로 밀려나 승객의 부상을 막는 안전차체를 개발해 특허를 땄다. 53년에는 충격을 흡수하는 크럼플 존을 개발했고 안전벨트 역시 1959년 벤츠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59년에는 세계 최초로 충돌 테스트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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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안전장비인 ABS와 에어백 역시 벤츠가 최초로 실용화시켰다. 이밖에 미끄러운 노면에서 바퀴가 헛도는 것을 막아주는 ASD와 이를 개선해 선보인 ETS(Electric Traction System), 95년 뉴 E클래스에 선보인 안전벨트 조임조절장치도 벤츠의 기술력을 말해주는 안전장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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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는 90년대 들어 첫시련을 맞게 된다. 92년 승용차 판매실적에서 경쟁사인 BMW에 추월당한데다 93년에는 인건비 상승과 매출부진, 적자 투성이의 포거사 인수 등으로 벤츠사상 최고액수인 11억8천만마르크의 손실을 입었다. 체질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벤츠가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이 대중차 만들기와 현지생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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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의 대중차 전략은 9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소형 컨셉트카 비전 A93을 내놓으면서 표면화되었고 97년 A클래스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전체 생산비율의 2%에 불과했던 해외생산을 크게 늘려 97년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 SUV M클래스를 내놓고 프랑스에서는 스와치와 공동으로 스마트카 생산에 들어갔다. 현재 벤츠는 멕시코와 인도, 남아공에서도 조립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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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는 93년 C클래스를 발표하고 이듬해인 94년 흑자로 돌아섰다. C클래스는 82년 등장한 소형차 190시리즈의 후계모델로 데뷔 22개월만에 50만 대가 팔리는 등 큰 인기를 모았다. 95년 9월에는 복고풍의 E클래스를 내놓아 다시 한 번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95년 위르겐 슈렘프 회장이 취임한 후 생산합리화와 비용절감에도 힘써 97년에는 611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 순익증가율을 5.8%로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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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의 변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창립 72주년이 되던 98년에 미국 크라이슬러와의 합병을 발표해 세계 자동차업계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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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는 합병을 통해 97년 말 결산기준으로 자본금 802억 달러, 종업원 41만2천 명, 매출 1천310억 달러 규모의 세계 제3위 자동차 메이커로 재탄생했다. 생산능력은 연간 380만 대로 GM, 포드, 도요다, 폴크스바겐에 이어 세계 5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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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벤츠는 1926년 칼 벤츠와 고틀리프 다임러가 손을 잡은 이래 가장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현재 벤츠는 메르체데스 벤츠의 이름으로 소형차 A클래스와 C, E, S클래스로 이어지는 중·대형 세단, SL, CLK 등 스포츠카, RV M클래스, 4WD G바겐을 생산하고 다임러그룹에서 미니밴인 V클래스와 중대형 트럭, 버스 등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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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탄생한 다임러-크라이슬러는 1만 달러대의 값싼 모델부터 13만 달러에 이르는 최고급까지 넓은 가격대의 모든 차종을 갖추고 있다. 고급차 메이커에서 세계 3위의 거대 자동차기업으로 부상한 벤츠의 변신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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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S-ROYCE 명예와 전통의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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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로이스에는 명예와 자부심, 그리고 전통과 귀족적인 품위가 담겨 있다. 롤스로이스는 돈이 많다고 해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차가 아니다. 명예와 존경할 만한 인격,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를 갖춘 사람만이 탈 수 있는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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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로이스만큼 우아하고 부드럽게 달리는 차는 이 세상에 없다. 시속 125km 로 달려도 차 안에서는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이다. 그리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롤스로이스 안에서는 커피 잔이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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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처럼 부드럽고 빠르고 편안하고 조용하게 달린 다고 해서 롤스로이스는 '달리는 별장, 황제의 차, 달리는 요트' 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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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롤스로이스 사가 세워진 이후로 90년동안 롤스로이스는 최고의 차로 군림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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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롤스로이스 사를 세운 로이스는 최고의 차를 원했다. 만약 그런 차가 없으면 자신이 직접 만들겠따고 결심했기 때문에, 로이스는 무슨 일을 하든지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했고, 조금이라도 더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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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스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도 롤스로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기술자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다. 그래서 차 한 대를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무려 열 달이나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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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6천대 정도만을 만들어 내는 롤스로이스는, 다시 말해 조금 만들되, 잘 만들어 최고로 비싸게 파는 자동차인 것이다. 그래서 1996년, 롤스로이스가 탄생한 지 92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세상에 태어난 롤스로이스는 10만 대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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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승용차에는 그 승용차를 표시하는 독특한 상징물이 있다. 보닛 앞 중앙에 달려 있는 이 엠블런은 공기를 가르며 앞으로 질주하는 배의 뱃머리처럼 멋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그 자동차의 마스코트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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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로이스의 엠블런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나이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보닛 앞머리 한가운데 10cm 쯤 솟아 있는 이 빛나는 여신상은 예술품처럼 정교하고 아름답다. 싱그러운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리는 옷자락, 아름답고 자신감에 넘치는 여신의 모습, 우아한 자태........ 하늘로 솟아오르는 여신 나이키의 이와 같은 모습은 품위를 지닌 명차, 롤스로이스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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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키 여신상이 탄생한 것은 1909년이었다. 그 전까지는 주로 희귀한 인형이나 동물 같은 것들이 엠블런으로 쓰였는데, 미술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롤스로이스의 관리 부장 끌로드 존슨은 아무래도 이런 것들이 롤스로이스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롤스로이스에 어울리는 엠블런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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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1901년, 당시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였던 찰스 사이크스에 의해 롤스로이스의 마스코트가 탄생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나이키 여신상에서 힌트를 얻은 이 여인상은 얼굴, 손, 발은 물론이고 가느다란 주름 하나하나까지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어, 보는 순간 사람들 모두 가 '황홀하다.' 고 탄성을 지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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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 생산으로 만들어지는 롤스로이스는 그 유명한 라디에이터 그릴의 가느다란 쇠창살 하나하나까지도 경험 많은 기술자들이 직접 만든다. 또 로스로이스 한 대에는 엄청난 양의 최고급 스칸디나비아산 가죽이 쓰이는데, '차체는 썩어도 가죽은 남는다.' 고 말할 만큼 좋은 가죽으로 무려 40명의 전문 기술자들이 직접 손으로 바느질 하여 만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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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롤스로이스으 엔진은 정기검사 외에는 특별 검사를 받을 필요가 없다. 시장에 나오기 전에 1만분의 1까지 정밀한 정기 검사를 받기 때문이다. 또한 롤스로이스에는 찬 한 대마다 역사책이 한 권씩 따른다. 만들고 검사하는 모든 과정을 한 권의 책 속에 기록하기 때문이다.
현재 롤스로이스가 생산하고 있는 차의 종류로는실버 스피리트, 실버 스퍼, 코니쉬, 벤틀리, 컨티넨탈 R 등이 있으며, 우리 나라에도 현재 실버 스퍼 2가 들어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