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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도 초에는 그 동안 부모님의 집인 산수동 한옥에서, 용봉동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처음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내 힘으로 내 집을 마련하여 이사한 것이다. 정부에서 근로자들을 위해 좋은 혜택이 주어지는 재산형성 저축제도를 시행하고 있어서, 그것을 이용하여 꾸준히 저축을 한 결과 천만 원의 돈을 모았고, 은행에서 600만원 대출을 받아 1,600만 원으로 방 셋인 33평 아파트 5층을 분양 받았다. 5층 아파트의 맨 위층이었다. 이사과정에서 부모님들과 분가를 할 것인가, 함께 이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어머니는 한옥에서 아버지와 그대로 살겠다고 우리만 이사를 하라고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같이 이사하여 함께 살자고 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했다. 아버지는 한옥을 1,350만원을 받고 팔았다. 그리고 6남매 자녀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외국에서 살고 있는 두 동생을 제외하고,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아버지 혼자 생각만으로 모두 나누워 준 것 같았다. 나에게는 350만원을 주셨다. 그 돈으로 약간 고급스러운 자게 농을 사서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로 인해 생활이 많이 불편해졌다. 용만이와 내가 학교가 멀어지고, 교회가 멀어졌다. 당시에 용봉동은 상당히 외곽 지역이어서 시내버스를 이용해야만 학교와 교회를 다닐 수 있었다. 용만이는 산수초교에서 효동초교로 전학을 시켰지만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해야 했고, 나도 버스로 출퇴근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시내 다방에서 자주 친구들을 만나 소일하셨는데 버스를 이용해야만 한 것이 불편했고, 어머니는 매일 새벽기도회에 다니신 것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교회생활이 전부인 어머니가 가장 고통스러워 하셨다. 새벽이면 거실에서 교회 방향을 향해 앉아 기도를 하셨고, 주일과 수요예배에 가시면 철야를 하고 다음날 집에 오시곤 했다. 부모님들은 5층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는데도 불편해 하셨다. 해지가 유치원에 입학을 하게 되니 어린 해지도 버스를 타고 다녀야했다. 용봉동 우리 집이 있는 곳에는 학교도 유치원도 없었다.
1986학년도가 되어 나는 광주여자고등학교로 옮겼고, 1987학년도에는 용만이가 충장중학교로, 해지는 서산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조금이라도 불편을 해소하려면 집을 옮겨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집을 옮길 조건을 먼저 생각했다. 부모님들을 생각해서 교회 가까운 곳에 1층 아파트를 찾아보기로 했다. 교회 가까운 곳이면 학교도 직장도 모두 가깝게 되기 때문이다. 계림동 5거리에 대명 아파트가 입주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고, 방 넷에 욕실 두 개이고 1층인 38평 아파트가 비어 있는 채로 매물로 있었다. 우리에게 적합한 아파트였다. 3,300만 원을 주면 살 수 있었다. 용봉동 아파트를 2,050만원에 팔았다. 600만원 은행 대출금을 제외하니 1,450만 원이 남았다. 그 동안 저축된 돈까지 합해서 2,000만 원 정도가 있었다. 은행에서 1,300만원을 대출 받아 1988년 초에 대명 아파트를 구입하여 이사를 했다. 용봉동에서 만 3년을 살고 이사를 한 것이다. 이사를 하게 되니 가족 모두가 편리해졌다. 방이 넷이었기에 용만이와 해지에게도 자기 방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 충장중학교도 가깝고, 해지는 계림초등학교로 전학하여 가깝고, 내 직장도 도보로 15분 거리였다. 무엇보다 교회가 가까워서 좋았다. 아버지도 시내 중심지가 도보거리에 있어서 나들이 하시는데 좋았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 수 있었다. 새벽마다 기도하신 어머니의 기도와 우리 가족 모두의 기도 응답이었다. 우리에게 꼭 맞는 아파트를 비어두고, 우리를 기다리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비어있는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도 여러 가지로 편리했다. 대명아파트에서 22년을 살았다.
