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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찬란한 미래와 9200년 역사|
한국의 찬란한 미래와 9200년 역사
스크랩: http://blog.daum.net/dosu92 글: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 최병문 (010-4607-3746) ★ KBS 역사 스페셜 ‘추적 환단고기(桓檀古記) 열풍’ : 1999년 10월 02일 (41회) KBS 방영 내용 -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어떤 책인가? 이 책은 네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환국(桓國, B.C7,199-3,897)과 배달국(倍達國, BC3,897-2,333)의 역사를 기록한 삼성기(三聖紀),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역사가 담겨있는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北夫餘)의 역사를 기록한 북부여기(北夫餘紀), 고대(古代)시대(고구려.신라.백제)부터 중세(中世) 고려(高麗)까지의 역사가 담겨있는 태백일사(太白逸史)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 속에는 놀라운 역사가 펼쳐진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이 아니라, 9,200년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최초에 환국(桓國, B.C7,199-3,897)이 있었고, 뒤를 이어 배달국(倍達國, BC3,897-2,333)이 있었다. 그리고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 후 북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대진국(발해), 고려의 역사로 펼쳐진다.
특히 상고(上古) 시대가 찬란하다. 9,200년 전 탄생한 최초의 국가 환국(桓國)은 3,301년 동안 7대(代)의 환인(桓因)들이 통치했다. 그 후 배달국(倍達國)은 18대(代)의 환웅(桓雄)들이 2,096년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리고, 단군(檀君) 조선(朝鮮)이 탄생하는데, 47대(代)의 단군(檀君)들이 통치했다고 한다. (중략) 이 책에서는 배달국(倍達國, BC3,897-2,333)에 녹도(鹿圖) 문자(文字)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한글과 꼭 닮은 이 문자(文字)가 4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의 가림토(加臨土) 문자라고 말하고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인류 최초로 문자(文字)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류 최초의 문명(文明) 국가를 세웠으며, 중국과 아시아 각국에 세계 4대 문명을 전파한 민족이라고 한다.
1999년 10월 09일 한글날에 방영된 KBS 역사 스페셜을 보면, 세종대왕은 성삼문(成三問)을 만주(滿洲) 방면으로 13번이나 보내어 고조선(古朝鮮) 가림토(加臨土) 문자의 기본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후, 세종대왕은 어떠한 신하에게도 전혀 알리지 않고 친족을 데리고 한글 창제 작업을 진행했으며, 드디어 1446년 10월 09일에 훈민정음(한글) 28자를 반포하였다. 결국, 배달(倍達, BC3,897-2,333)의 녹도(鹿圖) 문자(文字),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의 가림토(加臨土) 문자가 오늘날 한글의 뿌리이며 근간인 것이다. (동영상=http://www.scjnet.co.kr/movie/history/history_handan.asx)
■ 중국(中國) 만주(滿洲) 길림성(吉林省)의 고구려(高句麗) 환도(丸都) 산성(山城) 아래에 가면, 웅장한 피라미드들이 여기저기 수 없이 서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100개 이상이다. 평균 25-100 m 높이의 피라미드들이다. 이집트 최대 피라미드 보다 더 큰 것도 있다. 제작 시기도 이집트보다 몇백 몇천년 앞선다. 이런 것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기술로는 연인원 100만명이 소요된다고 한다. 큰 것은 이집트 최대 피라미드 보다 더 크다. 바로 우리나라 배달(倍達, BC3,897-2,333)의 조상들이 건축해 놓은 것들이다. 2001년 07월 09일, 중국 신화 통신은 만주(滿洲) 길림성(吉林省) 집안 지역의 고구려(高句麗) 환도(丸都) 산성(山城) 아래에서 5,000여 년 전의 피라미드를 발견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들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7개의 묘장과 상제(上帝)님께 천제(天祭)를 올리는 제단이 있다고 한다. 바로 배달(倍達, BC3,897-2,333)의 것이다. 이집트의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는 BC 2,690년 기자 지역의 키오프스(Cheops)의 피라미드로 알려져 있는데, 이집트의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 보다 300년이나 앞서서 만들어진 것이다.
