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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잠언 4장 20-27절
말씀으로 지켜야 할 마음
잠언에서 자주 반복되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잠언만이 아니라 전 성경을 통해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신앙은 믿음이라고도 하는데,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 지식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 지식 없이 믿음은 맹신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지식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가? 큰 틀에서 보자면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라고 해서 모든 계시 자체가 하나님 지식과 관련되어 있지만, 특별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참된 하나님 지식 그리고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첫 번째 항목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본성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역사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보여주는 한, 사람들이 핑계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일반계시인 본성의 빛, 그리고 창조와 섭리의 역사들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은 특별계시인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하나님 지식을 얻고 또 하나님 지식이 있어야지만 참된 믿음이 있게 됩니다. 한 마디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말미암습니다(롬10:17).
믿음 혹은 신앙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지식을 제공한다고 할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을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뜻,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서 옳다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그리고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인지를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행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데,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만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유일한 규범입니다. 즉 우리의 삶에 있어서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벗어나서 삶을 말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유일한 규범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종종 말씀만을 주목하라,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라고 요청하십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시면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합니다. 잠언을 계속해서 보고 있지만 잠언의 대부분은 솔로몬이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내 아들아’라고 했을 때 솔로몬의 아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처럼 잠언 역시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잠언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모든 성경, 다시 말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의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그 말씀에 주의하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떠나서는 신앙과 삶의 어떤 것도 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의 본분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만 주의를 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특별히 이 말씀 안에는 인간에게 있어 참된 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내 말에 주의하라,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말하는 복 가운데 생명을 주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생명을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중생 혹은 영생의 의미입니다. 중생이라는 말은 거듭나는 것,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문의 의미를 살려 말하자면 위로부터 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듭남의 복, 중생의 복이 말씀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의 거듭남은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인데, 썩지 아니할 씨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으로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한복음 3장에서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도 말씀하십니다(요3:3,5).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과 상관없이 일하시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일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의 일하심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가르침과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가르쳐진 말씀을 생각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성자의 이름으로 보내신다고 할 때 아버지의 뜻과 상관없는,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상관없는 가르침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성부의 뜻 그리고 성자의 뜻과 일치하는, 달리 말하면 이미 진리의 내용으로 남겨놓으신 말씀으로 가르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성령에 대하여 진리의 성령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분이 아니라, 성령은 반드시 말씀과 함께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없는 거듭남, 말씀 없는 중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근원적으로는 성령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지만, 성령 하나님은 무엇을 방편으로 거듭나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럼 거듭남만 말씀으로 말미암는가?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거듭난 자로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먹고 마셔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칩니다. 육체를 위하여 음식을 먹고 마시듯 영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신명기 8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체를 위해서는 떡을 먹어야 하지만 떡만 먹어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중생된 자는 반드시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거듭나게 하는 생명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은 자로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합니다. 말씀의 기능이 이러하기에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 말씀, 말씀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강조하게 될 때 자주 명령의 형식으로서 요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주의하라’, ‘기울이라’는 명령의 형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명령이 있다는 것은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순종이 너희에게 유익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명령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우리의 유익함을 위한 것입니다. 간혹 명령이라는 형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 부담감을 갖는 일도 있지만, 왜 하나님께서 명령 하시는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명령은 순종을 위해서고, 순종은 결국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명령만이 아니라 소위 권고의 형식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부드럽게 말하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반면 엄하게 말하는 방식은 다소 듣기 불편해합니다. 그러나 부드럽게 말하든, 엄하게 말하든 모든 방식이 다 하나님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명령이든, 권고든 동일하게 순종을 요구합니다. 엄하게 말하면 순종해야 하고 부드럽게 말하면 순종할 수도 있지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식이 아닙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에서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고전7:6)는 말을 하는데, 이때 명령이 아니기 때문에 순종할 수도 있고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면 굉장히 곤란합니다. 엄하게 말하면 권위가 있는 말씀이고, 부드럽게 말하면 권위가 덜한 그런 말씀아 아닙니다. 