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왕신문화예술촌
왕신리는 포항에서 경주로 가는 7번국도변의 강동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형산강을 건너 경주보문단지로 질러가는 길에서 만나는 첫 번째 마을이다. 골목마다 고기 굽는 냄새로 허기를 부추기는 화산불고기단지와 연접한 시골의 모습을 그대로 지닌 부락이다. 공장들이 비집고 들어서고, 골프장, 체험농장들이 듬성듬성 들어와 현대적 농촌풍경이 그대로 드러나는 마을이다.
이런 경주 왕신리에 미술과 체육, 문학인들이 입주하면서 예술촌이 조성되고 있다. 전통 된장, 고추장을 만들어 판매하는 종갓집까지 들어서면서 종합예술체험마을로 단단히 변신 중이다. 찾는 발길이 늘어나 마을진입로가 가끔 몸살을 앓는다. 덩달아 주변지역의 체험농장과 식당가도 손님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모습이다.
왕신문화예술촌은 번잡한 도로에서 계곡을 따라 꼬불꼬불한 길로 한참 들어와 숲 냄새 진하게 풍기는 산중턱에 예술가들이 하나 둘 집을 지으면서 형성되고 있다. 진정한 쉼을 찾는 사람들은 마음의 안식을 구한다. 마음의 안식이란 결국 자신이 궁극적으로 치닫는 곳으로 향하는 이상을 좇아 채우는 일이 으뜸일 것이다. 몸의 휴식으로 쉼을 구하는 것은 일시적인 작은 평안이 될 뿐, 진정으로 기쁨을 얻는 쉼은 정신까지 맑게 하는 예술이라 하겠다.
왕신예술촌은 보고 즐기며, 그리거나 읽으며 직접 예술을 체험하는 예술인이 되어보는 친자연적인 예술공간이다. 진정한 쉼, 힐링을 위해 왕신리를 찾는 이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더위를 이겨본다.
◆왕신리 예술체험
왕신리는 개울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산 속의 조용한 마을이었다. 마을 앞으로 도로가 생기고 공장이 들어서면서 시끄러운 일들이 가끔씩 생기고 있다. 그러나 계곡으로 깊숙이 좁은 길이 생기고 한적한 터에 예술인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예술촌으로 형성되는 부락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예술촌은 왕신저수지 하류에서 숲골 계곡으로 1㎞ 정도 들어가서 형성된 왕신1리 자연부락이다.
왕신리 마을 입구 왕신문화예술촌 입간판에 솟대처럼 다양한 문화예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걸려있다. ‘왕신문화예술촌’, ‘여양진씨 동찬재’, ‘송담갤러리’, ‘갤러리 숲’, ‘책 읽는 사람들 북카페’, ‘STA이병구 테니스아카데미’, ‘붓다의 그늘아래서’ 등의 길 안내 현판이 시선을 끈다.
예술촌 좁은 논둑길을 꾸역꾸역 찾아드는 사람들은 분명 예술에 대한 향기를 찾는 사람들일 것이다.
밤나무가 우거진 계곡 안쪽에 ‘갤러리숲’이라는 간판과 ‘책 읽는 사람들 북카페’ 나무현판이 친환경적인 인상을 풍긴다. 예술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박용 화백이 운영하는 갤러리다. 숲갤러리는 크고 작은 3개의 전시실을 상시 오픈하고 있다. 7월말 박용 작가의 14회째 개인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시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숲에서는 전시뿐 아니라 창작활동과 다양한 아카데미, 예술활동이 전개된다. 작가들로 구성된 예술인들의 소모임과 세미나가 수시로 열리면서 열린 창작공간이 된다. 최근에는 펜화를 그리기 위해 예술인들이 숲갤러리에서 아카데미를 열고 뜨거운 여름에 창작열기를 불태우고 있다.
2층 책 읽는 사람들 북카페는 앞뒤로 확 트인 전망이 낭만적인 공간으로 한 번 찾은 사람은 또 찾아들게 하는 중독성을 부여한다. 책장 사이에 넓은 탁자를 두어 예술인들의 토론장이 되기도 한다. 문학서적과 예술인들이 즐길법한 서적들이 동쪽벽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한쪽벽면은 펜화와 묵직한 수채화가 갤러리임을 일깨운다. 커피는 아메리카노, 카페라떼를 비롯 8가지 종류를 갖추고 있는 셀프 숍이다. 대신 착한 가격으로 운영되는 예술인 맞춤형 카페다.
