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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사랑 여행 스크랩 숭례문 복구, 그 5년간의 노력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71 14.08.03 15: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354


숭례문이 53개월 간의 복구공사를 마치고 새롭게 문을 열었습니다.

숭례문은 서울도성의 사대문 중 남쪽에 위치한 대문으로 우리니라 수도의 정문 역할을 해왔던 점에서 그 역사적 상징적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숭례문은 지난 2008년에 사회에 불만을 품은 방화범에 의해

2층 문루의 90%, 1층 문루의 10%가 소실되는 막대한 피해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1층 문루의 주요 구조부와 하부 석축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화재가 발생하기 전에 기록된 숭례문 실측자료들이 비교적 잘 남아있어서, 복구공사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숭례문 복원(復原)’이 아니 복구(復舊)’로 규정하는 이유도 숭례문 전체가 소실된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만 소실되었기 때문인데요. 복구(復舊)는 복원과 달리 훼손된 부분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숭례문 복구 조감도                        ?복구 완료된 숭례문 전경

 

 

 

?숭례문 복구과정 ?

 

숭례문은 화재 이후 크게 3가지 단계로 나누어서 복구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1. 화재현장 수습   /     2. 현장조사, 고증, 복구설계     /     3. 복구공사






?화재 및 화재현장 수습 ?

 

숭례문 화재는 2008 210 2040분경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 211 0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옮겨 붙어 일부 부재가 소실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화재로 숭례문 전체가 소실되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실제로는 1층 목부재의 상당수가 건재한 상태였습니다.  



?화재 후 훼손된 숭례문 전경            ?화재 후 1층문루 전경 (1층 부재는 상당수가 건재)

 

 


숭례문 화재진압이 어려웠던 이유는 적심이라는 목부재에 불이 옮겨붙었기 때문인데요.

적심은 서까래 상부, 기와 하부에 위치한 목부재로 외부에 들어나 있는 부재가 아니기 때문에

소방호스로 불씨를 잡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화재진압 후 현장을 수습하기 위해 강관비계가 설치되었고, 건물의 2차 붕괴방지를 위해 남아있는

부재의 구조보강이 이루어졌습니다. 현장수습은 문화재연구소, 경찰청, 소방청 등 관계전문가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화재잔해 수습과 감식작업, 목부재의 응급보존처리, 피해현장 정밀기록 등이

시행되었습니다.



?화재현장 수습과정                                  

 

  

 

?고증 및 복구 설계 ?


2008년 6월부터 2010년 6월까지 2년간에 걸쳐 숭례문 복구를 위한 연구와 설계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화재 전 숭례문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부분적으로 변형된 모습이었는데요.

이번 숭례문 복구공사에서는 이 보다 앞선 시기인 ‘조선 초기'와 '조선 중기’의  숭례문 형태를 기준으로 하여 복구연구가 진행 되었습니다.  여러 고증자료를 통해 보다 원형에 가까운 숭례문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 숭례문 실측자료                                              ?숭례문 지반층 확인




1960년대 이루어진 숭례문 수리공사 당시 기록되었던 실측자료(도면, 탁본자료) 등을 참고하여 설계에 반영하였고, 숭례문 바닥에 약 1.6m 깊이로 뭍여 있던 흙 중 일부를 걷어내어 조선 중후기 당시의 지반을 복구하였습니다. 숭례문 현판은 6.25사변 때 필체 일부가 왜곡되어 원형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서울 지덕사에 보관되어 있던 기존현판의 탁본자료를 통해 변형된 필획 일부를 바로 잡았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훼손된 좌·우측 성곽 일부도 복구되었는데요. 성문만 덩그러니 남아있던 화재 전 모습과 비교해 보았을 때, 더욱 웅장한 숭례문 느낌이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화재직후 수습된 숭례문 현판                      ?탁본자료와 필체비교



?새로 복원된 좌우측 성벽




?복구공사 ?


숭례문 복구공사는 단지 건물의 외형만 복구하는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기존의 형태뿐만 아니라 건물을 짓는 방식 역시 기존의 전통건축기법이 도입되어 추진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복구비용과 복구기간이 늘어나긴 하였지만, 그만큼 의미 있는 복구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됩니다.


