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개조>
- 카이사르가 수립하고자 하는 새 질서의 표어로 "클레멘티아(관용)"을 내 걸었다.
- 관용에 반대파들은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이 있는 에스파냐로 모여 듬.
- 키케로는 적극적으로 옛 동지들을 카이사르와의 관계를 회복토록 추진.
<달력 개조>
- 로마인의 달력은 기원전 7세기 제2대 왕 누마가 정비한 태음력이었다.
-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는 문화는 다양해도 문명은 공통이어야 한다고 생각.
달력을 공유하는 것이 문명 통합의 첫 걸음이라고 봄.
이집트인 천문학자와 그리스인 수학자들이 달력 만드는 작업을 맡음.
- 태양력 "율리우스력"이 탄생.
※ 오늘날 달력 "그레고리우스력"은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13세가 개량한 것임.
<통화 개혁>
- 국립 조폐소를 신설하여 원로원이 가져있던 조폐권을 넘김.
- 조폐권을 인정 받고 있는 지방에서는 그 곳에서 주조한 화폐도 통용 됨.
- 카이사르는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분야에서 지방 분권 주의를 인정.
그러나 통치 체제와 법률과 군사, 도로와 상하수도 및 항만 설비로 대표되는 사회 간접 자본 분야에서는 로마식을 관철.
- 카이사르는 확실한 중앙집권주의 자였다. 코스모폴리스 즉 세계국가 창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문다 회전>
-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 그나이우스와 섹스투스 그리고 라비에누스와 바로 등이 에스파냐 원주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 들여 봉기함.
- 카이사르는 군단장 페디우스와 파비우스를 파견하여 방책을 강구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질 않아 반란군의 세력이 점차 확대 되었슴.
- 카이사르가 직접 나선 BC45년 3월 17일 문다 회전으로 마지막 저항을 분쇄
두 군단장과 함께 개선식 거행.
- BC46년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10년 임기의 독재관에 임명.
- BC45년에도 독재관이면서 집정관을 겸임.
동료 집정관은 파비우스를 세웠고 12월 파비우스가 사망하자 트레보니우스로 보충.
<유언장>
- BC58년 유언장 ... 딸 율리아의 남편인 폼페이우스가 상속인으로 되어 있었슴.
- BC45년 유언장은 상속보다는 후계자 지명의 성격이 짙음.
<"제국"으로 가는 길>
- BC202년~BC50년 로마의 고도 성장기
"육체가 먼저 성장해 버린 탓에 내장의 발달이 그것을 미처 따라 가지 못한 시대"
- 카이사르의 "팍스 로마나"의 확립
로마의 패권 밑에 있는 여러 지방의 여러 민족한테까지 질서있는 평화가 미치게 하는 것.
- 우선 여러 제도를 그에 걸맞게 개혁.
- 정책 일체화를 위해 의사 결정 기관을 600명의 원로원에서 단 한 사람의 황제로 바꾸려 함.
<시민권 문제>
- 북 이탈리아 속주(키살피나)의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줌.
그러나 군대 상주를 위해 총독이 부임함.
- 시칠리아 주민들과 남프랑스 속주민에게는 "라틴 시민권" 부여
※ 시민권자가 유리한 점.
직접세 면제
병역 의무는 지원제로 되어 있슴.
로마법 체계의 보호를 받음.
<정치 개혁>
● 원로원
-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 수를 600명에서 900명으로 늘림.
속주에 사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 카이사르 군단의 백인대장드이 대거 참여
중북부 갈리아의 부족장들에게도 원로원 의석 제공
- 원로원은 행정관들을 모아두는 조직이고 독재관인 카이사르의 정치를 보조하는 기관으로 생각
- "회고주의자"인 키케로, 브루투스, 카시우스 등은 이 내용을 정확히 이해는 했지만 찬성은 않음.
● 민회
- 직접민주주의의 기능 발휘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공화정의 상징으로만 남음.
- 민회에서 선출하는 정부 요직도 카이사르가 선정한 인물을 추인하는 것에 그침.
● 호민관
- 카이사르의 개혁으로 "호민관"은 유명무실 해졌슴.