집을 사고팔고 하면서 재산을 증식해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개의치 않고 살았다. 오래되어 2,500만 원 정도의 돈으로 리모델링을 한 번 하기도 하면서 편리하게 잘 살았다. 그 아파트에 살면서, 1998년 2월 18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2008년 7월 3일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1주기 추모일을 지내고 2009년 9월에 우리 부부는 미국 아들의 집에 가서 2010년 1월까지 4개월 동안 아들 가족과 함께 사는 기회도 가졌다. 미국에서 돌아와, 이제는 대명아파트를 떠나도 될 형편이 되었다는 판단으로 이사를 생각하다가, 수원에서 살고 있는 딸 가까이 가서, 맞벌이 하는 딸을 도와주면서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2010년 5월에 수원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정든 고향을 떠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지난날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제 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같기도 해서, 가벼워진 마음을 갖게 하기도 했다. 수원에서의 생활은 뒤에 다시 기록하겠다.
★1986학년도부터 1990학년도까지는 광주여자고등학교에서 근무 했다. 33년 교사 생활 중에 가장 재미있는 시기였다. 소위 인기 있는 교사였다. 여고생들의 깨끗하고 순수한 사랑을 많이 받았다. 잔정이 많은 학생들이 선생님이 좋다고 찾아와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했고, 용돈을 아껴 선물을 마련하여 주고, 교무실 책상에 화병을 마련해서 꽃을 놓아주고, 교사의 일 거수 일 투족에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졸업을 하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여학생 제자는 없다고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장로로서의 교회생활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1984년에 목사가 바뀌면서, 새로 부임한 목사가 너무 시국에 민감하여, 민주화운동이니, 인권운동에 많이 치중하여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갈등을 많이 조장하고 있었다. 의를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신앙의 한 형태익기도 하겠지만, 다양한 교인들로 구성된 교회에서는 무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장로로서 목사의 행동에, 때에 따라 제동을 걸기도 해야 했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장로들이 모두 나서는 것도 아니어서 어려움이 있었다. 내 나름대로 노력을 한 것이 목사에게 많이 거슬리기도 한 것 같았다. 1984년도에 부임해서 1991년도에 그 목사가 떠나면서 나에 대해 매우 섭섭한 이야기를 남기고 갈 정도로 좋지 않았다. 장로로서의 생활에 회의를 느껴야만 했다.
교회에서 위친계를 만들어 일곱 가정이 서로 도우면서 생활한 것은 보람이었다. 1979년 내가 광주로 부임해 오면서 태동한 위친계는 20년 이상을 함께 친교하며 부모님들의 장례를 함께 했고, 때에 따라 여행도 같이 하면서 보람된 모임을 가졌었다. 1987년에 위친계 여행 기행문이 저장되어 있어서 여기에 옮겨 본다.
★ 1987. 8. 4-6. 위친계 제주여행 기행문
작년 10월의 계모임에서부터 금년여름의 제주여행 계획을 시작했던 것이 드디어 실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제주여행은 사전예약이 필요해서, 1개월 전쯤 대개 날짜를 정해서 항공편 예약부터 알아보았더니 이미 여름예약은 모두 끝난 뒤여서 자체적으로 예약하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원래 우리는 계원 일곱 가정이 세 가정, 네 가정, 두 팀으로 나누어서 임 집사 봉고차를 가지고 가기로 하고 한 팀은 항공으로 가고, 또 한 팀은 선편으로 가고, 올 때는 바꾸어서 오기로 하고 운전을 잘 하는 임 집사 팀과 김 동순 집사 팀으로 나누어 여행을 하려 했던 것인데 항공여행이 어렵게 됨에 따라 선편여행만할 것인가 등으로 계획의 재검토를 하다가 관광여행사를 통하면 항공여행이 가능할 것 같아 알아보았더니 과연 모든 항공예약을 여행사가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우리의 직영계획이 여행사에 맡기는 것으로 바뀌어 8월 4-6일로 날짜가 정해지고 남해관광과 계약을 하게 되었다. 갈 때는 선편으로, 올 때는 항공편을 택하는 여행으로 한 것이다. 일곱 가정 일곱 쌍으로 14명이 여행을 하려고 했으나 윤 장로와 이 재식 집사가 형편상 참여하지 못해 12명이 여행을 하게 되었다.