배달(倍達, BC3,897-2,333)의 피라미드 문화가 메소포타미아(BC3,500-2,600년) 문명을 거쳐 이집트(BC 3,100년경) 문명으로 전파된 것이다. 중국의 고고학자 왕시핑 Wang ShiPing 교수는 중국 서안 일대의 피라미드도 조사했었는데, 배달(倍達, BC3,897-2,333) 연대의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북부와 서안 지역에 가면, 이런 피라미드가 100개도 넘게 있는데, 그 중에는 이집트에서 가장 높은 쿠푸왕 피라미드 (146.5m) 보다 두 배 이상 높은 300m 이상의 것도 있다.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中國) 공안(公安)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다. 학술적인 조사도 불가능하며 중국에 의한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중국 당국은 1960년대, 1970년대에 이미 이들 피라미드들을 발굴하다가 동이족(東夷族) 즉 배달(倍達) 민족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므로 발굴을 중단했다. 황하 문명(BC 3,000-2,500년) 보다 배달 문명(倍達, BC3,897-2,333)이 빨랐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발견되는 피라미드들은 위로 갈수록 낮아지고 계단식 형태의 모양을 띄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高句麗)의 무덤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런 건축 공법을 ‘들여쌓기 공법’이라고 부르며,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高句麗) 고유의 건축 공법이라는데 이의를 다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중국 당국은 만주의 피라미드들에 대한 접근을 금지시키고 고조선(古朝鮮, B.C2,333-238), 고구려(高句麗)를 중국 역사라 우기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紅山) 문화는 B.C 3500년까지 올라가는 내몽고(內蒙古)와 요녕성(遼寧省)의 접경 지역은 적봉(赤峰), 조양(朝陽), 능원(凌源), 객좌(喀左), 건평(建坪) 등을 중심으로 분포된 유적 문화를 말한다. 홍산(紅山)은 내몽고(內蒙古) 자치구 적봉시(赤峰市)의 동북방에 인접한 산의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 적철광(赤鐵鑛)으로 뒤덮혀 온통 붉은 색의 산(山)이다. 홍산(紅山) 문화 중에서 그 핵심지라 할 수 있는 우하량(牛河梁) 유적지에서 대형 제단(祭壇), 여신묘(女神廟), 돌로 쌓아 무덤의 묘실(墓室)을 만든 적석총(積石塚) 등이 발굴되었다. 홍산(紅山) 문화의 3대 요소가 바로 대형 제단(祭壇), 여신묘(女神廟), 적석총(積石塚)이다. ★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이 처음 발굴을 시작하였고,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牛河梁) 유적이 발굴되자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왜냐면,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년)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기 때문이다.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문명이었다.
또한,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E 3,500-2,600년). 황하 문명(BCE 3,000-2,500년). 인더스 문명(BCE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E 3,100년경)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小河西)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倍達 BC 3,897-2,333)의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현재, 중국은 홍산(紅山) 문화를 ‘요하(遼河) 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 동이족(東夷族) 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중국은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 ■ 환국(桓國, B.C7,199-3,897) 환인(桓因)께서 처음 하늘의 광명(光明)을 계승하여 천산(天山)을 중심으로 광명(光明) 세상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이를 다시 계승하여 배달(倍達, B.C3,897-2,333) 환웅(桓雄)은 동방에 신교(神敎)와 광명(光明)의 세상을 건설하고자 했다. 이 후,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의 단군(檀君)은 광명이세(光明理世)의 사상을 진한(辰韓). 번한(番韓). 마한(馬韓)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통해서 실천하고자 했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살펴보면, 한(韓) 민족은 먼저 조상(祖上)을 받들고 궁극적으로 상제(上帝)님을 잘 모시는 민족이었다. 상제(上帝)님의 신교(神敎) 사상과 광명(光明) 사상을 지상에 그대로 펼치고자 했던 민족이었다.
■ 한(韓) 민족의 신교(神敎)와 광명(光明)을의 명맥을 유지하고, 하늘과 땅을 뜯어 고쳐 개혁(改革)하는 광명(光明) 공사(公事)의 사명을 받들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해야 한다. 인간은 우주와 태양의 광명(光明) 심법(心法)을 본질로 하여 태어난다. 서울의 광화문(光化門)이라는 명칭에는 인류의 빛이 되어야 할 한(韓) 민족의 사명이 그대로 천명되어 있음을 우리는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 영국의 역사 학자 토인비(Toynbee)는 ‘역사는 반복된다.’ 라고 말했다. 한(韓) 민족이 과거에 위대한 문명을 건설했다면 앞으로 통일 한국의 미래 문명 또한 위대한 문명을 건설할 것이다. 영국의 역사 학자 로드 액턴(Lord Acton)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라고 말했다. 북한 김정일과 김정은 체제는 곧 망한다.