- 카이사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새 질서는 원로원에 기반을 둔 "체제"와 호민관을 기수로 한 "반체제"로 나뉘지 않고, 이 두 파벌의 통합에서 생겨나는ㄴ "새 질서"였다.
※ 황제와 호민관을 겸임한 옥타비아누스, 나중의 이우구스쿠스는 카이사르의 뜻을 계승한 것.
● 종신 독재관
- 카이사르는 독재관이 다음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적합하다고 생각.
① 국내 계급 투쟁의 해소
② 광대한 로마 세계의 효율적인 통치
- BC44년 2월 원로원과 민회는 카이사르를 "종신 독재관"으로 임명.
<금융 개혁>
- 금화와 은화의 교환 비율 고정, 로마화를 기축 통화로 만들려고 함.
- 부채 문제 해결이 경제 활성화의 중요한 요소로 판단
① 내전 이전으로 담보물의 가치를 평가하게 함.
② 이율은 년리 12%로 상한선을 둠.
<행정 개혁>
- 집정관: 독재관과 부 독재관 형태로 되어버림.
- 법무관: 8명에서 16명으로 늘림.
- 회계 감사관: 20명에서 40명으로 늘림.
- 안찰관: 4명에서 6명으로 늘림.
- 지방장관(프라이펙투가)이 있고, 그 지방의 시민권 소유자의 직접선거로 지방의회 의원을 선출.
- 피선거권자
① 병역 무경험자 30세 이상.
② 군단 보병 출신 23세 이상.
③ 기병 내지 백인대장 출신자 20세 이상
- 선거권이 있으나 피선거권이 없는 사람: 범죄자, 위증자, 탈영자, 추방자, 검투사, 배우, 매춘업자
<"해방 노예" 등용>
- 국립 조폐소 "조폐 3인 위원회"의 초대 위원은 카이사르 집안의 노예였다.
카이사르는 노예를 해방시켜 위원으로 임명.
-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가 집정관 시절, 노예라 할지라도 5세 이상의 자녀를 두고 3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은 로마 시민권을 획득핳 수 있게 했다.
- 카이사르는 이들이 관리에 등용될 수 있음을 확실히 정책화 했다.
(속주와 동맹국 약도)
<속주 통치>
- 로마의 동맹국
로마와 상호 안전보장 조약을 맺고, 병역 제공 의무 짐.
직접세는 내지 않고 SOC는 동맹국도 부담.
소아시아의 폰투스와 갈라티아 그 동쪽의 아르메니아, 갈릴레아(유대), 이집트, 마우리타니아 등
- 로마의 속주(18개)
시칠리아 섬, 사르데냐 섬, 코르시카 섬, 먼 에스파냐 와 가까운 에스파냐 등
속주는 행정상의 필요에서 생긴 행정구획에 불과.
총독은 지방장관과는 달리 속주 통치 이외에 방위 의무도 짊어 짐. 방위비 조의 속주세 부담.
속주 의회와 같은 기관도 인정.
(세제와 종교)
- "푸블리카누스" 를 폐지하고 공영 징세 기관을 설치.
- 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를 로마의 주신으로 하고 속주에서는 이 신들의 축일을 휴일로 함.
<사법 개혁>
- 로마의 사법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소권과 배심원이었다.
-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셈프로니우스 법"
어떤 죄를 지은 사람도 재판을 하지 않고 항소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형에 처하는 것을 금지.
단 원로원 최종 권고가 발동되면 예외.
- 카이사르는 "셈프로니우스 법"을 되살렸다.
- BC70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이던 해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법에 따름.
배심원의 구성 비율을 정하기로 함(원로원, 기사, 평민 각 1/3)
- 카이사르는 이 제도를 완전 폐지
4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진 로마 시민이 배심원의 자격 요건이 됨.
- 항소는 민회에 제기하도록 함.
- 정치범에 대한 최고형은 사형이 아니라 추방형으로 함.
- 카이사를는 로마법의 집대성을 하려 했으나 실현을 못 함.
600년 후 동로마제국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으로 실현됨.
<사회 개혁>
● 복지 정책
- 공자로 밀을 배급 받는 사람의 수가 32만명에 이름.