엄하게 말하든, 부드럽게 말하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고, 자신의 뜻을 드러내고 있는 이상 모든 말씀이 다 권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순종이 요구됩니다. 순종이 요구된다는 것이 순종하는 것이 곧 우리의 유익이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이 된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순종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선이 되고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집니다. 때문에 이런 목적을 가진 모든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주의하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2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고 귀를 기울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 말씀에 우리의 눈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속에 새기어 그 말씀이 남아있도록 하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귀가 창조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눈이 창조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에게 마음이라는 부분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빗대어 설명하자면 여러분의 귀는 말씀을 듣기 위함이요, 여러분의 눈은 말씀을 보기 위함이요, 여러분의 마음은 그 말씀을 새기기 위함입니다. 마음에 새겨 그 말씀이 결코 우리로부터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단순히 귀가 있기 때문에 이 소리, 저 소리 다 듣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눈이 있기 때문에 이것, 저것 다 보기 위함이 아닙니다. 마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아무렇게나 다 수용하도록 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귀를 창조하신 일차적인 목적,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만드신 일차적인 목적,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창조하신 일차적인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럼 단지 귀, 눈, 마음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존재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때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주의 말씀을 향하도록 하기 위해서 지음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오로지 주의 말씀이 초점이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이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과 삶이 어디로부터 나와야 하느냐?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모습을 한번 돌아본다면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들어야 할 말씀을 듣습니까? 보아야 할 말씀을 봅니까? 새겨야 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까? 오히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는 것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야 알지 못하는 자로 있는 것은 아닙니까?(사6:9) 에스겔 선지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도 않는 것은 아닙니까?(겔3:7)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지만 오늘날 대부분도 이 말씀에서 예외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성도라 하면서도 말씀이 아니라 세상에 귀를 기울이며, 말씀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며, 말씀이 아니라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성공한 인생을 살고자 하고,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좀 부러워할만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염려할 뿐입니다(마6:31 참조).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면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주목하고, 그 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두는 일이 너무나도 드물다는 것입니다. 좀 더 간단히 주의 말씀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이지만 욥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실 때 욥과 같은 고백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모든 것을 잃으면 괴롭지 않겠습니까? 괴롭습니다. 욥도 괴로움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괴롭기 때문에 겉옷을 찢었습니다. 괴롭기 때문에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면서 말한 것이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고 했던 겁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얼마나 있느냐는 겁니다. 오히려 광야 이스라엘 백성처럼 먹을 것이 없어 원망하고 마실 것이 없어 원망하고 더 좋은 것이 없어서 원망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말씀은 알고 있지만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여 말씀대로 나타나는 그런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내가 싫어하는 어떤 행동을 하면 곧바로 터뜨리는 게 우리의 열매 아닙니까?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우리 본성의 열매가 우리에게는 익숙한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주의하라, 귀를 기울이라,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라, 마음에 새기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잠언 4장을 살펴보면서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지만 이 말씀을 통해 생명을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4장 4절로 가시면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잠언 4장 1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동일하게 오늘 본문 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한글 성경에는 ‘그것은’ 이렇게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 원문은 ‘왜냐하면’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하나님 말씀에 주의해야 하느냐? 왜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하느냐? 왜 하나님 말씀에서 네 눈을 떠나지 말게 하며, 왜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하느냐?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기 때문이고, 그것은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살아 있다고 해서 살았다고 말하지 않는 측면도 있음을 말씀하기도 합니다. 어떤 것이 그렇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측면에서 비록 육체적으로는 살았으나 영적으로 죽었을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에 더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표현도 나옵니다(엡2:1).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된다고 말 할 때 그것을 역으로 말하면 말씀 없이는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육체적으로 멀쩡해 보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로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지 못하는 자로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 못하는 자로 있다? 혹 여러분 스스로가 매주 교회에 나온다고 할지라도, 아니면 자녀들의 경우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교회에 나온다 할지라도, 혹 친구들로 인해 교회에 나온다 할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주의하지 않는 이상, 그 말씀에 우리 마음을 쏟지 않는 이상 육체적으로는 살아서 교회당 안에까지 왔지만,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보시면 생명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된다고까지 말씀하시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주의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에 새긴 자라 할지라도 항상 육체의 건강을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가? 이 말씀은 유아교회를 향한 말씀으로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구약의 교회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마치 어르고 달래는 식의 표현들이 있다는 걸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게 될 때 말 잘 듣는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회초리를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회초리를 든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르고 달래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양치질 치자” 그러면 싫다고 합니다. 억지로 치기도 하지만 항상 그렇게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랜다는 차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양치질 쳐야지 내일 또 사탕먹지!”
