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렸을 때 이런 단계들이 주어졌더라면 참 근사했을 텐데요. 그 당시 제게는 사교성이란 게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 형은 언제나 친구를 쉽게 만들곤 했는데, 전 전혀 그렇지를 못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형 친구들을 제 친구로 삼으려고 애썼죠. 그건 형을 곤란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형이 가는 곳이면 나도 어디나 따라 가고 싶어했고, 형이 하는 일이라면 나도 뭐든 따라하고 싶어했으니까요.
제가 나름의 관심분야를 발달시키게 된 건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였습니다. 그 당시까지도 여전히 음악을 좋아하던 저는 고적대와 합창반과 오케스트라부에 가입했습니다. 또 연감(年監)요원으로 사진 동아리에도 가입하고, 학교신문 리포터도 했죠. 그리고 연극 동아리와 체스 동아리에서도 활동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던 게 아마 토론 동아리였을 겁니다. 제가 토론 동아리 우승권자였다는 사실도 덧붙이고 싶군요.
그리고 고등학교는 제 방송 경력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지역의 한 라디오 방송국이 고등학교 운동경기 소식을 전하는 밤 시간대 프로그램에 학생들을 아나운서를 쓰기로 했는데, 그 당시 저는 이미 우리 학교의 모든 풋볼 시합과 농구 시합을 중개하는 아나운서로 공인받다시피 하고 있던 터라, 제가 학교 대표로 뽑힌 건 당연한 일이었죠. 그게 저의 라디오 첫 출연이었고 35년 방송 경력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고 다닌 그 온갖 것들을 가지고도(혹은 그것들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친구를 별로 사귀지 못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 에고가 갈수록 커져갔던 게 아마 가장 큰 문제였을 겁니다. 그건 아버지에게서“있어도 말이 없다”는 핀잔을 늘상 받곤 하던 내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이기도 했고, 또 제가 항상 지니고 있던 약간의 과시욕 때문이기도 했지요. 그 당시의 제가 참아주기 힘든 애는 아니었는지 걱정되는군요. 아니, 사실 고등학교 동창들 중에서 나를 참아낼 수 있었던 애들은 그리 많지 않았죠.
저는 이제 그런 상황이 뭘 뜻하는지 압니다. 그건 내가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런 인정을 구하려고 했던 겁니다. 아버지는 칭찬에 무척 인색하셨습니다. 내가 토론 시합에서 이겨서 집에 트로피를 갖고 왔을 때도, 아버지는 “난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는 딱 한마디로 끝내시더군요.
시합에서 우승하고도 자기 아버지에게서 아무 칭찬도 받지 못할 때, 자신을 좋게 느끼기란 힘든 일이죠. (아버지의 그 논평과 관련해서 최고의 비극은, 지금에 와서야 아버지는 그걸 칭찬으로 생각하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아버지에게 제가 하는 온갖 일들, 제가 이뤄낸 온갖 것들에 대해 떠들어대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얘야 정말 굉장하구나. 축하한다. 네가 자랑스럽다”라고 말씀 하시는 걸 들으리라 기대하면서요. 하지만 결국 나는 아버지에게서 그런 말을 듣지 못했고, 그 때문에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걸 구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 습관은 오늘날까지도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억누르려고 애쓰긴 했지만, 아직도 완전히 깨지는 못한 거죠. 게다가 더 나쁜 건, 십중팔구 내 자식들도 자신들이 이룬 일들에 내가 참으로 무덤덤했노라는 하소연을 당신에게 하게 되리란 겁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의 죄는 아들에게 이어지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