‘송담갤러리’는 숲갤러리 입구 언덕에 소공원으로 꾸며진 정원을 앞에 두고 양지바른 곳에 조성되어 최근 본격 오픈했다. 송담 박종현 작가가 문인화 대작을 전시하고, 문인화와 서예 등의 예술아카데미를 운영하며 다양한 체험적 예술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여양진씨 동찬재가 예술촌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전통 된장, 고추장, 간장맛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전통의 맛을 보급하고 있다. 동찬재 한켠에 줄을 지어 앉은 항아리들은 이색적인 풍경으로 향수를 부추긴다. 또 STA이병구 테니스 아카데미는 공기 맑은 곳에서 격렬한 스포츠로 에너지를 충전시켜주는 에너자이저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예술촌에는 불교미술, 성악, 서각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 순차적으로 속속 입주를 서두르고 있다. 망치소리, 집을 지을 터를 고르는 포크레인 소리도 매미소리와 어울려 예술적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준비된 공간이 왕신문화예술촌이다. 누구나 찾아가면 예술인이 될 수 있다. 시원하게 트인 창을 통해 자연을 감상하거나 멍 때리기에 빠지거나, 독서를 하면서 토론을 벌이는 공간으로 점유할 수도 있다. 전시회를 보고, 수채화를 그리거나 펜화, 문인화, 서예 등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마을이다. 문화예술을 향유하려는 현대인들의 진정한 즐김을 위한 문화예술촌이 신개념 힐링센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문화예술의 도시 경주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줄 예술촌으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왕신리 전설
왕신리(旺信里)는 옛날 이 마을에 왕의 기운이 있었다 하여 왕신(王信)이라 불렀다 전한다. 또 조선시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주둔해 왜군을 물리쳤기 때문에 믿을 만한 곳이라 하여 왕신(王信), 왕실로 부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기운을 누르기 위해 왕(王) 자에 날일(日)자를 붙여 왕신(旺信)이라 고쳐 부르고 있다.
경주 강동면 왕신리의 지명이 그렇게 1914년 행정구역 통페합에 의해 사라리와 밀곡리, 빈암리를 왕신리와 병합해 지금의 왕신리가 되었다.
왕신리에는 왕신문화예술촌이 들어서기 훨씬 오래전부터 농사용 저수지로 건설된 왕신지는 제법 규모가 큰 호수다. 수상레저를 즐기게 하는 업체가 수상스키와 제트스키를 운영하고 있다.
왕신지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계곡길을 따라 가면 운곡서원이 나온다. 운곡서원(雲谷書院)은 고려 공신 안동 권씨의 시조 권행(權幸),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 귀봉(龜峯) 권덕린(權德麟)을 제향하는 곳이다. 조선 정조 9년(1785) 후손들이 이곳에 추원사(追遠祠)를 세우고 권산해와 권덕린을 배향해 오다가 고종5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헐리었다.
1903년에 단을 만들어 제향하다가 1976년 신라 밀곡사(密谷寺)터로 추정되는 곳에 안동권씨 문중에서 중건했다. 권행은 본래 신라의 김씨였다. 고창군수로 있으면서 신라의 국운이 다함을 보고, 태조 왕건에게 귀의하였다. 뒤에 그는 견훤을 격파하고 고려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태조가 “권행은 기미를 잘 알아 권도(權道)를 썼으니 권(權)에 능하다”면서 권씨(權氏)의 성(姓)을 내리고 태사(太師) 벼슬을 제수하여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가 되었다.
권산해는 권행의 후손으로 단종의 이모부다.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으로 있다가 단종 폐위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 세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잡히자 높은 집 위에서 투신해 죽었다.
