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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정치세력화 유형별 사례
- 선거와 의회, 그리고 대중투쟁의 관계 -
김영수 공공연맹 전 정책부장
선거 + 의회주의
< 의회주의 >
- 의회에서 권리를 위임받은 자들이 권리를 위임한 사람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고, 정책의 ‘효율성’을 내세워 민주적인 정책결정의 과정을 배제하거나 형식화하는 현상이 보편화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주권의 주체가 전도되는 ‘위임권력의 이중성’, 즉 위임하는 과정으로서의 권력과 집행되는 과정으로서의 권력이 주기적으로 역전되는 권력행사방식, 즉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 그런데 이러한 한계는 대의제로 운영되는 모든 정치과정에 대한 대중들의 참여와 통제장치가 보장되고 확보되는 과정, 즉 권리의 보유자와 행사자간의 관계에서 권력주체의 의사가 권력 행사자에게 강제되는 과정에서 극복되어야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평등한 권리행사는 보장하더라도 권리에 대한 주권자의 자기실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래서 대의제의 한계는 “주권자들에게 정보가 완전히 공개되어 그 정보가 공유되고 주권자들의 의사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토론된다면, 그리고 그러한 주권자들의 의사가 제도적으로 국가권력의 행사과정에 반영될 수 있는 길이 마련된다면, 비록 주권의 주체와 주권의 행사자가 분리되더라도 주권자의 의사가 행사자에게 강제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극복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주의 원칙, 즉 주권자들이 ‘평등한 주권행사 및 주권에 대한 주권자의 자기실현’을 위한 투쟁의 성과이자, 권력주체들이 권력체제를 변동시키기 위한 권리를 주체적으로 행사하는 것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 선거주의 >
노동자 정치운동의 주체들이 선거공간에서 노동자 대중들을 ‘한 표를 행사하는 유권자’만으로 간주하거나 득표확대를 위한 노동자 대중 동원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 대중들은 이러한 조건에서는 노동자 정치운동의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자 당선기계’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정치적 참여장치만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선거투쟁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 브라질의 PT당 >
- 브라질에서는 1968, 1978~79년도 총파업이 전개되었다. 그 기본적 성격은 자생성에 기초할 수밖에 없었다. 그 투쟁역량을 토대로 브라질 노동자당(PT)이 출발하게 되었다. 브라질의 노동자당은 1980년 2월 결성됩니다. 그런데 PT당 결성의 주요동력은 1978~79년 브라질 금속노동자들의 총파업투쟁이었다. 당시 전개된 총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5-60만 명 정도였는데, 노동자들이 ‘당근’이라는 아편1)에 중독되어 있었던 브라질 노동운동사에서는 역사적 쾌거라고 말할 정도로 거대한 파급력을 발휘하였다. 그러한 총파업투쟁의 동력에 기반하여 브라질 노동자당이 결성된 것이다.
- 80년대에 PT당은 룰라를 대통령 후보로,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의회 선거에 노동자 후보들을 내세워 성과를 올렸지만, 90년대를 전후로 하여 의회주의에 경도되기 시작하였다. 브라질의 1980년 이후 지방의회 선거과정, 1994년 총선과 1999년 총선에서 노동자․민중들을 목적의식적으로 동원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자․민중들은 의원들을 선출하는 투표기계로 전락하였다.
- 물론 권력위임의 절차가 노조 선거과정에서도 있듯이, 선거절차를 거쳐 권력을 위임해야 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역량을 강화시켜야 한다. 권력위임의 과정에서 권력의 주체들이 권력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은 곧 권력위임을 매개로 하는 의회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그 결과 PT당에 대한 지지도는 상당히 약화되었다.
- 그래서 PT당은 99년 총선 이후 정치적 현장을 장악하기 위한 역량의 강화에 힘을 기울이고 잇습니다. 브라질에는 카톨릭 종교공동체를 토대로 한 수많은 기초단위의 대중운동 단체들이 존재합니다. 중남미의 종교공동체의 운동주체들은 브라질 노동자당과 결합되면서 네트웤이 형성됩니다. 이것들이 1968년 노동자총파업투쟁, 1978~79년의 총파업 투쟁의 역량이었다. 그들이 노동현장의 활동가들이었다는 겁니다. PT당은 이러한 주체들과 다시 결합하는 정치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노동현장간의 정치적 네트웍, 조직적 네트웍을 다시 형성하고 있습니다.