8월 4일 12시 공용터미널에 모여 완도행 버스를 타는 것으로 여행이 시작되었다. 여행사에서 나온 안내원과 접촉에 차질이 생겨 12시 출발하는 완도행 직통을 못타고 12시가 지나서 출발하는 직행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 직통버스는 1시 30분이라 하니 완도에서의 배 출발시간 때문에 기다릴 수가 없어서 직행버스를 탔는데 에어콘 시설도 없고 또 여러 곳을 경유하기에 다소 짜증이 나기도 했다. 나주, 영산포, 신북, 영암, 성전, 강진, 도암, 남창, 군외 등지를 경유하면서 약 3시간이 지나 완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도착 즉시 택시로 부두로 나갔으며 배를 타기 위한 승선신고 절차를 밟는 동안에 여객터미널에 있는 식당에 가서 비빔밥으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4시 정각 출항하는 카페리호인 한일호에 승선하여 바다여행을 했다. 여수에 있을 때 타 보았던 엔젤호 등 쾌속정 정도를 상상하다가 카페리호라는 것을 보니 굉장히 큰 배였고 배 안에는 넓은 홀이 여러 개 있는 것이 놀라웠다. 우리는 선원이 지정해 준 자리에 우선 자리를 잡고 배 안 밖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바다를 보면서 항해를 했다. 완도를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육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가 사방에 펼쳐졌고 약간의 파도도 일고 있었지만 배가 커서일까? 믿는 데가 있어서일까? 전혀 걱정이 없는 평안한 중에 여행을 할 수가 있었고 아무도 멀미하는 사람 없이 싱싱하게 바다를 지나고 있었다. 중간에 누워보았더니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것보다 배의 움직임을 더 많이 느낄 수가 있었다. 배 안에서 우리는 ‘공동묘지’ 게임을 하면서 한 동안 즐기기도 했고 김 동순 집사가 빌려 온 화투로 삼봉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약 세 시간이 경과한 오후 7시경에 제주도 육지가 보였고 7시가 약간 지나 배에서 내리게 되었다. 완도까지 여행사 직원이 우리를 안내해서 배까지 태워 주었고, 배에서 내리니 우리를 안내할 안내양이 기다리고 있어서 부두 터미널에서부터 안내를 받으며 행동할 수가 있었다. 배에서 내리면서 선원에게 정원을 물었더니 900명이라 했다. 오늘 650명쯤 타고 왔다고도 했다. 1인당 승선요금이 7020원, 얼른 계산해도 3시간 동안에 선박회사는 450만원을 벌었고, 거기에 bus, truck, 오토바이 등 배 밑에 싣고 간 차 종류도 많았기에 500만 원 이상의 수입이 되었으리라는 짐작이 되었다. 봉고차 싣고 가는 요금을 완도에서 알아보니 66500원이라 했으니 차량운반비에서도 수입이 많을 것 같다. 연중 관광객이 끝이지 않는 제주여행을 위해 속력도 빠르고 크기도 한 카페리호는 매우 좋은 것 같았다.