왜냐면, 절대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북한 김정일은 2011.05월 중국을 방문하여 최신형 전투기 지원을 요청했지만 퇴짜 맞았다. 그래서, 2011.08월 러시아를 방문했지만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남한과 북한은 가까운 장래에 통일(統一)된다. 그리고, 통일 한국은 과거의 영광과 번영을 다시 누리게 될 것이다. ★ 한국(韓國)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안호상(1902-1999) 박사가 문교부 장관 재직 시에 중국(中國)의 저명한 문학자이며 평론가인 임어당(1895-1976) 선생을 만나 "중국이 한자(漢字)를 복잡하게 만들어 놓아서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 나라까지 문제가 많다" 라고 말하자, 중국(中國)의 임어당 선생은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漢字)는 당신네들 조선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 만든 문자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소?" 라고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 한(韓) 민족은 9,200년의 역사를 지닌 아시아의 종가(宗家) 민족이며, 배달(倍達) 민족이다.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배달(倍達) 민족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었는데, 요즘은 별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2,333-238). 부여. 옥저. 동예. 낙랑국. 마한. 변한. 진한.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 환국(桓國)의 신교(神敎)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 환국(桓國)의 12개 나라 가운데, 수밀이국과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환국(桓國)의 장자국(長子國)이 배달국(倍達國)이었고, 배달국(倍達國)의 장자국(長子國)이 고조선(古朝鮮)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년)은 신시(神市) 배달(백두산. 1-13대 환웅)과 청구(靑丘) 배달(산동성 태산(泰山). 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은 다시 고조선(古朝鮮,BC 2,333-238)으로 이어졌다. ★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 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 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 중국의 황하(黃河) 문명은 B.C3,000-2,500년경에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東北)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 요하(遼河) 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요하(遼河) 문명 유적에서 중국의 황하(黃河)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 배달(倍達 BCE 3,898-2,333)의 홍산(紅山)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E 3,500-2,600년). 황하 문명(BCE 3,000-2,500년). 인더스 문명(BCE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E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 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 BCE 3,898-2,333) 문명이 중국의 황하(黃河) 문명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黃河)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겨 난 것이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은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漢) 민족에게 전해줬다. 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우(禹) 임금 (하夏나라의 시조). 탕(湯) 임금 (은殷나라의 시조). 문왕 (주周나라의 시조). 무왕 (주周왕조 개창). 강태공 (병법의 시조, 제齊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또한, 중국(中國)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堯)임금. 순(舜)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청구 배달(靑丘,14대-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 문화 (紅山文化)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 고조선(古朝鮮)의 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虎.호랑이)과 웅족(熊.곰)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신화(神話)의 형태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그런 시대였다. ★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 B.C7,199-3,897)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 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國, B.C3,897-2,333)을 건설(建設)하였다.’ 라고 한다. ★ 분단을 강요한 국제적 냉전은 오래 전에 해체되었다. 독일과 예멘이 통일을 이룬지 20년이 넘었다. 이제 한반도의 통일을 가로막을 나라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이 싫어하고, 중국이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두 나라는 통일을 반대할 권리가 없다.
그러므로, 일본과 중국이 통일에 적극 협력하도록 할 책무는 우리에게 있다. 북한을 개방과 개혁으로 몰고 가지 못한 우리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 북한 체제 엘리트들에게 통일은 결코 보복이나 예속이 아닌 화해와 동반의 길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한과 북한의 통일은 우리 민족에게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나아가 인류 사회의 번영과 평화에 기여하는 거대한 축복이 될 것이다. ★ 2009년 09월 04일에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 사법 재판소에 간도(間道) 협약 무효 소송이 접수됐다. 간도(間道)를 되찾을 수 있는 근거를 확보했다. 2009년 09월 07일은 청.일 간도 협약이 맺어진지 100년 되는 날이다. 1905년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 체결된 1909년 09월 07일 청.일 간도 협약의 부당성을 알면서도 분단 국가 상황과 중국의 압력으로 인해 남북한 누구도 공식적인 제소를 하지 못한 채 100년을 3일 남겨놓고 달성한 쾌거였다.
100년 동안 이의 제기가 없는 영토 분쟁은 점유국에게 절대 유리해질 수 있기에 국면을 전환하는데 일대 거사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의 동북 공정에 대응하고, 고토(古土) 회복을 위한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나중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번 공식적인 소송 제기의 접수는 중대한 물증이 될 것이다. ★ 세계의 운명을 쥔 두 한국인이 있는데, 바로 반기문(潘基文) 유엔 사무총장과 송상현(宋相現) 국제 형사 재판소(ICC) 소장이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 형사 재판소(ICC) 는 집단 살해죄. 전쟁 범죄 등 국제법을 위반한 개인을 국제 사회 이름으로 처벌하기 위해 2002년 설립된 최초의 국제 형사 사법기관으로 초대 재판관으로 선출된 송상현(宋相現) 동문은 2006년 1월 다시 재선되어 현재까지 국제 형사 재판소(ICC) 재판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리비아 전범(戰犯) 카다피 대통령이 국제 형사 재판소에 회부되어 있다. 풍수지리(風水地理)로 본 한민족의 미래 : 육관 손석우는 ‘터’ 라는 책에서 “이 지구상에서도 제일 가는 그 자리, 장차 72억의 세계 인류를 통치할 위대한 지도자를 배출할 그 큰 터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산천이 빼어나서 명당자리가 많기로는 세계에서 제일이거니와 이 지구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최대의 명당이 바로 우리 강산에 응결되어 있다.” 라고 했다.
★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 사람들은 서로 관계가 무척 안 좋다. 상하이(上海) 사람들은 베이징(北京) 사람들을 "어깨에 힘만 주고 다니는 부류이다." 라고 욕하기 일쑤이다. 베이징 사람들도 상하이 사람들을 "시시하고 돈만 아는 사람들이다." 라며 깔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하이(上海) 사람들은 그들이 열심히 돈을 벌어서 베이징(北京)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고 생각한다. 난징(南京)과 상하이(上海)는 같은 강소(江蘇)성 안에 있지만, 난징(南京) 사람들은 상하이(上海) 사람들을 매우 기분나쁘게 생각한다.
