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康獻大王受命之越五年丙子相臣進言曰崔霮未冠進士參內侍旣登第不求宦達將母退處桑鄕恭修子職盖自辛禑丁巳至今二十年冝(宜)有以獎之上可其秦拜奉常少卿卽起應命戊寅知珍州事及觧歸日哦詩以自適丙申進通政大夫檢校戶曹參議集賢殿提學時公告老家居且久然康强無恙少壯莫能及生於至正丙戌卒于宣德甲寅{甲寅卽世宗大王十六年}年八十九葬全州周德山枕庚之原此公之踐歷生卒之大致也崔氏系出全州而侍中諱阿中郞將諱龍鳳司醞直長諱乙仁司醞直長諱乙仁是爲三世配淑夫人朴氏考從壽有四男曰匡之文科集賢直提學曰直之文科集賢直提學曰得之生進少尹曰德之文科藝文直提學世所謂烟村先生也後承繁衍不可盡述而曾孫秀孫忠成玄孫弼成繼成六代孫命龍八世孫安俱以學行與俎豆之列連孫左承旨{吏曹參判}以淸愼稱亦公之玄孫也盖觀國初名碩多出前朝之臣於公余何問然嘗讀鄭公坤所爲序文公之孝謹謙恭實有萬石君之風詩曰溫溫恭人惟德之基今公子孫之賢若是其多鳴呼孰謂靈芝無根醴泉無源也哉公墓舊無識十二代孫鳳徵自爲刻立短碣未二十稔不幸踣折於是十三代孫處濂謨于諸宗別治石以樹之云
嘉善大夫行漢城右尹全義李基敬撰
우리 태조대왕께서 조선을 개국하신지 5년째 되는 1396(태조 5)에 정승께서 임금님께 진언 올리기를
최담은 아직 벼슬이 없는데 진사로 내시부에 근무한 적이 있었고 이미 과거에도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올라 출세하여 영화를 누리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어머님께 효도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물러나 자식으로서 소임을 다 해 온 것이 1377년(우왕 3)부터 이므로 이미 20년이 흘렀습니다.
라고 칭찬하면서 벼슬을 내려 줄 것을 청하였다.
주상께서 그 정승이 상주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하라 명하시므로 봉상시 소경으로 벼슬에 나가셨으니 자리에서 일어나 임금의 부름에 응하신 것이다.
1398(태조 7)에 명을 받아 지진주사가 되셨으나 이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날마다 시(詩)를 읊조리며 아무 속박 없이 사셨는데, 1416(태종 16)에 통정대부 검교 호조 참의, 집현전 제학이 되시었으니 그 때 공의 나이가 많으셨기 때문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집에서 한가롭게 지내신지 오래 되엇지만 매우 강강 무양하시었으며 능히 젊은 사람을 상대하실 수 있었다.
1346년(충목왕 2)에 태어나셔서 선덕 갑인년(1434)에 돌아가시니{갑인년은 세종대왕 16년이다} 나이 89세로 전주 주덕산에 동쪽을 향하여 장사지냈다.
이것이 공이 살아오신 이력이며 태어나서 돌아가시기까지의 큰 줄거리이다.
최씨는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데 문하시중 휘 아, 중랑장 휘 용봉, 사온서 직장 휘 을인이 공의 증조부, 할아버지, 아버지이시다. 배 숙부인 전주박씨의 아버지는 박종수이다.
아들 4형제를 두었으니 광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직지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득지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급제하여 소윤이 되었으며, 덕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직제학이 되었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연촌 선생이다.
후손이 번창하여 모두 다 적을 수는 없지만 증손 수손과 충성, 현손 필성과 계성, 6대손 명룡, 8세손 안(安)은 모두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서 서원에 배향되었다.
연손(1)은 좌승지{이조 참판}로 청렴하고 신중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역시 공의 현손이다.
조선 초기를 살펴보면 크게 이름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고려 때 벼슬하신 공(公)에 대하여 내가 알아보다가 정곤이 지은 서문을 읽어 볼 수 있었는데, 공의 효성과 삼가하고 겸손하며 공경함이 실로 만석군과 같은 풍모가 있었다고 했다.
<시경>에 이르기를
온화하고 공손한 사람은 그 덕을 터전으로 삼을 수 있다.
했으니 지금 공의 자손들의 훌륭한 모습이 이렇게 많이 알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가 영지는 뿌리가 없다고 할 것이며 예천에 근원이 없다고 하겠는가?
공의 묘소에 예전에는 비석이 없었는데 12대손 봉징이 스스로 작은 비석을 새겨서 세웠으나 20년이 채 못 되어 불행하게도 넘어져 부러져버렸기 때문에 13대손 처렴이 여러 종중 사람들과 협의하여 새로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가선대부 행(行) 한성부 우윤 전의이씨 이기경 지음(2)
* 인물정보.
계성(繼成) : 처암공(處菴公). 중랑장공파, 부안종회 8세 휘 계성(繼成). 효자. 형님 처사공(處士公)과 함께 도동서원에 배향되었다.