제주에서 우리는 안내양의 안내를 받으며 신 제주에 있는 여관으로 갔다. 늦게 도착해서 도착일에 관광은 없고 바로 숙소에 가서 식사를 하고 쉬게 되어 있는 듯 했다. 여관에 가면서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협죽도(일명 유도화)가 가로수로 많이 있는 것이었다. 빨간 꽃이 만발하여 가로를 누비고 있는 것이 특이하고 좋았다. 광주에서는 화분에 심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을 정도인데 제주에서는 나무가 되어 우선 클 뿐만 아니라 꽃이 만발하고 풍성했다. 일 년에 세 번, 덥기 시작할 때와, 더운 때와, 더위가 물러갈 무렵으로 나누어 꽃을 피운다는 것이고 독을 가진 나무이기에 옛날에는 사약의 원료를 채취했던 나무라고 안내양이 소개했다. 여관에서의 하룻밤은 고역이었다. 남, 여로 나뉘어서 방 두개가 배정되었는데 좁고 더워서 잠을 설치게 되었고 저녁, 아침 두끼 식사도 형편없었다. 직영을 하지 않았기에 받게 된 당연한 대접이라고 하면서 어쩔 수 없었고 안 좋았지만 별 불평 없이 지냈다.
신 제주에서의 하룻밤을 지내고 아침8시 식사를 하고 데리러 온 관광버스에 승차를 했다. 버스에는 우리뿐 아니라 다른 두 팀이 함께 타고 다녀야 되어서 다른 두 팀이 있는 여관으로 데리러 다니는데 준비가 늦은 사람들 때문에 9시가 지나서야 본격적인 관광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제주시내에서는 용두암, 삼성혈, 자연박물관 등 세 군데가 있지만 우리 일정이 짧아서 시내관광은 생략한다고 하고 맨 처음 간 곳이 만장굴이었다. 일만m가 넘는 긴 용암굴이지만 볼 수 있는 곳은 1km지점까지였다. 굴 안은 아무런 기교가 없는 넓은 큰 굴이다. 고수동굴, 성류굴에 비하면 아주 단순한 굴이고 굴 안에 들어가니 천정에서 물방울이 많이 떨어져서 위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굴 안에 거북이 모양을 한 거북바위가 있고 맨 끝에 좀 다른 모습이 있었고 바닥은 바위 돌이었으며 물이 많아서 신을 버리는 경우가 많은 탓인지 입구에서 100원 주면 바꾸어 신을 수 있는 고무신이 있었다. 늙은 노파가 앉아서 고무신을 관리하고 있었다.
다음관광지는 성산일출봉이었다. 원래 새벽에 가서 해 뜨는 경치를 보는 곳인데 숙박시설이 없을 뿐 아니라 제주에서 거리가 멀어서 해 뜨기 전에 도착하려면 제주에서 밤 3시쯤 출발해야 되기 때문에 해 뜨는 모습은 볼 수가 없고 그 대신에 산위를 오르면 넓은 분지가 있어서 그것도 볼만하기에 관광지가 된 곳이었다. 만장굴을 구경할 때는 비가 내려서 우산을 썼는데 일출봉에 오니 해가 떠서 산에 오르면서 옷이 젖을 정도로 땀을 많이 흘렸다. 산위에 오르니 전망도 좋고 넓은 분지도 볼만한 곳이었다. 제주도는 화산이 폭발해서 된 곳이기에 분지가 많은데 그 중에 한 곳이었다. 산에서 내려오니 12시가 되어 일출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된장국이 일품이었다. 대체로 제주도 반찬이 짠 편이고 육지에서 온 사람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관광객을 위해 개발한 음식이 이곳 된장국이라 했다. 뚝배기에 육해공 여러 가지를 넣어서 끓는 상태로 차려주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먹음직했고 실제로 맛이 좋았다. 여관에서 전날 저녁과 아침식사 푸대접 받은 것이 보상되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다음 관광지인 성읍민속촌에 갔다.