난징(南京) 사람들은 "딸을 상하이(上海) 사람에게 절대 시집 보내지 않는다." 라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이다. 절강(浙江)성 항저우(杭州) 사람들 역시 상하이(上海)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한, 복건(福建)성과 광동(廣東)성 사람들은 서로 “소가 닭 쳐다보듯 한다.” 섬서(陝西)와 산서(山西), 호북(湖北)과 호남(湖南)의 이질감도 깊고 넓다. 중국의 여러 곳은 각기 지내온 역사적 과정에 차이 뿐 아니라 문화적 토양 역시 매우 크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적 이질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 몽골 사람들의 상당수는 한국과 통합을 바라고 있다. 몽골에는 바다(sea)가 없다. 그래서, 해산물(海産物)을 먹고 싶어도 해산물이 너무 귀해서 먹을 수가 없다. 그리고, 산업이 발달하지 않아서 공산품(工産品)이 귀하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과 통합하기를 원한다.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해외에 있는 나라 중에서 통합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바로 몽골뿐이다. 한국과 몽골은 과거에 피를 나눈 형제 국가였다. 몽골은 기회의 땅이고 희망의 땅인 것이다.
몽골의 엄청난 땅에 인구가 적으니 한국민들이 대거 그곳에 가서 생활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터전인 것이다. 몽골은 한국에 협조적이고 우호적인 나라이다. 그들은 한국을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고 한다. 이 말은 몽골이 외국을 보는 시각 중에서 가장 따뜻한 표현이고 가장 훌륭하다는 표현인 것이다. 한국과 가장 유사한 풍습을 가진 나라가 바로 몽골이다. 너무나 유사해서 놀라고 또 놀란다. 그래서 몽골을 한국의 태반이라고 한다.
그런 고향을 너무나 멀리 떠나온 것이 우리 민족이 아닌가. 지금 몽골은 인구가 급격히 감소를 하고 있다. 그런 인구를 채워줄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몽골이 유일하게 신뢰하는 외국은 바로 한국이기 때문이다. 몽골과 한국이 국가 통합의 길을 모색할 때가 올 것이다. ★ 장차 중국에 큰 변화가 올 것이다. 그때 소수 민족 국가들이 독립하게 되는데, 내몽고가 독립하면서 남한. 북한. 간도(間道). 연해주(沿海州). 내몽고. 몽골 연방 공동체가 구성될 것이다. 중국의 체제가 붕괴되는 대사건이 발생할 것이다. 티베트 사태 및 중국 서부의 위구르 사태는 중국의 불안한 정세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중국은 이미 수명을 다한 국가이다. 중국의 각 지역에 분리 독립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런 후, 북한은 남한에게 포괄적인 개방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남한과 북한의 통일에 관한 제안은 경제적인 필요에 따라 이뤄질 것이다.
★ 과거 우리 민족의 땅은 동북으로는 간도를 넘어 중국 본토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남한. 북한. 간도(間道). 연해주(沿海州). 내몽고. 몽골까지 아우르는 한민족 연방이 바로 통일 한국의 미래이자 한민족의 비젼이 될 것이다. 각기 독립된 자치 지역를 가지면서 경제, 사회. 문화. 군사적으로 긴밀하게 연동하는 일종의 한민족 연방이다. 간도(間道)는 길림성(吉林省). 요녕성(遼寧省)을 포함한 장백 산맥(長白山脈) 일대의 서(西)간도와 두만강 북부의 북(北)간도를 함께 지칭한다. 연해주(沿海州)는 러시아의 남동쪽 끝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말한다. ★ 한글 재단 이사장인 한갑수 박사가 미국 공군 지휘 참모 대학에 입교했을 당시, 같은 입학생인 중국 학자 서량지(徐亮之)가 한갑수 박사를 찾아와 말하기를 "한(韓)민족은 우리 중국(中國) 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中國)이 한(韓)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책들을 감추고, 중국 역사를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서량지)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의미로 절을 하겠으니, 받아 주시오! ” 라고 말하며, 큰 절을 올렸다. ★ 세계 최초의 문자인 배달(倍達 BC 3,898-2,333)의 녹도문자(鹿圖文字)는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시대에 이르러 제3대 단군이신 단군 가륵(嘉勒) 2년(BC 2,181년)무렵에 가림토(加臨土) 문자로 계승 발전되고, 고조선(古朝鮮)의 가림토(加臨土) 문자는 조선(朝鮮) 시대의 세종 대왕에 의해 훈민정음(한글)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한자(漢字)의 시조로 불리는 사람이 창힐(BC 28세기-BC 27세기)이다. 창힐(BC 28세기-BC 27세기)은 동이족(東夷族)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14대 치우 천황(BC 2,707년 즉위) 시대의 제후이며, 배달국의 녹도문자(鹿圖文字)를 중국에 전한 사람이다. 창힐(倉힐)은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의 자부 선생으로부터 녹도문자(鹿圖文字)를 배웠고, 녹도문자(鹿圖文字)를 계승 발전시켜 창힐 문자를 창안했다. 그리고 창힐은 창힐 문자를 중국에 널리 보급시켰다. 이로써 중국에 최초 문자가 생기게 된 것이다. 창힐 문자는 다시 은(殷 BC 1,600-1,046)나라 시대에 이르러 갑골문자(甲骨文字)로 발전했다. 그런데, 은(殷)나라 왕실의 기자(箕子)가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으로 망명하면서 갑골문자를 고조선으로 들여왔다.
