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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서문 1 John
The First Epistle of John
Author.
In style, diction, and content, 1 John follows the fourth Gospel closely. It is almost certainly by the same author (Introduction to John: Author). While both writings are anonymous, their traditional assignment to John, son of Zebedee, cannot be disproved. It rests on firmer evidence than more speculative proposals, such as John the Elder or John Mark. The emphasis in the opening verse on authoritative proclamation and eyewitness testimony is most naturally seen as a reflection of John’s apostolic calling (John 19:35; 20:3-8; 21:24).
저자
문체나 단어사용, 그리고 내용을 볼 때, 요한일서는 네번째 복음서와 가까운 위치에 있다. 거의 틀림없이 같은 저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 틀림없다(요한복음 서문 참조). 둘 다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저자라는 주장을 배척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다른 주장보다 더 근거가 분명한데, 다른 이들은 좀더 사색적으로 제안하여 장로 요한이나 마가 요한을 저자로 추천하기도 한다. 처음 말문을 여는 곳에서 권위를 가진 선포와 직접 목격한 증인이라는 점을 강조한 점은 가장 자연스럽게 사도 요한의 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요 19:35, 20:3~8, 21:24).
Date and Occasion.
First John was written to warn and instruct the readers about a kind of false teaching that denied Jesus Christ had come in the flesh (4:2, 3). The teaching was that Christ only appeared to be human, so that there was no real incarnation, and no divine Savior who was able to die for sinners. Christ only seemed to die. Such teaching is known from early Christian history and is called “docetism” (from Greek dokeo, “to seem”).
시기와 시대적 배경
요한일서는 독자들을 경고하고 가르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음을 부인하는 거짓 가르침(4:2, 3)을 대비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처럼 보일 뿐 직접적인 성육신은 없었고, 죄인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구세주도 있을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런 가르침은 초대교회 역사에서 “도세티즘(docetism)”이라고 알려졌다(도세티즘은, 헬라어 도께오, “~처럼 보이다”는 말에서 왔다).
Some scholars think that the false teaching was a variety of Gnosticism, a religious movement that connected salvation with an experience of individual, esoteric revelation (gnosis is the Greek word for “knowledge”). An example would be the teaching of the late first-century teacher Cerinthus. Later writers did regard Cerinthus as both Gnostic and docetic, but there is little in 1 John to connect the false teaching opposed there with the specific ideas attributed to Cerinthus, or even to Gnosticism more generally.
어떤 학자들은 생각하기를, 거짓 가르침은 영지주의의 변종이었으며, 이 영지주의는 종교운동으로서 구원이 인간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신비로운 계시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헬라어로 그노시스는 “지식”이라는 말이다). 그 한 가지 예로는 1세기 말에 활동한 교사 케린투스(Cerinthus)의 가르침일 것이다. 훗날 저자들은 케린투스를 영자주의자이면서도 도세티즘옹호론자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일서에서 케린투스의 특징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생각이나 더 일반적으로 영지주의에 반대하는 거짓 가르침과의 연결성은 적다.
Several considerations indicate that I John was written after the Gospel of John. First, it refers very briefly to ideas that the Gospel unfolds much more clearly and fully. Apparently the readers are presumed to have knowledge of the Gospel. Second, the conflict with docetism is absent from the Gospel and appears to be a later development. Third, there is no hint in I John of the ideological conflict with “the Jews” that pervades the first half of the Gospel.
몇몇 고려사항은 요한일서가 요한복음보다 나중에 씌어졌음을 보여준다. 우선, 이 서신은 복음서가 설명하는 생각들보다 훨씬 더 많이 분명하고 충분하게 간략한 생각을 말해준다. 둘째로, 도세티즘과의 갈등은 복음서에는 보이지 않으며 후에 발달한다는 점이다. 셋째로, 요한일서의 유대인들과의 이념적 갈등에 대한 암시가 보이지 않으며 이는 요한복음의 앞부분 절반에 가득한 내용이기도 하다.
The Gospel shows the Christian community painfully distinguishing itself from the Jewish people, while 1 John reflects a later time, when Christian self-identification was well-established and could be presupposed. Another indication for the date of 1 John comes from comparison with the letters of Ignatius (about A.D. 110) and Polycarp. These writings criticize false teachings similar to but more developed than those addressed in 1 John. To accommodate this development, 1 John should be dated some years earlier than 110.