차에서 내리니 자칭 청년회장이란 자가 자진해서 안내를 맡아주면서 700년 되었다는 길가 나무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했다. 국가에서 보호하는 나무로 링겔주사도 맞는다고 했고, 쇠사슬로 얽어놓은 부분도 있었다. 제주도의 옛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마을로 아무집이나 한 군데만 보면 된다고 해서 한 집에 안내원을 따라 들어갔더니 감나무가 옆에 있는 ‘똥쉬’ 즉 변소 설명도 해 주었고 그 밑에 돼지를 키웠던 것도 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마지막 한 곳으로 데려 가더니 꿀과 로얄제리에 대한 선전을 그럴듯하게 하고 꿀 차도 한잔씩 대접하면서 사라고 했다. 무보수로 친절하게 안내해 준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제주도 사투리를 써 가면서 어떤 곳에서는 무슨 도구로 장단을 맞추며 노래도 불러주고 한 청년의 인상이 좋았다.
다음 관광지는 ‘산굼부리 분화구’였다. 개인 소유 관광지라 했고 일출봉에서 본 것과 같은 커다란 분지였는데 푹 페인 구덩이 모양의 분화구깊이가 100m라 했으며 분화구 안에 수백 종의 식물과 동물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주변에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어100원 주화를 넣으면 망원경으로 분화구 안이나 먼 경치를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해 놓았으며 오르는 길옆에는 제주도 특유의 묘가 여럿 있었고 묘마다 직사각형 모양의 돌담을 쌓아 놓은 것이 특징이었다. 걸어가는 길바닥의 흙이 빨간색이었는데 흙이 모두 화산재라고 했으며 그 빨간 흙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입구에 둥그렇게 3, 4층의 돌탑을 크게 만들어 놓은 것은 옛날 무슨 마술성(魔術城) 같은 것을 상상하게도 했다.
다음은 한라산 등산할 경우 등산입구가 되는 750고지 성판악휴게소에 갔다. 높이가 1950m인 한라산을 750m까지 오른 셈이라고 할까? 아무시설이 없고 휴게소만 있는 곳이고 국립공원 한라산을 나타내는 입간판이 있는 곳이기에 잠간 들렸다가 5,16도로를 따라 서귀포로 향했다. 5,16도로는 군사혁명 후 1962년에 개설된 도로로 제주도의 중앙을 횡단하는 도로가 되어 관광도로일 뿐 아니라 제주도에 귤 생산이 많아지면서 주요 산업도로가 된 것으로 약 100m 정도 계속되는 제주도에 유일한 숲 터널이 있었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도로는 안내양이 306구비라고 소개했으며 끝없이 펼쳐질 것 같은 도로 양편의 귤 밭을 보면서 광주에도 귤이 많은 이유를 알듯했다. 귤 밭은 대개 큰 나무들이 울타리를 해주고 있었으며 귤이 익을 무렵이면 색이 노랗게 될 것을 상상하면서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군대생활하면서 영천에 두 번 가을에만 가서 있었을 때 길가에 빨간 사과나무 숲을 보며 감탄했던 감정이 새삼스럽기도 했다.
서귀포 시내를 지나 시내에 있는 정방폭포로 갔다. 동양에서 유일하게 직접 바다로 떨어진다는 폭포로 104개의 계단을 내려가서 바닷가에서 폭포를 쳐다볼 수 있었다. 16년 전에 제주도에 왔을 때 이곳에서 전복과 해삼을 사 먹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는데 이번에는 그때같이 장사들이 많이 없었다. 아마 시설 좋은 곳이 많아졌기에 바닷가에 보따리 장사들이 거의 없어진 듯했다. 바로 앞에 모기 ‘문’자를 쓰는 문 섬이 있는데 겨울에도 모기가 사는 섬이라 했고 문 섬에 안개가 끼이느냐 안 끼이느냐를 보고 날씨를 알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다음은 제주도에 있는 가장 큰 폭포라고 하는 천지연폭포를 보았는데 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짙은 청색으로 깨끗지를 안 했으며 관광객이 다른 곳보다 많았다. 우리는 폭포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는데 옆 돌 의자에 다 찍은 듯한 필름이 한통 있는 것을 보고 김 동순집사가 들고 다니면서 주인을 찾아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가상했고, 배 집사 부부가 정답게 걸어가면서 찬송을 부르는 모습도 퍽 좋았다.