그래서,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말엽에 녹도문자, 가림토 문자, 갑골문자를 함께 사용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갑골문자(甲骨文字)의 사용이 증가하게 되었고, 반면 녹도문자(鹿圖文字)와 가림토(加臨土) 문자는 점차 소멸되어 갔다. 그리고, 은(殷)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는 주(周)나라의 대전(大篆), 진(秦)나라의 소전(小篆)을 거쳐 한조(漢朝) 때 다시 한자(漢字)로 발전하였다. ■ 불가리아(Bulgaria) 왕국은 부여족(夫餘族)이 건설했다! 신채호 선생은 한민족(韓民族)을 부여족(夫餘族)이라고 하였다. 부여(夫餘 BC 239-58)는 고조선(古朝鮮, B.C2,333-238) 다음으로 만주(滿洲)를 중심으로 약 1000여년간 존속된 나라이다. 백제 성왕이 백제의 국호를 잠깐 남부여(北夫餘)로 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북부여(北夫餘)라고도 부른다.
부여(夫餘) 멸망 이후, 부여족(夫餘族)의 일부인 가(加)씨족은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하여 중앙 아시아의 카스피해(Caspian Sea)와 흑해(Black Sea) 사이에 도착했으며, 5-7세기 초까지 이 지역에 거주했다. 이때부터 서양사에서는 부여족(夫餘族)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씨족이라는 뜻이다. 635년 불가(Bulghar)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 연합을 결성하여 흑해(Black Sea) 연안에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쿠브라트(Kubrat)의 둘째 아들은 북으로 이동하여 불가강 즉 지금의 카스피해(Caspian Sea) 볼가(Volga)강 유역에 고추 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으며, 현재 타타르(Tatar) 공화국이 되었다. 그들의 언어와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 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되어 한국인의 모습이다. 쿠브라트(Kubrat)의 셋째 아들은 서방 흑해(Black Sea) 연안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Balkan) 반도에 도착하였으며, 681년의 비잔틴 로마(Roma)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발칸 반도에서 로마군을 모두 축출하고 그 해에 불가리아(Bulgaria) 왕국을 건국했다. 불가리아(Bul+garia)는 불가족의 땅(Bul+garia)이라는 뜻이다.
불가족은 귀족 신분이 되어 보야(Boyar)라고 불렸는데, 보야(Boyar. 부여의 변음)는 그들이 부여족임을 뜻하며, 그들은 슬라브(Slav)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그들은 단군(檀君)에게 제사를 올리고, 산 이름을 발칸 산(밝안산, 白山 고대 한민족이 제천 의식을 행한 산)으로 정하였다. 발칸 산은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붙어 있는 높지 않은 산이다.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등 다수의 지명이 남아 있다. 불가리아(Bulgaria)는 11세기부터 약화되어 도리어 비잔틴(Byzantine) 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속주(屬州)로 떨어졌다. 그 사이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Slav)족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Slav)족 모습을 많이 갖게 됐으며, 12세기 후반 다시 독립하였다. 불가리아(Bulgaria)의 언어와 문법 구조도 한국어와 비슷하다. 전통 문화와 전통 양식(정월 달집 놀이, 굿거리 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한 몽고 반점(갓난 아기 엉덩이의 반점)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몽고 반점(蒙古斑點)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Bulgarian)뿐이다. ■ 헝가리.터키.핀란드의 기원은 고구려 ★ 헝가리(Hungary)와 훈족(Hun族) 및 고구려(高句麗) 미국의 다큐멘터리 채널 디스커버리(Discovery)에서 방영한 내용인데, 외국 특히 독일(獨逸)에서는 훈족(Hun族)이 한국의 고구려(高句麗)에서 뻗어나온 세력으로 교육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선 훈족(Hun族)을 이민족(異民族) 취급을 하고 있다. 한국 역사학계는 친일파(親日派)들이 주류(主流)로 대접받았고, 식민지(植民地) 사관(史觀)에 의해 우리의 역사는 힘없고 약해빠진 쓰레기 역사라고 교육시키는 현실이니, 우리 나라의 역사에 자긍심을 키우기 보다는 패배주의(敗北主義)에 빠지게 하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夫餘 BC 239-58), 고구려(高句麗. BC 37-AD 668), 흉노족(匈奴族), 훈족(Hun族)은 거의 같은 계열이다. 서양인들이 말하는 훈족(Hun族)은 고구려(高句麗) 민족을 말한다.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단군(檀君) 제왕은 후국(侯國)에 왕족을 보내거나 부족장을 제후(諸侯)로 임명해 통치했다. 이 때문에 후국(侯國) 호칭에는 단(檀)씨가 많았다. 예컨대, 흉노(匈奴)의 왕 호칭은 단후(檀后), 선비족의 왕은 단석괴(檀石槐), 유연은 대단(大檀) 등이었다. 