구약의 표현이 바로 이런 식으로 설명할 때가 많습니다. 목적은 어디 있느냐? 양치질 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양치질 치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조건으로 거느냐? 사탕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말씀을 지키라,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면서 “그리하면 복을 주겠다”는 것으로 말씀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복을 말할 때는 외적인 복의 형태로 말씀하실 때가 많은데, 유아교회에게 말씀하시는 형태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 있느냐? 그리하면 복을 주겠다고 말할 때 그저 세상적인 복이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라 영적인 복, 다시 말해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그것,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영적인 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으로 있습니다. 실제로 신약에 구약처럼 세상의 복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있는가?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늘에 속한 복, 신령한 복에 더 많은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약에서 구약을 설명할 때 세상적인 복이 구약 성도들의 목적이 아니라고까지 밝히는 말씀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히브리서 11장입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5-16) 당연히 이 성은 이 땅에 있는 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성, 즉 이 땅에 있지 아니한 성입니다. 바로 거기를 향하여 나아가ㅣ도록 한 것이 구약 성도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한다고 해서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백성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었던 겁니다. 가나안 땅을 통해 하늘에 있는 성을 바라보게 하셨던 겁니다.
때문에 지금 잠언에서 말씀에 주의하라, 그 말씀을 듣고,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그 이유에 대해 그것이 곧 네 온 육체의 건강이 된다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미 잠언 4장 10절을 설명할 때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 자신에게 선과 유익이 되는 한 그렇게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입니다. 반면 절대적인 이유로 말씀하시는 게 육체의 건강이 아니라 생명이 된다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생명인데,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이 뭐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주의하라,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라, 그 말씀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라, 그 말씀을 네 마음에 새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참된 복은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두고두고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누릴 수는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고,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것, 그런데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느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혹 말씀을 지켰는데도 내 몸이 좋지 못하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리고자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의 육체는 쇠잔해져 가지만,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음의 정점을 찍고는 점점 늙어가게 되지만 말씀을 가까이 하는 그 자리만큼은 더욱 더 복된 자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도록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기에 오늘 본문 23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말씀으로 무엇을 지키라고 하시는가? 마음입니다. 일반적으로 영혼의 좌소를 마음이라고 합니다. 육체는 보이지만 영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육체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영혼을 만들어 우리 안에 넣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이 자리하는 곳이 어디냐? 일반적으로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영혼과 마음을 병행하여 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잠언만 보더라도 2장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요” 욥기 10장 1절에서는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시편 84편 2절은 더욱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보통은 인간의 구성이 영혼과 육체이지만 때로는 이렇게 마음과 육체로 쓸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는 말은 너희의 영혼을 지키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특히 생명의 근원이 이 마음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의 핵심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있다는 소리입니다. 육체의 죽음을 정의할 때 성경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말합니다. 이때 육체는 썩어지지만 영혼은 썩지 않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는 이런 면에서도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죽음만 죽음이라고 말하지 않고 영혼의 죽음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질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때 영혼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영혼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영혼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혼이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 23절은 모든 것 가운데 지켜야 할 것이 마음이며, 그 마음을 무엇으로 지켜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고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지킬 때 거기에 생명이 있는 것이고, 거기에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거기에 진정한 삶의 가치가 나타나게 됩니다. 혹 우리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영혼이 죽어가게 되면 어떤 일이 있게 되는가? 영혼과 육체가 밀접하게 관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영혼의 문제는 육체의 문제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인간이 죄를 짓는가? 왜 부모를 업신여기고,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을 행하게 되는가? 