폭포구경을 마치고 부두에 가서 선편으로 ‘서귀포 70리’라는 해상관광을 했다. 1인당 관광요금이 5,000원인데 단체할인해서 3,500원, 이 요금은 관광회사에서 부담해 주지 않아서 우리가 부담하고 구경했는데 참 좋았다. 유람선을 타고 바다에 나서니 파도가 제법이어서 배가 많이 흔들리니 몇 사람의 인상이 안 좋고 나중에는 멀미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새섬, 범섬, 문섬을 돌아보고 서귀포해안가를 보는 것인데 섬 주변이라든지 해안의 바위들 모습이 장관이고 여러 가지 전설들이 얽혀 있었다. 백도 관광했던 것이 생각났고 사진으로 많이 본 홍도도 생각게 하는 여러 가지 모습의 기암괴석들을 보았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정방폭포도 좋았다. 요금이 비싼 것 같았는데 관광을 하고나니 비싸게 여겨지지 않는 좋은 관광이었다.
서귀포 70리를 마지막으로 5일의 관광은 끝났다. 제주도 동쪽과 5,16횡단도로를 따른 중앙부분의관광을 하루에 다 한 셈이다. 숙소인 진성장에 7시경 들어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피곤한 몸을 쉴 준비를 했다. 서귀포는 여관시설이나 음식이 제주만 못하다고 안내양이 수차 이야기했기에 고생을 각오했는데 실제로는 방도 더 크고, 음식도 제주보다 메뉴가 훨씬 더 좋았다. 음식이 좀 짠 것이 흠이었고 대우는 더 좋아서 오히려 흐ant함이 있었다. 저녁에는 도착 날에 했듯이 다 함께 모여 예배도 드렸다. 이 날은 수요일이기에 더욱 진지하게 예배를 드렸다. 첫 찬송은 가족별로 돌아가면서 좋아하는 찬송을 하게했고 기도는 이 애자집사가 했으며 성경은 찬송가 뒤에 있는 교독문 52번 요한일서 4장 말씀을 읽었고 460장 찬송을 다 같이했다. 도착한날 저녁에는 찬송 415장 278장 성경은 교독문 53번 계시록 21장 기도는 임 인호 집사가 했고 두 번 다 사회와 간단한 설교는 내가했다. 예배드리는 데에 진지한 모습들이 은혜스러웠고 모두가 신앙으로 열심히 살려는 모습과 예배드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재촉하는 모습들은 우리계의 성격을 나타내는 면도 된 듯한 좋은 분위기였다. 여자들이 있는 방에서는 아침예배도 드린듯했다.
진성장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아침 7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제주도 서쪽관광길에 올랐다. 전날은 세 팀이 합류하는데 시간이 걸렸으나 이 날은 모두가 일찍 준비가 되어 빠른 시간에 출발을 한 셈이다. 맨 먼저 ‘외돌리’라는 해변에 있는 두 바위를 보았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모습의 바위와 할아버지가 물에서 팔짱을 낀 모습으로 솟아오르는 모습의 바위가 있었는데 전날 해상관광 때 바다에서도 본 것으로 비교가 되고 육지에서 본 것이 더 실감이 나고 전설과 함께 그럴 듯했다.
다음은 파인애풀, 귤, 바나나, 영지버섯을 재배하는 한라농장에 들렸다. 제주도에서 나는 과일을 모두 현장에서 그 재배형태를 볼 수 있었고 농장 안내원의 친절한 안내도 받았다. 영지버섯에 대해 선전을 하고 판매도 했다. 꿀 차를 한잔씩 주기도 하고 버스에 올랐을 때 파인애플을 가지고 와서 한 조각씩 맛보라고 주기도 한 인심 좋은 농장이었다. 안내원이 파인애플 한 개를 들고 다녔는데 설명을 하다가 한 곳에서 ‘폭삭 쏙았수다’라는 제주도 사투리의 뜻을 물었을 때 ‘대단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라는 뜻이라고 이 애자집사가 얼른 대답하므로, 맞힌 기념이라며 파인애플을 이 집사에게 선사해 주기도 했다.