흉노족(匈奴族)의 기원은 북방 초원에서 배달(倍達. BC 3,898-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제후국(諸侯國)들이 몽골 고원 및 중앙 아시아 일대를 떠돌며 형성되었다. 흉노(匈奴)라는 글자 뜻은 흉악한(匈) 오랑캐 노예(奴)라는 것인데, 중국인들은 훈족(Hun族)에 대한 열등감과 악(惡)감정을 곁들여 그들의 이름을 오랑캐 보다 더 폄하하여 흉노(匈奴)라고 하였다. BC 318년 무렵 흉노족(匈奴族)은 중국 전국시대의 진(晉). 한(韓).위(魏).조(趙) 나라를 공격했으며, 이에 중국내의 여러 나라들은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각 성벽(城壁)을 쌓았는데, 이것이 뒷날에 진시황(秦始皇)의 만리장성(萬里長城)으로 완결되었다. 흉노족(匈奴族)은 먼저 BC 54년 동서로 갈린다. 그 후, 서기 48년에 남북으로 갈리고 남흉노는 후한에 항복하고, 북흉노는 2세기 중엽에 중앙 아시아 초원 지대로 이동하였다. 환단고기(桓檀古記) 기록에 따르면, 흉노족(匈奴族)은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의 진한(辰韓). 번한(番韓). 마한(馬韓) 중 번한(番韓)에 속한 북방 동이족(東夷族) 계통이며,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의 제후국(諸侯國)이었다. 또한 중앙아시아 투르크족을 지배한 투르크족의 지배 계급이었다. 흉노족(匈奴族)은 나중에 고구려(高句麗) 민족과 연합하여 훈족(Hun族)을 형성하였고, 훈족(Hun族)은 남으로 이동하여 돌궐족(突蹶族)과 서로 연합하면서 투르크족(Turk族)을 형성하였다. 그래서, 흉노족(선비족)이었던 신라(新羅) 김씨 왕족들이 중앙 아시아 투르크족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중앙 아시아인들(투르크인들)이 경주(慶州)에 많이 거주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고구려(高句麗) 민족은 서기 4세기 초 무렵, 극동 아시아에서는 수년동안 기온이 평시보다 떨어지는 이상(異常) 기온 현상이 발생하였는데, 그들은 이상 기온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들은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중앙 아시아의 흉노족(匈奴族)의 잔류 세력을 규합하였고 훈족(Hun族)을 형성하였다. 훈족(Hun族)은 결국 4세기 중엽에 알타이 산맥(Altai Mountains)을 넘어 유럽으로 이동하였으며, 훈족(Hun族)의 일부는 우랄 산맥(Ural Mountains)을 건너 에스토니아(Estonia)를 경유하여 바다를 통해 핀란드(Finland)로 건너가 8세기 무렵에 이 지역에 정착하였다. 고구려(高句麗) 민족이 서양 역사 무대에 훈족(Hun族)의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다. 훈족(Hun族)은 남으로 이동하여 돌궐족(突蹶族)과 서로 연합하면서 투르크족(Turk族)을 형성하였고, 552년 지금의 알타이(Altay) 산기슭에 투르크(Turk) 제국을 건설하였고 나중에 서방(西方)으로 이동하여 터키(Turkey)가 되었다.
알타이(Altay) 어족(語族)은 지금의 알타이(Altay) 산기슭에 고구려(高句麗) 민족이 세운 바로 훈족(Hun族)의 투르크(Turk) 제국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민족의 뿌리인 배달(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夫餘 BC 239-58), 고구려(高句麗. BC 37-AD 668)의 언어와 문자 체계가 널리 중앙 아시아 일대로 퍼져 나간 것이다. 서양인들의 훈족(Hun族)에 대한 두려움은 엄청났다. 고구려(高句麗) 민족의 기마 전투와 로마(Roma)의 서양식 전투는 전혀 차원이 달라서 그들은 번번히 저항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징기스칸(Genghis Khan) 이전에 유럽 지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소수 영웅 집단이 바로 고구려(高句麗. BC 37-AD 668) 민족에서 기원한 훈족(Hun族)이었다.
훈족(Hun族)은 4세기 중엽에 알타이 산맥(Altai Mountains)을 넘어 유럽으로 이동하여 서기 375년 다뉴브 강(도나우강) 일대의 헝가리(Hungary) 지역과 흑해(Black sea) 북부 지역에 그들의 왕국인 훈(Hun) 왕국을 세웠으며 오늘날 헝가리(Hungary)가 되었다. 헝가리(Hungary)라는 국명은 훈(Hun) + 땅(gary)의 합성어이다. 훈족(Hun族)이 375년 흑해 연안에 훈(Hun) 왕국을 세우자 그곳에 살던 게르만(germane) 민족이 훈족의 압박을 피하여 동로마로 이주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게르만(germane) 민족의 대이동이다. 게르만 민족의 이동은 결국 로마(Roma) 붕괴(崩壞)의 발단이 되었다. ★ 터키(Turkey)와 돌궐족(突蹶族) 및 고구려(高句麗)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은 다수의 부족을 후국(侯國) 제도를 통해 통치했다. 제1형(직할) 후국은 부여(夫餘). 옥저(沃沮). 구려(句麗). 예맥(濊貊). 숙신(肅愼) 등이다. 제2형(변방) 후국은 돌궐(突蹶). 오손(烏孫). 선비(鮮卑). 유연(柔然). 동호(東胡). 오환(烏桓). 해(奚). 산융(山戎). 실위(室韋. 몽골) 등이 포함된다.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숙신(肅愼)족은 만주 북동 방면에 거주하였는데, 나중에 말갈족(靺鞨族)으로 호칭되었다. 이들 말갈족(靺鞨族)은 베링 해협(Bering strait)을 건너 아메리카(America)로 건너가 인디언(Indian) 부족을 형성하였다. 