복구작업에는 중요무형문화재기능 보유자가 참여하여 최고의 전통기술로 숭례문 복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복구에 참여하는 장인은 목공사를 담당하는 대목장, 성곽 등 석공사를 담당하는 석장, 단청작업을 담당하는 단청장, 기와제작을 담당하는 제와장, 지붕 기와잇기를 담당하는 번와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석공사                            ?목공사                             ?번와공사

 



숭례문 복구에 사용된 재료는 기존 목재를 최대한 복구해 재활용하였으며 그 외의 부재는 전통소재를 사용하여 복구하였습니다. 숭례문의 1층 문루는 약 10%만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화재에 소실되지 않은 목재는 재활용되어 복구작업에 사용되었습니다.

기와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기와가 아닌 조선시대 전통가마를 재현하여 수작업을 통해 총 2만 3천여 장의 기와를 완성하였습니다. 화재 당시 파괴됐던 지붕의 잡상들도 모두 복원되었고, 화재 전에는 없었던 삼살보살과  천산갑, 이구룡이 새로 포함되어 잡상의 완전성을 더했습니다.



?전통기와 제작과정                                                  ?단청공사

 



단청에 있어서도 화학안료가 아닌 전통재료인 천연안료가 사용되었는데, 아쉬운 점은 국산 안료가 아닌 일본산 안료가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국산천연안료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생산이 중단되었고, 기법 역시 구체적으로 전해져 오지 않아서, 국산안료를 재현하여 생산하기에는 많은 부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부분은 앞으로 연구가 계속되어 우리 전통기법을 응용한 재료개발이 이루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복구 작업과 함께 중요시된 부분은 문화재 안전 관리 시스템이었습니다. 화재로 인해 숭례문이 훼손되었던 뼈아픈 경험을 거울삼아, 복구완료 된 숭례문을 보다 안전한 방법으로 유지 관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최첨단 감시 장비와 방재 장비를 관리할 관리동이 숭례문 옆에 자리하고 있고 . 화재가 발생하면 즉각 경보기를 울릴 광센서형 열 감지기를 비롯해 적외선 불꽃 감지기도 상층과 하층에 각각 8개씩 모두 16개가 설치됐습니다. 






?새롭게 문을 연 숭례문을 바라보며 ?


2008년 2월 숭례문 화재 당시 본고 기자는 ‘전통건축’을 공부하는 대학생이 이었습니다.


초기에 금방 진압 될 것이라던 숭례문 화재는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고, 결국 숭례문은

다음날 아침 절반이상이 없어진 모습으로 우리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기자가 다닌 대학교(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는 1960년대 수리공사에서 나온 숭례문 옛 부재

일부를 보관하고 있었는데요. 화재사고 며칠 후, 이 부재를 서울로 옮기는 작업이루어 졌고, 저는

그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숭례문 옛날 부재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 길...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첨차, 살미, 창방, 한때 기존 건물과 짝을 이루었을 부재들을 보며  ‘ 너희들의 오랜 친구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 ’ 라며 중얼거렸던 기억납니다. 전통건축을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국보 1호인 건축물이 불타는 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많은 죄책감과 허탈함이 몰려 왔습니다.


숭례문의 화재로 인해 우리는 많은 걸 잃었지만, 또 많은 걸을 깨닫는 기회도 되었습니다.

그동안 심도 있게 논의되지 않았던 ‘문화재 안전’에 관해 정부와 관련전문가, 국민들이 하나가 되어 논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났고, 아직 진행 중에 있지만 여러 측면에서 성과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숭례문은 자신의 몸을 일부 태우는 살신성인을 통해 우리에게 문화재에 대한 여러 메시지를 전달해 준 게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이와 유사한 사고로 ‘호류지 금당 화재사건’ 있습니다. 호류지 금당은 당대 최고(最古)목조건축물 중 하나였으나, 1946년 누전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의 상당한 부분이 소실되었고 담징의 걸작으로 알려진 벽화 역시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화재사건을 계기로 문화재 관련된 법률을 통합하여 제정하였고, 화재가 발생한 1월26일을 ‘문화재 방화의 날(文化財防火デ?)’로 지정하여 소방훈련을 50년 넘게 실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숭례문이 불탄 2월 10일을 ‘문화재 방재의 날’로 설정하고 여러 소방훈련과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노력과 관심이 계속해서 이어져 수백 년, 수천 년을 이어져온 우리 문화재가 더 이상 피해 입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봅니다.







▲제5기 문화재청 블로그기자단 윤범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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