다음에 간 곳은 천재연폭포로 3단으로 되어 있는 폭포였고 다리가 무지개모양으로 되어 있었으며 난간 밑에 칠 선녀 조각을 해서 부쳐 놓은 것이 장관이었다. 또 근처에 중문관광단지가 조성 중이었고 거대한 식물원이 공사 중이었으며 천재루라는 큰 건물의 높은 전망대도 있었다. 처음에 버스에서 내릴 때 바로 앞에 커다란 바위들이 숲 속에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가까이 가서보니 동백나무들을 까만 그물로 싸 놓은 것이었고 옆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왜 그런거냐고 물어 보았더니 햇살이 너무 뜨거워 가려준 것이라 했다. 특이한 것이었다.
다음에 간 곳은 산방굴사였다. 주차장 위에 산에서 산방굴사를 볼 수도 있고 아래로 가서 해변을 보아도 좋은데 둘 다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 한 군데만 택해서 보라고 했다. 16년 전에 왔을 때 위쪽을 본 기억이 있어서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해변가에 나가니 바닷가에 바위가 가관이었다. 변산 채석강은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 그야말로 기암괴석, 바닷가 절벽이 거의 까만 색깔에 층층이 구멍들이 뚫리면서 장관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모여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고 좋은 곳을 골라 찍고 나면 그 옆에 더 좋은 곳이 있고 또 있고 했다. 사진은 좋은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사진보다 눈 안에 또 찍고 또 찍고 하자고 하면서 처다 보고 또 처다 보고를 얼마를 했다. 1시 40분 비행기로 제주도를 떠나야 되는 시간의 촉박함 때문에 떠나와야 되었지만 한없이 있고 싶은 아쉬운 곳이었다. 돌아서면서 옆에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곳도 다 보지 못하면서 해외관광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하도 좋은 경치를 보면서 하는 말이었다.
주차장에 오니 우리 뒤에 도착한 차 중에 ‘뇌성마비 정박아 현장 학습’이라는 큰 프랑카드를 차 옆에 두른 차가 있었다. 타고 온 사람들이 정박아들로 모습이 괴상하고 걷지도 못하여 옆에서 한사람 또는 두 사람이 부축하여 걷고, 뒤뚱뒤뚱하는 모습들이 가관인데 사람의 비극적인 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런 중에도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손으로 V자를 하며 사진들을 찍으며 좋아하는 표정들을 짓고 야단들이었다. 아내가 자꾸 그 아이들을 눈 여겨 보고 있기에, 나도 보면서 저 아이들의 부모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플가를 함께 이야기하기도 했고, 그 아이들을 보살피는 젊은 남녀가 상당수 함께 있는 듯했는데 그들의 모습에 구김이 없고 함께 어울리는 것을 볼 때는 천사의 모습을 연상하기도 했다.
산방굴사를 출발하여 제주 관광의 마지막 코스인 협재굴에 갔다. 한림공원, 협재굴, 쌍룡굴이 한 곳에 있었는데 개인소유관광지로 입장료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비싼 곳(880원인 듯)이라 했고 주인은 제주에서 네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라 했다. 한림공원은 조개가루 모래가 쭉 깔려 있고 도로 가운데에 야자수, 카나리엔시스, 양편에는 선인장으로 장식되어 있고 각종 열대식물들이 즐비하게 있어서 열대지방의 어느 지점을 통과하는 기분이었고 약 100m길이의 협재굴과 약 400m길이라는 두개의 굴로 된 쌍룡굴을 통과하는 코스였는데 굴 안도 바닥은 전부 모래로 되어 있어서 특이했고 만장굴보다는 짧지만 굴 안은 훨씬 어두웠다. 굴 안에서 어두운 한 지점을 지날 때 내 몸의 중요부문에 닿는 손길이 있어서 깜짝 놀랐는데, 팔짱을 끼고 걷던 아내의 손이었고 내가 놀라는 것에 아내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내만이 만져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곳이기도 하지만 예상 못했고, 많은 군중 속인지라 놀라는 모습이 즐거웠던 모양이다. 카메라의 렌스 뚜겅 한 개를 주어서 주인을 찾아주려고 해도 찾지 못하고 버스까지 가져 왔더니 마침 같은 것을 잃어버린 김 동순집사의 카메라에 딱 맞아 좋아하기도 했다. 곽 애남집사는 전투경찰로 이곳에 와서 협재 해수욕장에 마침 파견 나와 있는 동생을 상봉한 곳이기도 했다.