중앙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피라미드(pyramid) 문명을 건설한 민족은 배달(倍達. BC 3,898-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후예들이다.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오손(烏孫)족은 서방으로 이동하다가 강거(康居)족과 융합하여 카자흐(Kazakh) 민족을 형성하였으며, 오늘날 카자흐스탄(Kazakhstan)이 되었다.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돌궐족(突蹶族)은 후국(侯國)의 형태로 있었지만, 고조선(古朝鮮)이 멸망한 후에는 부여(夫餘 BC 239-58) 및 고구려(BC 37-AD 668)와 혈맹 관계에 있었다. 고구려(BC 37-AD 668)는 돌궐(突蹶)과 동맹 관계를 통하여 중국의 수(隋)(581-618), 당(唐)(618907)을 방어해 낼 수 있었다.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夫餘 BC 239-58). 고구려(BC 37-AD 668) 계열의 부족들이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쪽으로 이동하여 고구려(高句麗) 민족인 훈족(Hun族)과 함께 돌궐족(突蹶族)이 연합하여 투르크족(Turk族)을 형성한 후, 552년 알타이 산(Altai Mountain) 기슭에 투르크(Turk) 제국을 세웠다. 투르크(Turk) 제국은 나중에 서방(西方)으로 이동하여 1299년 오스만 투르크(Osman Turk. 1299-1922) 제국이 되었고, 결국 오늘날 터키(Turkey)가 되었다. 한국과 언어 구조가 동일한 어족을 알타이어족(Altay language)이라 하는데, 알타이 산(Altai Mountain) 기슭에 세워진 투르크(Turk) 제국이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돌궐족(突蹶族)과 고구려(高句麗) 민족인 훈족(Hun族)이 중앙 아시아를 이동하면서 많은 지역에 문화를 남겼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돌궐(突蹶)은 서기 580년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뉘고, 동돌궐은 당(唐)의 회유 정책에 굴복하다가 멸망하였다. 그 후 돌궐족은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면서 우즈베크(Uzbekistan). 타지크(Tajikistan). 투르크멘(Turkmenistan). 위구르(Uyghur). 핀족(핀란드) 등 다수의 국가와 민족으로 분화되었다. 터키(Turkey)는 우리 한국(韓國)을 형제국(兄弟國)으로 역사 교과서에 기록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들의 조상인 투르크(Turk) 제국이 돌궐족(突蹶族)과 고구려(高句麗) 민족인 훈족(Hun族)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1950년 6.25 한국 전쟁 당시 한국전 참전 국자 중에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군인을 한국에 파병시킨 나라가 바로 터키(Turkey)이다.
2002년 월드컵(world cup) 축구 경기 때에도 그들은 한국이 축구 경기에 출전할 때마다 우리 한국(韓國)을 응원했었다. 고구려(高句麗)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들이 돌궐(突蹶)로 귀속해 들어갔는데, 돌궐(突蹶)은 특히 고구려 유민(遺民) 가운데 여성을 뽑아 종교의 수장(首長)인 제사장(祭司長)에 임명하였다. 이를 탕구르(당굴래=단군)라고 했는데, 고조선 시대 제사장의 수장(首長)을 단군(檀君)이라고 한 것과 같은 개념의 말이다. 한국인이 바이칼호(Baikal lake), 알타이 산맥,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로 왔다는 가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가설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상호 교류는 있었지만, 역사적 진실은 반대로 배달(倍達. BC 3,898-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夫餘 BC 239-58), 고구려(高句麗. BC 37-AD 668) 문명이 서방으로 이동한 것이다. 고조선(古朝鮮) 국가 붕괴로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서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문명 후예들이 서방으로 이동함에 따라 유럽과 중앙 아시아 대륙의 고대(古代) 역사가 격동하게 된 것이다. ★ 핀란드(Finland)와 훈족(Hun族) 및 고구려(高句麗) 핀족(Finns)은 훈족(Hun族) 계열의 기마 민족이다. 고구려(高句麗) 민족은 서기 4세기 초 무렵 이상(異常) 기온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할 때, 중앙 아시아의 흉노족(匈奴族)의 잔류 세력을 규합해서 훈족(Hun族)을 형성하였다. 훈족(Hun族)의 일부는 4세기 중엽에 알타이 산맥을 넘어 흑해(Black sea) 연안의 유럽으로 이동하여 게르만(germane) 민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후, 오늘날 헝가리(Hungary)가 되었으며, 일부는 우랄 산맥(Ural Mountains)을 건너 에스토니아(Estonia)를 경유하여 바다를 통해 핀란드(Finland)로 건너가 8세기 무렵에 이 지역에 정착했다. 핀란드(Finland)의 핀족(Finns)은 원래는 아시아인들처럼 검은 눈. 검은 머리였다. 하지만, 14세기 중엽부터 덴마크. 스웨덴. 네덜란드 등 바이킹족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잇따라 핀란드를 지배하면서 혼혈(混血)이 생기기 시작해 머리 색깔은 짙은 금발로 바뀌고, 겉모습 역시 지금의 북부 유럽인들처럼 변했다. 