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라 말하기엔 뭍이 너무 가까운 섬. 이제는 다리가 놓여 섬이 아닌 섬. 고흥 쪽에 일이 있어서 내려갔다가 소록도에 다녀왔어요.
소록도와의 인연은 1991년 녹동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어요. 그때 저는 공군일병이었고 첫 휴가를 받아 단출한 여행을 하던 중이었죠. 터미널에서 내려 수녀님의 짐을 나누어 들어드린 게 인연이 되어 소록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요. 수녀님은 소록도유치원 수녀님이셨거든요.
수녀님은 다음날 아침 첫배로 소록도에 들어오라 했어요. 안내소에도 미리 말을 해 두시겠다고 했고요.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아무나 소록도에 들어갈 수 없었거든요. 소록도유치원 교실에 몇개의 못을 박기도 했고 고장이 난 녹음기를 만지작거리기도 했어요. 화장실 청소와 유리창닦기로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고요.
수녀님은 제가 소록도를 찾을 때마다 저를 데리고 성당에 가셨어요. 성당은 한하운 시비가 있는 중앙공원 바로 옆에 있었어요. 감금실과 검시실을 지나면 나오는 중앙공원은 일제강점기에 한센병 환우들이 강제 동원되어 조성된 것이라고 수녀님은 말씀해주시곤 했어요. 온전치 않은 맨몸으로 비탈을 깍고 섬으로 바위를 캐다 날라 산 중턱으로 밀어올리고 나무를 심고 해서 공원을 만들었다 했어요. 제게 종교를 강요한 적이 없는 수녀님은, 나중에 붉은 벽돌을 굽던 굴뚝자리에 예수상을 세웠다는 것도 알려주셨고요.
만날 때면 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러주시던 도민고 할아버지, 젊었을 때 한 인물 하셨을 것 같은 우시몬 할아버지, 뿔테 색안경을 쓴 비금도 할머니와는 특히 친하게 지냈어요. 그분들 중 가장 많은 애정을 제게 주셨던 분은 도민고 할아버지셨어요. 열일곱에 소록도에 들어와 가진 것 죄 빼앗기고 아침저녁으로 붉은 벽돌만 구워야 했다고 했어요. 앞을 못 보시던 도민고 할아버지는 제가 소록도에 갈 때마다 저를 단번에 알아보셨어요. 제 목소리를 듣고는 제 이름 석자를 단번에 불러주셨어요.
"할아버지, 어떻게 저를 까먹지도 않고 기억하세요?"
"내가 늘 자넬 위해서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니까 알지, 허허."
어쩜 저는 보이지 않는 따뜻한 기도의 힘으로 여기까지 무사히 오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소록도와 인연을 맺은 지도 어느덧 이십년이 넘게 흘렀네요. 그간 가까운 친구, 후배들과 함께 쏠려가 소록도분교 아이들에게 인형극을 보여주기도 했고, 소록도유치원에 기왓장을 덧대어 작은 화단을 만들어보기도 했지요. 더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계시는 숙소에 들어가 라디오를 고쳐드리겠다고 깐죽거리도 하면서 빵과 귤, 사탕 같은 것들을 스스럼없이 축내기도 했지요. 하지만 유치원 수녀님이신 이앙즈요셉 수녀님이 소록도를 떠난 뒤로 소록도에 가면 어쩐지 허전했어요. 그뒤로 제 발길은 확연히 뜸해졌고요.
비를 말동무 삼아 소록도 구석구석을 다시 걸었어요. 문 닫은 지 오래인 유치원과 분교에도 가봤어요. 바닷가 솔숲도 걸어봤고요. 맨 처음 배에서 내려 섬에 닿던 선착장에도 가보았지요. 언제 또 다시 오게 될지 모르니까요.
소록도성당을 멍하니 바라보다 나올 때였어요. 단아한 수녀님 한분이 제 앞으로 지나가고 계셨어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앙즈요셉 수녀님에 대해 여쭤보았어요. 곧바로 전화번호를 알려주시더군요. 도민고 할아버지와 우시몬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하셨어요. 하늘에 계실 도민고 할아버지와 우시몬 할아버지가 아는 체를 하느라 연신 뿌려주시는 비는 마침맞게 좋아서 우산을 접고 걸었어요.
이앙즈요셉 수녀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밝았어요. 제 목소리가 조카 목소리를 닮았다고 좋아하셨어요. 생각해보니 예전에도 몇번이나 조카 얘기를 하셨던 것 같아요. 수녀님은 지금, 대구 성 바오로 수녀원에 계세요. 이앙즈요셉 수녀님은 1920년생이시고 우리나이로 94세이시죠. 수녀님이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시면 좋겠어요.
(창문엽서)
첫댓글 가슴이 뭉클하네요~
맞아요 우리는 어디선가 누군가의 기도덕에
지금의 삶을 살고 있는 지 모르겠어요^^
안녕하세요.. 우연히 글을 읽게 되어서 망설이다가 소식을 전합니다. 저는 이앙스요셉수녀님의 조카로 박아나스타시아라고 합니다. 어제 낮2시경에 이모수녀님께서 선종하셨기에 알려 드립니다. 그동안 함께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이앙스요셉수녀님이 하늘에서 편히 쉬시길 마음모아 기도합니다~ 한번도 뵌적 없지만 아름다운 글을 쓰는 박성우 시인의 글을 통해 수녀님을 접하고 참 고운 향기가 나는 분이라고 느끼며 제 마음도 맑아졌었어요. 이렇게 소식전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초록별 저희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름다운 마음의 울림을 글로 전해주시는 작가님에게도 감사드리며 모든분들 늘 건강하시길 기도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