광지(匡之) : 송애공(松厓公). 중랑장공파 5세 휘 광지(匡之). 월당공의 장남. 1365년(공민왕 14)경에 태어나 1389년(공양왕 1) 동생 송파공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에 올랐다.
덕지(德之, 1384~1455) : 연촌공(烟村公). 중랑장공파 5세 휘 덕지(德之). 자 우수(迂叟), 가구(可久). 호 연촌(烟村), 존양당(存養堂). 시호 문숙(文肅). 조선초기 호남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1405년(태종 5) 식년시에 급제, 1446년(세종 28) 남원 부사를 마지막으로 영암으로 낙향하여 존심양성을 내걸어 호를 “존양당”으로 바꾸었다. 1450년(문종 1) 예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벼슬에 나갔으나 다음해(1451) 겨울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벼슬을 버리고 영암으로 낙향하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일편야사>를 지어 비판하였는데 원호(元昊)에 의하여 <몽유록>, 김종직(金宗直)에 의하여 <조의제문>으로 되살아나 조선 조정에 무오사화라는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득지(得之, 1379~1455) : 율헌공(栗軒公). 중랑장공파 5세 휘 득지(得之). 월당공의 삼남으로 1396년(태조 5) 15세에 생원시와 진사시를 한꺼번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4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문과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1413년(태종 13) 조정에 천거되어 내외직에 두루 제수되고 벼슬이 전농 소윤에 이르렀다.
명룡(命龍, 1567~1621) : 석계공(石溪公). 중랑장공파, 부안종회, 사성공(순성)파 10세 휘 명룡(命龍). 자 여윤(汝允), 호 석계(石溪). 김장생(金長生)의 제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역학, 음양, 수학, 불교 등에도 능통하였고, 그림도 전문 화가를 능가하였다. 그림은 <선인무악도>가 전하는데, 당시 유행한 절파화풍의 소경산수인물화다. 연촌공,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해동명신록>에 수록되었다.
봉징(鳳徵, 1671~1740) : 중랑장공파, 남원종회, 참의공(준립)파 16세 통덕랑공(通德郞公), 자 서중(瑞仲).
수손(秀孫, 1437~1512) : 고궁당공(固窮堂公). 중랑장공파, 부안종회 7세 휘 수손(秀孫). 아버지 옹암공의 학통을 이어받아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고 고향 부안에 집을 지어 고궁당(固窮堂)이라고 편액을 붙이고 가난한 생활을 즐겼는데, 고궁(固窮)이란 가난하고 궁핍한 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안(安) : 모암공(慕菴公). 중랑장공파, 고부종회 12세 휘 안(安). 성수침(成守琛)의 제자로 정유재란 때 아들 이순당공(二順堂公) 휘 경행(敬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명나라 군대를 지원한 공을 인정받아 군자감 직장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고 도계선원에 배향되었다.
연손(連孫, 1460~?) : 암계공(巖溪公). 중랑장공파, 남원종회 8세 휘 연손(連孫). 자 자윤(子胤), 호 암계(巖溪). 1480(성종 11)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고 진사시도 급제했으며, 1489(성종 20)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때는 사간원 등에서 언관으로 일하고, 연산군 때는 지방관으로 평양 서윤과 함양 군수로 있다가 중종반정 후 다시 내직으로 일했으며, 강릉 부사, 도승지, 이조 참판 등을 지냈다. 도승지 교지 등이 가보로 전해오고 있다.
이기경(李基敬, 1713∼?) : 전의이씨. 대대로 전주에 살았고, 문정공 이재(李縡)를 스승으로 섬겼다.
정곤(鄭坤) : 동래정씨. 호 복재(復齋). 김제 출신. 이색(李穡) 문하에서 배웠다. 전주 교수관으로 생원 한성시, 향시의 법을 행하도록 건의하여 채택되었다. 성균관 대사성, 지제교를 지냈고, 은퇴 후 김제의 시골집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직지(直之, ?~1423) : 송파공(松坡公). 중랑장공파 5세 휘 직지(直之). 월당공의 차남. 1368년(공민왕 17)경에 태어나 1389년(공양왕 1) 형님 송애공과 함께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하다가 1423년(세종 5) 순창 군수로 업무 중에 돌아가셨다.
처렴(處濂, 1723~1793) : 중랑장공파, 남원종회, 참의공(준립)파 17세 자 내현(乃賢). 휘 봉무(鳳武)의 계자.
충성(忠成, 1458~1491) : 산당공(山堂公). 중랑장공파, 영암종회 7세 휘 충성(忠成).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김굉필(金宏弼), 남효온(南孝溫) 등과 친분을 쌓았다. 병약하여 34세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다. 녹동서원에 배향되었다. 김굉필의 제자라고 한다.
필성(弼成) : 처사공(處士公). 중랑장공파, 부안종회 8세 휘 필성(弼成). 진사. 효자. 무오사화 이후 두문불출 학문에만 열중, 과거를 포기하였으나, 1528년(중종 23) 효행으로 상직(賞職)을 받았다. 부안 도동서원에 배향되었다.
* 각주.
(1) 이 글은 1700년대 후반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에는 아직 암계공이 주암서원에 배향되지 않았다.
(2) 저작 연대를 확인할 수 없으나 1700년대 후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