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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 대한 톰 라이트의 해설
‘Why doesn’t God do something?’ That is perhaps the most frequent question that people ask Christian leaders and teachers – and those of some other faiths, too. Tragedies happen. Horrific accidents devastate lives and families. Tyrants and bullies force their own plans on people and crush opposition, and they seem to get away with it. And sensitive souls ask, again and again, why is God apparently silent? Why doesn’t he step in and stop it? These parables are not a direct answer to the question, and probably no direct answer can be given in this life. But they show, through the various different stories, that God’s sovereign rule over the world isn’t quite such a straightforward thing as people sometimes imagine.
“왜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까?”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사들에게, 그리고 믿는 사람들에게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한다.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다. 끔찍한 사고가 수 많은 생명과 가족을 무너뜨린다. 독재자와 악당들이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백성들을 짓밟아도 아무 일도 그들에게 생기지 않는다. 또한 어떤 예민한 사람은 이렇게 되묻기도 한다, 왜 하나님은 잠잠하시기만 하는가? 왜 일어나서 이런 일을 막지 않으시는가? 위의 비유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다. 아마도 이생에서 어떤 대답도 직접적으로 대답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들이 보여주는 바는, 다양하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세계를 통치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때때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즉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Would people really like it if God were to rule the world directly and immediately, so that our every thought and action were weighed, and instantly judged and if necessary punished, in the scales of his absolute holiness? If the price of God stepping in and stopping a campaign of genocide were that he would also have to rebuke and restrain every other evil impulse, including those we all still know and cherish within ourselves, would we be prepared to pay that price? If we ask God to act on special occasions, do we really suppose that he could do that simply when we want him to, and then back off again for the rest of the time?
사람들이 정말로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하신다면 좋아할까? 즉, 하나님이 세상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다스리셔서,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달아보시고, 만약 처벌이 필요하다면 즉시 심판하신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의 기준으로 달아보신다면? 인종청소와 같은 일에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멈추게 하시는 대가로, 모든 다른 악한 충동이나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 마음에 품고 있는 충동까지도 포함하여, 꾸짖으시고 제한하신다면,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어떤 경우에 하나님으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해 달라고 부탁드릴 때,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가 주님께 원하는 바를 행하시고 나서 그 이후에는 손을 떼신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These parables are all about waiting; and waiting is what we all find difficult. The farmer waits for the harvest-time, watching in frustration as the weeds grow alongside the wheat. Not only the farmer, but also the birds, wait for the tiny mustard seed to grow into a large shrub. The woman baking bread must wait for the leaven to spread its way through the dough until the whole loaf is mysteriously leavened. And that’s what God’s kingdom is like. Jesus’ followers, of course, didn’t want to wait. If the kingdom was really present where Jesus was, coming to birth in what he was doing, then they wanted the whole thing at once. They weren’t interested in God’s timetable. They had one of their own, and expected God to conform to it. Notice, in particular, what the servants say about the weeds.
이 비유들은 모두 기다림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기다림은 우리에게는 힘들다는 것이다. 농부는 추수 때를 기다린다. 가라지가 알곡 사이에서 자라나는 모습을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농부 뿐 아니라 새들도,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물로 자라기를 기다린다. 빵을 굽는 여인은 누룩이 가루 전체에 퍼져 반죽 전체가 발효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물론, 기다리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나라가 진짜로 예수님이 계시던 곳에 이루어진다면, 주님이 행하시던 일이 시작되었다면, 그들은 그 전체가 단번에 일어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계획표를 가지고, 하나님이 거기에 맞추시기를 기대했다. 특별히, 종들이 가라지에 대하여 한 말을 주목해서 보라.
They want to go straight away into the cornfield and root out the weeds. The farmer restrains them, because life is never that simple. In their zeal to rid the field of weeds they are very likely to pull up some wheat as well. Did Jesus, perhaps, have an eye here on the revolutionary groups of his day, only too ready to step into God’s field and pull up what looked like weeds? There were many groups, including some of the Pharisees, who were eager to fight against pagans on the one hand and against compromised Jews on the other. These ‘servants’ may have intended to do God’s will. They were longing for God to act, and were prepared to help him by acting themselves. But part of Jesus’ whole campaign is to say that that the true kingdom of God doesn’t come like that, because God himself isn’t like that. At the heart of the parable of the weeds and the wheat is the note of patience – not just the patience of the servants who have to wait and watch, but the patience of God himself.