요한복음이 보여주는 바는, 기독교 공동체는 고통스럽게 스스로를 유대인들로부터 구별해야 한다는 것인 반면에, 요한일서는 더 나중 시대를 반영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정체성이 잘 발달되어 있고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요한일서의 시대를 보여주는 또 다른 단서는 이그나티우스와 폴리갑의 편지(약 주후 110년 경)와 비교함으로 얻을 수 있다. 이 글들은 거짓 가르침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잘 발달되어 있다. 이런 발달을 감안할 때, 요한일서는 주후 110년경 이전에 기록된 것이어야 한다.
Characteristics and Themes.
Although 1 John has traditionally been regarded as a letter, it lacks key distinguishing features of a letter (salutation, introductory greeting, final greeting). On the other hand, John addresses the readers as “my little children” (2:1). He seems to be writing to a specific group of people with whom he has a close relationship. In its basic purposes of admonition and instruction, 1 John is similar to most of the New Testament letters. It is notoriously difficult to outline this brief letter. Its themes seem to be linked loosely together.
특징과 주제
비록 요한일서가 전통적으로 편지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편지가 가지는 주요한 특징은 빠져 있다(인사말, 도입 인사, 끝인사). 반면에, 요한은 독자들에게 “내 자녀들아”라고 부른다(2:1). 그는 자신과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에게 편지를 하는 것 같다. 그 기본적인 목적은 경고와 교훈이라는 점에서, 요한일서는 대부분의 신약 서신들과 유사하다. 이런 짧은 편지의 개요를 파악하는 것은 힘들기로 유명하다. 그것의 주제도 서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The language is not difficult or technical, but the ideas are profound. John says that God has been revealed in Christ in order to communicate eternal life to those who believe. God is light, truth, and love-each of these characteristics is the subject of some meditation, but always in connection with the development of corresponding virtues in the believers. The ideals of purity and love that are held out to the reader are gifts of God, communicated from His self-revelation. At the same time, they are real only in action. This reality is possible through being born again and through the forgiveness of sins.
언어는 어렵거나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생각은 심오하다.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으며 그 목적은 믿는 자드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진리시며 사랑이시다. 이 특성의 각각은 사고이 주제를 이루지만, 신자들의 덕이 성장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독자들에게 나눠진 순수함과 사랑에 대한 이상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들은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실제가 된다. 이런 실재성은 중생과 죄 사람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The enemy of the gospel attacks at every point. He impugns the self-revelation of God by trying to deny that Jesus Christ was incarnated. With this he threatens to undermine the believer’s confidence before God. Moreover, the adversary tries to make the case that someone can believe in God without taking part in the love and kindness that is God’s nature. This would make salvation also a mere appearance. To the light and truth of the gospel, the antichrist opposes darkness and lies, or the rule of hatred and mental confusion.
복음의 원수는 모든 점을 공격한다. 그가 배척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인데, 이는 예수님의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려고 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원수는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확신을 파괴하려고 위협한다. 나아가, 그 대적은 누구나 사랑과 친절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사람들을 고소한다. 이것은 구원을 단지 착각으로 만든다. 복음의 빛과 진리를 대적하기 위해, 적그리스도는 어두움과 거짓말로 반대하거나, 증오의 법칙이나 정신적 혼동을 가지고 대적한다.
Unlike those of Paul, John’s ideas are not reasoned logically from point to point. The final statements, that God is light, and that Jesus Christ cleanses us from all sin, are already stated in the first few verses. These he elaborates in a spiritual way throughout what follows.
바울과는 달리, 요한의 생각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논리적으로 잘 짜여진 것은 아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이런 것들이 처음 몇 구절에서 언급된다. 그가 영적인 방식으로 빛내려고 한 이런 방식이 뒤이어 나오는 전반에 걸쳐 있다.
R. C. Sproul; Don Clements. New Geneva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Kindle Locations 1816-1818). Metokos Press. Kindle Edition.
R.C. 스푸로울; 단 클레멘츠가 쓴, 새로운 제네바 신약성경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