마지막 관광을 마치고 재촉해서 신제주로 향했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버스 밖을 보니 밭과 밭 사이에 경계를 이룬 돌담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버스 안에서 제주에 논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논을 보았다는 사람, 논은 없었다고 하는 사람 등 야단이다. 밭과 밭을 둘러싼 돌담만 있는 것 같은 곳을 지났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서 넓은 논이 나타났다. 모두가 환호한다. 쌀 나무다, 논이다 하고 야단이었는데 논도 제법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보이는 장면 중에 가슴 아픈 것은 밭에서 수박이 넝쿨이 없이 딩구는 것을 너무 많이 본 것이다. 태풍 셀마의 피해로 넝쿨은 다 녹아버렸고 수박만 남아 있는데 먹을 수 없는 것이 되어 그대로 방치해 둔 것이라 했다. 그 숫자가 너무도 많은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제주에서 망망대해를 많이 본 것이 참 좋았다. 수학여행을 다니면서 동해바다를 실컨 본 것보다 더 많은 바다를 본 것 같다. 제주는 머문 곳이든 가고 있는 곳이든 언제나 바다가 옆에 있었다. 끝없이 넓은 바다는 언제보아도 시원함을 안겨주는 좋은 모습이다.
광주에서 제주를 향해 갈 때는 7시간이 소요되었다. 완도까지 버스로 가서 배로 바꾸어 타고 갔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은 너무 짧았다. 1시 40분 비행기로 왔는데 양쪽 비행장의 활주로에서 머문 시간이 10분 정도, 공중에 떠 있는 시간이 20분 정도 인 것 같았다. 2시 10분쯤 광주비행장에 내렸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구름의 모양이 참 좋았다. 솜털을 펼쳐놓은 것 같기도 하고, 히마리아산을 등반할 때 보이는 것 같은 눈으로 쌓인 넓은 들판 같기도 하고, 사뿐히 내려서 걷고 싶은 충격을 안겨주는 구름의 모습들이 무엇보다 좋았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유 순희집사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주민등록증에 이름이 유 광심으로 되어 있는 것을 모르고 유 순희로 예약을 해서 비행기회사에서 못 태워준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먼저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이 영태집사 내외만 못 타고 있었다. 사정 이야기를 하여 비행기표를 바꾸고 1200원의 벌과금을 내고 출발 직전에 가까스로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집사내외는 잠시 얼굴이 시노래졌던 것이다.
무사히 집에 도착하여 저녁식탁을 온 가족이 대하면서 아버지의 남신도대회 다녀오신 이야기, 우리의 제주여행 이야기가 되어지는 중, 제주에서 아버지보다 더 늙은 분이 손자 넷과 여행하는 것도 보았고, 아빠가 딸하고 여행하는 분도 있더라고 했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해지가 얼른 ‘아빠 엄마만 자식을 안 갖고 갔구나’ 해서 온 식구가 한바탕 웃기도 했다. 어제 7일에 비바람이 몹시 부는 것을 보면서 2박3일 우리의 여행은 정말 안성맞춤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돌아온 뒷맛이 더욱 흐뭇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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