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도 이루는 법을 알면, 코풀기 보다 쉽다
방언공사는 원기3년 음력 4월에 시작하여
만 1년 만인 이듬해 음력 3월26일에 3만여 평을 준공했다.
이는 소태산대종사와 조합원들의 혈심 노력한 결과로 새 회상의 기초가 되었다.
어려움 속에서 소태산대종사를 믿는 한 마음으로 별스런 장비 하나 없이 바다를 막고 나자
기념비를 세우자는 의견에 모두 동의하였으나 비용이 없었다.
이때 유건이 옥녀봉 기슭의 바위를 가리키며
"저 바위에 양회(시멘트)를 바르고 거기에 제명을 해 두면 몇 백 년은 갈 것 아니냐?"고
제안하여 채택됐다.
그리하여 시멘트를 옥녀봉 기슭의 바위에 바르고 김광선이
'靈光 白岫 吉龍 干潟地 兩處防堰組合
設始員/朴重彬
李仁明/ 朴京文/ 金成燮/ 劉成國
吳在謙/ 金聖久/ 李載馮/ 朴漢碩
大正 七年 四月 四日 始
大正 八年 三月 二六日 終'
이라 제명하여 방언공사 기념비를 조성했다.
이때는 법명이 없었던 때라 8인의 이름을 본명으로 제명했다.
수로(현 보은강)를 중심으로 언답이 양쪽에 있다고 해서 '양처방언(兩處防堰)'이라 부르고,
주민들은 이 간척답을 '구호농장'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후에 '정관평'이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방언에 정신과 육신과 재력을 합하여 전문적으로 노력한 사람은
소태산대종사와 8인 조합원이거니와 그 외에도 직접 혹 간접으로 후원한 사람이 많았다.
그들 중 특별한 후원자는 소태산대종사의 모친 유정천과 부인 양하운,
소태산대종사의 큰외삼촌 유기만, 김영철, 소태산대종사의 자형 서기채, 김광선의 부인 신정랑,
신정랑의 조카 신정권, 이원화, 김기천의 부인 김순천, 이재철의 모친 김화옥,
박동국의 양부 박영환, 길룡리 사람 김명랑, 군서면 도양죽 새터 사람 신연숙,
이재풍의 육촌동생 이동안 이었다.
제방축조 뒤에도 정산종사의 부친 송벽조가 경제적 지원을 하였고,
원기6년 수문공사 시에는 전주의 김동순이 경제적 보조를 하였으며,
원기11년에는 경성회원 이공주가 방언공사 시에 남은 빚을 갚아 주었다.
방언공사가 끝난 후에도 조합원의 노력과 고생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약한 힘으로써 공사는 마쳤으나 제방이 견고하지 못하고
겸하여 4∼5년간은 해독(海毒)이 남아있어 손실을 당하였으나
오직 신성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제방도 잘 보호하여 완전한 토지로 만들어 갔다.
제방축조공사가 마무리 되어 방언 일이 준공되자
조합원들은 앞으로 공부할 것을 서로 걱정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평지에 태산을 쌓는 것 같이 어려운 생각이 들더니,
이제 이 만큼 되고 보니 방언은 오히려 쉬운 일이나
앞으로 도(道) 이룰 일은 얼마나 더 어려울꼬."
이 말을 들은 소태산대종사가 말했다.
"그대들이 지금은 도 이루는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러한 말을 하거니와,
알고 보면 코풀기보다 쉽고 썩은 새끼줄을 끊기보다 더 쉬운 일이니,
그 넉넉하고 한가한 심경이 어찌 저 언 막는 것 같이 어렵겠는가."
조합원들은 '코 풀기보다 쉽고 썩은 새끼 끊기보다 쉽다'는 말에 용기를 얻어 자신감을 가졌다
사진; 옥녀봉 기슭 제명바위.
사진; 정관평 재방언공사 기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