< 브라질 공산당 >
브라질 공산당은, 세계 어느 국가나, 어느 공산당도 경험한 것이었지만, 민족자본가 문제와 의회에서의 권력분점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쟁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브라질 공산당은 민족 부르주아지와 연합하는 노선을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군부쿠데타 이후에는 혁명적 노선을 지속적으로 고수하면서도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연합노선, 제도권 야당과의 연합노선에 기초하여 ‘의회에서의 권력분점’을 추구하였습니다. ‘선언적으로는 혁명적 노선’을 고수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노선을 현실화하기 위한 정치운동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이는 또한 노동자 정치운동의 ‘형식주의’, 무늬만 혁명적인 ‘성명서 정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선거 + 대중투쟁
<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한 선거 >
- 선거공간이 노동자 대중들을 정치적으로 통일시켜 내고, 노동자 대중들의 현안의 문제들을 정치․사회적으로 이슈화시켜 내는데 있어서 매우 유리한 객관적 조건임을 전제로 한다. 노동자 대중들 역시 제도화된 정치참여장치의 주체로 나서는 기회이고, 이 과정에서 정치의식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런데 대중투쟁의 경험을 한 노동자들과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 간에는 상이한 수준에서 참여를 한다는 것이다.
- 선거공간에서 노동자 대중들의 현안의 문제를 정치․사회적으로 이슈화시키는 방법, 선거참여의 당면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 등에서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선거참여가 ‘득표확대, 정당에 대한 국민적 인식의 제고, 정치적 명망가 배출’ 등의 한계를 극복하는 투쟁의 공간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 남아공의 사례 >
- 1990년 아파르타이드 체제가 붕괴되고 난 이후, ANC, SACP, COSATU는 1994년 3월까지 백인 지배세력과 ‘협상투쟁’을 전개하였다.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문제, 1994년 이전에 발생한 정치적 폭력의 가해자들을 처리하는 문제, 향후 정치일정의 문제 등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결국 1993년 12월에 임시헌법이 만들어지고, 흑인들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남아공 역사상 최초로 흑인들의 참정권이 보장된 것이다. ANC, SACP, COSATU는 1994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하여 흑인정권을 수립하였다.
- 삼자동맹의 주체들은 1994년 총선거뿐만이 아니라 1999년 총선거에서도 대중투쟁에 기초하는 ‘선거연합전술’을 채택하였다. 흑인 정치운동 주체들이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하 수 있었던 실질적인 토대였다.
- 그렇지만 이러한 투쟁전술은 사회구조의 변혁이라는 전략적 목표와 긴밀하게 연계시킨 상태에서 채택되었다. 단지 ‘정책연합, 후보연합’의 수준에서 선거연합전술을 채택하지 않고 있다. 즉 삼자동맹의 주체들은 ANC정권을 민족민주혁명의 핵심적 주체로 상정하고 있으며, 민족민주혁명의 성공 이후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과제들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 남아공의 변혁운동 진영은 단지 조직원의 몇 %가 혹은 조직원 몇 명이 의회에 진출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투쟁과제로 간주하지 않았다. 의회 및 정부에 진출한 소속 조직원들의 실질적인 활동내용과 남아공의 사회변혁적 과제를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문제를 주요 과제로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투쟁 중심주의
< 의미 >
- 비제도적인 참여장치를 적극 활용하여, 노동자 정치운동의 주체나 노동자 대중들이 국가권력에 대해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전략과 전술을 지향한다. 그래서 제도화된 참여장치를 활용하는 정치운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 반면에 노동자 정치운동의 주체나 노동자 대중들이 ‘대중투쟁 중심의 정치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는 조건이 국가권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도 존재한다. 국가권력이 ‘포섭․동의를 유도하는 통치전략’이 부재한 상태에서 오로지 ‘억압적 통치전략’만을 강화할 때 나타난다.
- 대부분 비합법적인 혹은 반(半)합법적인 정치적 주체들이 전국적인 노동자․민중항쟁의 노선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 1987년 이전의 한국 노동자 정치운동 >
< 1990년 이전의 남아공의 투쟁 >
- 남아공의 대표적인 흑인 저항운동의 주체, 즉 노동자 정치운동 주체라고 하면 ANC, SACP(남아공공산당), 그리고 PAC(범 아프리카회의)입니다. ANC는 1910년대에, SACP는 1920년대에, 그리고 PAC도 1910년대에 결성되었습니다.
- CPSA(1950년대 이전의 남아공 공산당)는 1921년에 결성되었지만, 결성 당시에는 백인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운영되었다. 그러나 남아공 공산당은 1924년에 흑인들이 당에 참여하면서 흑인 중심으로 변하게 되었다. 1928년에는 당내에 흑인 지도부가 출현하였고, 1,750명의 당원 중 1,600명이 흑인이었다.
- 이 조직들은 흑인들로부터 대중적인 지지기반들이 확보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인종적 착취와 계급적 착취가 심하고 백인들이 탄압이 우리나라 국가-자본의 노동자 탄압과 마찬가지입니다. 남아공도 파업 시 백인경찰들이 총으로 쏘아버리는 상황, 흑인들이 저항하면 백인들이 흑인들의 거주지역에 무장하고 들어가 소탕하고 나오는 상황 등이 그것입니다.