권덕린은 권행의 후손으로 회재 이언적의 문하에서 수업했다. 조선 명종 8년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전적, 예조정랑, 병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외직으로 회덕, 하동의 현감, 영천, 합천, 곤양 등의 군수를 지냈다. 그리고 회재 선생을 위해 옥산서원을 창건하였다. 선조6년(1573) 45세에 돌아가자 운천서원(雲泉書院)에 제향했는데, 뒤에 이곳으로 옮겨 배향하고 있다. 운천서원은 지금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운곡서원 옆에는 수령 400년에 이르는 키 큰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서있다. 은행나무 주변에서 매년 가을 음악회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서원과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풍경과 음악을 즐긴다. 조선 초기 문신 권산해의 후손 권종락이 큰 은행나무의 가지를 꺾어다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잎의 모양이 오리발을 닮아 압각수(鴨脚樹)라고도 부른다. 나무 옆에 탁자와 의자를 놓아두고 있어 마을사람들은 물론 방문객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털보 박용 화백
왕신문화예술촌은 털보화가 박용 화백이 왕신리 계곡에 숲갤러리를 지으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가 왕신예술촌의 중심이자 뿌리가 되는 샘이다.
박용 화백은 경주에서 ‘털보화가’ 또는 ‘글 쓰는 화가’로 알려진 수채화 전문작가다. 그는 왕신리 자신이 운영하는 숲갤러리에서 후학을 지도하기도 하지만 동국대 경주캠퍼스에서도 미술학도들을 지도하고 있다. 대학교에서의 강의와 함께 자신의 갤러리에서 스스로 창작활동을 하면서 그룹별 그리기 지도를 통해 후학 양성에 50여년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박용 화백은 유화를 그리다가 수채화로 전향해 강하면서도 선명하고 다시 투명하게 세상을 재현하는 묘한 마력을 가진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유명하다. 박용 화백은 왕신리 공기 맑은 산 속의 계곡에 그만의 작업실을 마련하고, 후학을 지도하면서 전시장을 통해 그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갤러리는 그만의 공간을 확장해 예술의 향기에 배고파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예술의 에너지를 공급한다.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림을 감상하게 한다. 수채화를 그리고, 펜화를 그리기도 한다. 음악을 감상하게 하고, 책 읽는 공간도 만들었다. 누구나 언제든지 찾아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박용 화백은 “수채화를 작업한 지 50년 세월이다. 그동안 수채화의 지역발전과 후배 양성에 몸담아 온 세월이 반세기”라며 “수채화 발전에 일익을 담당한다고 생각한 나의 행적을 열어 보임으로 공유와 공감의 장이 되길 바란다”며 숲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며 인사말을 했다.
그는 동국대에서 그림세계를 강의하면서 우수교수상을 받기도 하고, 경주예술인상을 수상한 박용 화백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쳐가면서 후학을 지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수백명의 제자를 육성하면서 꾸준히 그리기 작업 지도를 이어 동아리를 형성한 제자들이 매년 전시회를 열고 예술의 세계를 펼쳐갈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혼자 즐기는 예술이 아니라 함께하는 예술로 세상을 정화하는 일에 앞장서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박용 화백은 “유화의 끈적거림과 기름 냄새, 그리고 긴 제작과정을 생각하면 수채화가 갖는 담백함과 순간적 퀄리티를 얻을 수 있는 작업 과정은 바쁜 현대인들의 제작 의욕을 북돋우는 장르임이 틀림없다”며 수채화를 선호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박 작가는 “내가 그림 외에 더 잘할 수 있는 게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화업이기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생각했고, 선택한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켰다”면서 “그림보다 먼저 시작 되었던 문학에 대한 꿈도 가꾸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림보다 먼저 시를 지었고 소설을 썼다. 희곡과 수필, 시나리오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늘 생각을 달고 살다보니 노트의 분량이 쌓였고 시인으로 등단한지도 십수 년이 넘었다. 그렇지만 박용 화백은 “나는 시인이라는 말이 괜히 부끄럽고 낯설다. 내 본업이 화가이고 이뤄놓은 화가로서의 자존감에 문학은 오히려 흠집이 될까 염려된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는 오랜 망설임 끝에 최근 소설 ‘황홀한 고통’과 시집 ‘사랑한다는 말’을 펴냈다. “참 오랜 방황과 시행착오 속에 묻혀있던 나의 원고들을 세상 빛에 드러내놓고 ‘나는 이제 다 이루었다’ 말하고 싶다. 세상에 태어난 흔적으로 10권의 책을 펼쳐보는 그날이 내 삶을 마감하는 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 일 뿐”이라고 말하는 털보 박용 작가는 천상 예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