그들은 즉시 밭에 들어가서 가라지들을 뽑아버리기를 원했다. 농부는 그들을 말렸는데, 그 이유는 삶이란 결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밭에서 가라지를 뽑아버리려는 그들의 열심으로 그들은 아마 다른 알곡도 뽑아버릴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예수께서는 당시의 혁명당원들을 바라보신 것 아닐까? 그들은 하나님의 밭에 들어가 가라지처럼 보이는 것을 뽑아버리려는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으니까. 바리새파 어떤 사람들을 포함하여 많은 그룹이 한편으로는 이교도들을 대항해서 싸우고자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타협하는 유대인들과도 다투고 있었다. 이런 ‘종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원했으며, 주님을 도와 함께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부분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의 진정한 나라는 그런 식으로 오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의 핵심은 인내를 강조하는 것이다. 들판을 바라보고 기다려야 하는 농부들의 인내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인내다.
God didn’t and doesn’t enjoy the sight of a cornfield with weeds all over the place. But nor does he relish the thought of declaring harvest-time too soon, and destroying wheat along with weeds. Many Jews of Jesus’ time recognized this, and spoke of God’s compassion, delaying his judgment so that more people could be saved at the end. Jesus, followed by Paul and other early Christian writers, took the same view. Somehow Jesus wanted his followers to live with the tension of believing that the kingdom was indeed arriving in and through his own work, and that this kingdom would come, would fully arrive, not all in a bang but through a process like the slow growth of a plant or the steady leavening of a loaf. This can sometimes seem like a cop-out today, and no doubt it did in Jesus’ day as well.
하나님은 밭에 가라지가 곳곳에서 뒤덮이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지 않으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제 곧 추수 때가 온다고 선포하면서 알곡과 가라지를 멸망하게 할 생각을 달가워하시는 분도 아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의 많은 유대인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는데, 심판의 연기는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말에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던 바울, 그리고 다른 초기 기독교 작가들도,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든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로 하여금 이 긴장 가운데서 살기를 바라셨다. 즉, 자신이 하시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으며, 그 나라는 장차 올 것이고 마침내 완전히 도달하는데, 단번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 천천히 자라나듯이 또는 누룩이 차근차근 발효하듯이 온다는 것이다. 이것인 때때로 오늘날에도 책임회피의 구실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아마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Saying that God is delaying his final judgment can look, outwardly, like saying that God is inactive or uncaring. But when we look at Jesus’ own public career it’s impossible to say that God didn’t care. Here was one who was very active, deeply compassionate, battling with evil and defeating it – and still warning that the final overthrow of the enemy was yet to come. We who live after Calvary and Easter know that God did indeed act suddenly and dramatically at that moment. When today we long for God to act, to put the world to rights, we must remind ourselves that he has already done so, and that what we are now awaiting is the full outworking of those events. We wait with patience, not like people in a dark room wondering if anyone will ever come with a lighted candle, but like people in early morning who know that the sun has arisen and are now waiting for the full brightness of midday.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을 연기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겉보기에는, 하나님은 일하지 않으시고 무관심하신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무관심하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매우 활동적이고 깊은 연민을 가지고 악과 싸우시고 그것을 무찌르시는 분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분은 원수들을 타도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여전히 경고하신다. 갈보리와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즉 주님의 죽으심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나님이 그 날에는 갑작스럽고도 극적으로 행하실 것을 알고 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셔서 세상을 바로잡으시기를 갈망하고 있는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행하고 계시며, 우리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 일들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 우리는 캄캄한 방에서 누군가가 양촛불을 들고 오지나 않을까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태양이 솟아나서 한낮의 완전한 밝음이 올 것을 알고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기다린다.
참고: Wright, Tom. Matthew for Everyone: Chapter 1-15, Part 1 (pp. 168-170). SPCK. Kindle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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