우리의 영혼이 부패했기 때문이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3절의 말씀이 무엇과 연결되느냐 하면 23절 이하의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24절 이하 27절을 보시면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영혼을 지키는 것, 마음을 지키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우리의 육체를 제어하는 일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말로 죄를 짓는 성격, 눈으로 죄를 짓는 성격, 발로 죄를 짓는 성격, 그 모든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질 때 제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명령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마음을 지키되 무엇으로 지켜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언제 한번 말씀드렸던 적이 있는데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실제적인 죄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명령,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죄의 성격은 이미 그 마음속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금지된 열매를 먹기 전에 하와의 마음에 이미 죄의 성격이 암시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가감한 것, 그리고 금지한 것을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결국 따먹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따먹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그 마음이 공개되고 확증된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죄의 유혹은 어디로부터 오느냐 하면 마음으로부터 올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는 우리 마음 자체가 부패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가 항상 악할 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 바도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아담의 타락 이후 가장 부패한 곳이 어디냐? 마음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 마음이 부패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의 영혼이 부패했다, 자기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를 짓지만 그것이 죄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21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고 말씀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오늘날 수없이 많은 종교가 있다고 할 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다 죄인데, 그것이 죄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부패한 마음, 그런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들이 악하다고 할 때 이미 그것 자체로서도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드러나는 모든 죄 역시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구부러진 말을 하거나 삐뚤어진 말, 혹은 눈으로는 흘기거나 째려보는 것 등은 다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때문에 무엇보다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마음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지켜야 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보시면 “좌로나 우로나 지우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인생의 길에 있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걷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 판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해 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여호수아 1장이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기 때문에 그 부분만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1장 7절에서 9절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기 보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다고 할 때 그 의미는 율법을 지키면서 가는 길입니다. 또한 그렇게 할 때 형통할 것을 약속하는데, 형통이란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단순하게 내가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원인과 결과라는 차원으로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내가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을 내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지키도록 애쓰고, 노력하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백성이요, 자녀이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그 말씀을 네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때문에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는 마땅히 그 말씀에 주의를 하며, 귀를 기울이며, 눈을 떠 주목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혹 우리의 마음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보고 듣고 하면서 말씀의 길을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게 내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단히 살펴야 합니다. 주일날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살피고, 또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자신을 살펴야 됩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가?”라고 질문해 볼 때 우리 스스로는 우리 마음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24절 이하 27절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눈과 귀, 말과 행동이 죄로 나타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구부러진 말을 하고 비뚤어진 말을 합니다. 눈을 떠 똑바르게 봐야 하지만 옆으로 해서 째려볼 때가 많습니다. 조금 더 실제적으로 우리는 쉽게 분을 내고, 쉽게 악을 쓰고, 칼날처럼 빛나는 도끼눈을 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 현실로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눈에서 떠나지 않게 하며, 마음으로 그 말씀을 새기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마음을 지키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것과 같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말씀을 주시고 계시는 겁니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지킬 것이며,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붙들어 주실 것으로서 하나님은 이 약속의 말씀을 우리에게 명령의 형식으로서 알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과 입술을 제어하실 것이고, 또한 우리의 눈과 눈꺼풀을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로 고정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걷게 하실 것입니다.
물론 당장 그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성이 너무나도 질기고, 우리의 부패함이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평생을 두고 가야 할 길입니다. 싸우고 또 싸워야 할 내용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승리의 교회가 아니라 전투하는 교회로 우리의 평생이 이 싸움을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지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의 죄성이 크면 클수록 더더욱 주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시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도록 주의 은혜를 구하며, 주의 은혜를 따라 애를 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외적으로 드러나는 죄들에 대해 조금씩 근절되는 그런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를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전투하는 교회로서 성화가 매우 더디지만,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매주 그리고 매일 주의 말씀으로 우리를 더욱 거룩하게 만들어 가셔서 그것을 우리의 소유로 남게 하십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만 주의를 해야 하고,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는 일로 주일을, 그리고 우리 평생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설교를 들음으로, 또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첫댓글 본 설교는 140427설교 내용을 수정, 보충하여 다시금 설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