이에 흑인 선진 활동가들은 흑인 인종해방을 갈구하는 선진 활동가들이 뭔가 조직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껴, 정치적 이해와 선전, 흑인 노동자 조직화를 목적으로 결성되기 시작한 것이 ANC-SACP-PAC였습니다.
- 이들의 활동 결과가 1920년대 초반 랜드폭동(Rand Revolution)인데, 이것은 광산채굴 목적에서 해 왔던 백인들의 착취에 대해 흑인들이 최초로 저항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백인노동자들도 참여했습니다.
- 1929년에는 당내에 흑인 사회주의 공화국 이론이 도입되었다. 이 이론은 인종적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체제 변혁적 이론으로써, 남아공 변혁운동의 이론적 토대로 작용하였다.
- 그러나 1951년 ‘공산주의 탄압법’의 제정으로 공산당의 활동은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흑인 공산주의자들은 1953년에 SACP를 재창설하였다. 이후 SACP는 ANC와 함께 해외, 즉 '보프타츠와나'나 '모잠비크'에 투쟁근거지를 확보한 상태에서 ‘2단계 사회주의 혁명이론’을 실천하였다. 제1단계인 민족민주혁명을 실현하고, 제2단계인 사회주의 혁명을 거쳐서 남아공의 사회변혁이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혁명적 전위조직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한 남아공 공산당은 무장투쟁전술을 토대로 1960-70년대 남아공의 인종해방투쟁 및 사회구조의 변혁투쟁을 주도․지도하였다.
- 흑인들의 대중운동이 1980년대 초반에 활성화됨에 따라, 남아공 공산당의 혁명적 전위조직 노선보다 ANC의 ‘혁명적 민중주의 노선’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조직적 헤게모니가 보장되는 다계급․다계층 연합노선이 흑인 저항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 1912년에 결성된 ANC는 출발부터 다계급 연합적인 ‘인종해방과 민중민주주의’ 노선을 견지하였다. ANC는 1955년에 ‘민중회의’를 소집하여 ‘인종차별체제의 극복, 정치적 참정권 확보, 차별적인 정치제도의 폐지, 빈부격차의 극복, 정치교육 강화, 제반 민주적 권리의 보장’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자유헌장(Freedom Charter)'을 채택하였고, 이 헌장은 ANC 정강정책을 인종해방운동으로 현실화시킨 것이다.
- ANC는 1961년 이후 ‘민족의 창’(이하 MK)을 결성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이에 대한 흑인들의 지지와 지원은 급속하게 강화되었다. 1963년 만델라의 구속으로 ANC의 정치적 구속력이 약화되었지만, 1980년 중반에는 정예부대라 할 수 있는 10,000여 명의 게릴라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중 약 400여 명이 국내에서 상시적으로 활동하였다. ANC의 이러한 활동가들은 다양한 형태의 정치적 투쟁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고, COSATU를 비롯한 다양한 대중조직에 대한 정치적 지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ANC는 1983년 통일민주전선(이하 UDF) 건설 및 ‘3원의회(Tri-Cameral) 반대투쟁, 그리고 1986년 이후에 백인과 인민전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SACP와 함께 남아공의 대안적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다.
- 그런데 정치운동의 조직은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정치적 대안세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조직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나 정치적 영향력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ANC와 SACP도 조직을 결성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남아공 흑인들의 정치적 대안세력으로 부상하지 않았다. 흑인 대중들의 정치적 이해와 직결되는 정치활동의 결과이고,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의 결과인 것이다.
- ANC와 SACP는 노동현장에서 제기되는 요구, 흑인 공동체에서 발생되는 요구, 그리고 사회적 차별체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요구들을 해결하려는 투쟁에 긴밀하게 결합하였다. 남아공에서 전개된 대규모 총파업 투쟁을 이들 정치조직이 주도하고 책임을 졌다. 이러한 투쟁의 과정에서 ‘인종해방을 추구하고자 하는 흑인 노동조합주의’를 발전시키는 결정적 계기였다. 당시 흑인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노동조건의 개선, 흑인노조의 인정’ 등을 주요하게 요구하였고, 이러한 대중투쟁으로 공공업무를 마비시키고, 지배질서의 균열을 가져오게 하였다.
1) 브라질도 1920년대부터 1945년까지 인민해방전선에 기초하는 혁명노선을 지향했습니다. 그런데 1930년부터 1945년도에 브라질의 바르가스 대통령이 포퓰리즘을 창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국가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노동자 민중들에게 최대한의 당근을 주어야 한다. 노동자들에게 이전에 누리지 못한 권리들을 보장해주는 거죠. 그러고 조건이 되면(생산성), 그에 상응하는 임금인상을 시켜줍니다. 대신에 ‘국가정책상 너희들이 필요할 시 동원할테니, 동원명령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국가정책에 동조하는 세력으로서 역할을 다하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