동양인과 서양인이 결혼해서 3대만 내려가면 유전적으로는 동양인의 형질이 더 많이 남아 있게 되지만, 동양인의 외관과 흔적은 사라진다. 핀란드(Finland) 사람들은 한국(韓國) 민족과 핀족(Finns)이 같은 계통이고, 핀족 전통 언어와 한국어가 문장 구조도 비슷하며, 핀란드의 핀족, 터키의 돌궐, 헝가리의 훈족, 흉노 위구르. 몽골 등등이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Ural Altay language) 계통으로 같은 뿌리이며 형제국(兄弟國)이라고 역사 시간에 배운다고 한다. 우랄 알타이 어족(語族)은 돌궐족. 흉노족. 터키족. 몽고족. 만주족 등 알타이어 계통과 헝가리어. 핀족(핀란드). 에스토니아어. 위그르족 등의 우랄어 계통으로 나뉘어 진다. 핀란드(Finland)의 핀족(Finns)은 우랄 알타이 어족(語族)에 속하는 인종이다. 언어는 현재 핀란드어(Finland language)를 사용하며, 현재도 핀란드 북쪽에서는 검은 눈에 검은 머리를 가진 종족들을 흔히 볼 수 있다. ★ 근대(近代) 역사에서 500년 이상 지속된 왕조(王朝)는 조선(朝鮮)밖에 없다. 서구에서는 신성(神聖) 로마(Roma) 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帝國)이지 왕조(王朝)가 아니다. 오스만 투르크(Osman Turk) 제국이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는데, 그것도 제국(帝國)이지 왕조(王朝)는 아니다. 에스파냐(España) 왕국이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España) 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Napoleon)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가 에스파냐(España)에 가서 왕을 했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이상 가지를 못했다. 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 지속된 것은 조선(朝鮮) 딱 한 나라 밖에는 없었다. 중세(中世) 역사에서 고려(高麗)가 500년 갔다. 고대(古代) 역사에서 부여(夫餘) 1000년, 고구려(高句麗) 700년, 백제(百濟) 700년, 신라(新羅) 1,000년 갔다. 외국에서는 러시아(Russia)에 류리크(Rurik. 862-1598) 왕조가 하나 있었고, 동남 아시아에 크메르(Khmer. 802-1431) 제국이 하나가 있었으며, 이디오피아(Ethiopia)에 악숨 (BC 900년대 중반-1974) 왕조가 하나 있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한국은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이다.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다. 왜 그럴까? 정치적인 합리성.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한 것이다. 중국(中國)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는 400여년 정도밖에 안 된다. 한(漢) 나라 401년(BC202-AD220), 당(唐)나라 289년(618-907), 송(宋)나라 319년960-1279), 원(元)나라 364년(1271-1635), 명(明)나라 276년(1368-1644) 청(淸)나라 276년(1636-1912) 등이다.
★ 영국의 줄리어스 노리치(Julius norwich) 경은 그의 저서 '지중해 5000년 문명사'에서 “앞으로 로마 반도와 유사한 동양의 반도에서 새로운 문명이 시작될 것을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세계 2대 사조인 신본주의(히브리사상)와 인본주의(헬라사상)가 결집되어 있고, 기독교의 재림주. 불교의 미륵불. 유교의 진인이 동방의 나라로 온다고 했으며, 우리 민족의 예언서인 격암유록. 정감록에서는 정도령이 한국에서 나온다고 했다.
■ 영암(靈巖)에서 미국 것 보다 5배의 큰 바위 얼굴 발견 2009년 01월, 전남 영암(靈巖) 월출산 구정봉(九井峯)에서 큰 바위 얼굴이 발견되었다. 영험한 바위라는 뜻의 영암(靈巖) 지역에서 미국(美國)의 큰 바위 얼굴을 5배 능가하는 규모의 큰 바위 얼굴이 발견된 것이다. 2003년 미국(美國)의 큰 바위 얼굴은 갑자기 붕괴(崩壞)되었고, 그로부터 6년후인 2009년 01월 전남 영암 월출산에 큰 바위 얼굴이 미국의 큰 바위 얼굴을 대신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동안 미국의 뉴햄프셔주 큰 바위 얼굴은 높이 13미터의 큰 상징물로서 200년 가까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미국의 위대한 지도자 탄생을 상징해 왔었다. 매년 찾는 관광객 수가 100만명이었다. 그런데, 무슨 징조일까? 미국(美國)의 큰 바위 얼굴은 갑자기 붕괴(崩壞)되었고, 대신 한국(韓國)에는 그것의 5배 크기의 큰 바위 얼굴이 발견된 것이다. 전남 영암(靈巖) 지역의 전설에 의하면, 언젠가 월출산(月出山)에 큰 바위 얼굴이 나타나게 되면, 그 기운으로 세상을 이끌어 갈 위대한 인물이 출현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또한, 한국(韓國)은 그로부터 아시아의 등불이 되어 장차 인류 평화를 위해 큰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9,200년 배달민족 황.제.왕 계표 (자료출처 : 역사 광복 운동본부) (1) 환국(桓國) 환인계표
18대 1565년 (BC3897 ∼ BC2333)
47대 2096년(BC2333 ∼ BC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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