15만명을 최대 인원으로 하고 전담 안찰관을 둠.
세대주의 소득과 가족 수 등을 엄격히 조사토록 함.
● 실업 대책과 식민 정책
- 카이사르는 실업자나 제대 군인에게 토지를 주어 이주 시키는 것을 여러 속주에 분산 시킴.
① 이탈리아 안의 원주민 한테서 땅을 빼앗을 필요가 없음.
② 제국 활성화 기지가 로마 제국 전역에 분산되는 효과.
- 카르타고와 코린트를 무려 100년 만에 부활시킴.
● 조합 대책
- 직능별 조합 "콜레기움"이 정치 조직화 되어 있었슴.
해산해 버리고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는 직능조합으로 재건토록 함.
● 치안 대첵
- 당시 로마 인구 100만명. 수도 경찰을 창설.
● 교통 대책
낮에 시내에서 가마를 탈 수 있는 것은 기혼 부인과 여사제 뿐.
짐수레는 밤에만 다닐 수 있게 함.
● 청소 문제
공공장소의 청소는 안찰관이 담당, 그밖의 장소는 주민들이 청소를 할 의무를 부여.
● 사치 금지법
생선 장수 외에는 양어장에 물고기를 키우지 못하게 함.
<수도 재개발>
" 힘차고 건전한 정신을 가진 로마 자체를 구현"
<카이사르의 포룸>
- Forum이란 고대 로마인에게는 공공생활의 중심지.
- BC55년부터 부지를 매입 BC46년에 "카이사르 포룸"을 완성.
"종교"와 "경제"가 동거하고 있으며 여기에 "문화"와 "교육"이 추가된다. 신전과 오피스가 들어서고 한쪽 끝은 도서관 한쪽에는 학교가 들어섬.
"포로 로마노"의 축소형.
카이사르는 BC6세기부터 제6대 왕 세르비우스가 세운 "세르비우스 성벽"을 파괴했다고 함.
현재의 성벽은 서기 3세기에 세워진 "아우렐리우스 성벽"(무라 아우렐리아나)임.
※ 성벽을 허문 이유
로마의 도심을 확장.
성벽이 없어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지의 표명.
<교사와 의사>
- 카이사르는 수도 로마에서 일하는 교사와 의사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함.
의사에게는 의료설비를 충실하게 갖추어 줌.
교사들에게는 학문을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직장까지 제공 했다.
<그밖의 공공사업>
- 북 이탈리아 라벤니에서 남 이탈리아 브린디시까지 가도를 고속도로화.
- 로마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는 발레리아 가도를 아드리아 해까지 연장.
- 발레리아 가도의 피치노 호를 간척.
-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의 항만 설비 개선.
- 아피아 가도 변 습지대 1만 헥타르를 농경지로 전환.
- 테베레 강의 홍수 방지를 위한 제방 공사.
- 제책법... 두루마리에 밀려 실패.
<카이사르의 특권>
1. 종신 독재관 취임.
2. 필요하면 집정관을 겸임할 수 있는 권리.
3. "임페라토르" 칭호를 언제나 사용 기능.
4. "조국의 아버지"(파테르 파트리아이)라는 칭호를 받는 명예.
5. 자줏빞 망토를 평소에도 입을 수 있는 권리.
6. 평소에도 월계관을 쓸 수 있는 권리.
7. 종신 "프라이펙투스 모룸" (윤리 감찰관)
8. 원로원 회의장에서 집정관보다 한 단 높은 곳에 앉을 수 있는 권리.
9. 극장이나 경기장에서 관중석 중앙의 특별석에 앉음.
10.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 입구 역대 임금들의 입상 사이에 자신의 입상이 놓임
11. 원로원에서 가장 먼저 발언.
12. 로마 국가의 공무원 임명권을 갖임.
13. 거부권과 신체 불가침권.
14. 화폐에 자신의 옆 얼굴을 새길 권리.
15. 생일인 7월에 :율리우스"라는 이름을 붙임. 향후 July로 됨.
16. "카이사르의 관용" (클레멘티아 카이시리스)란 이름의 신전 건립.
<불만을 품은 사람들>
- 키케로
원로원 결의는 카이사르의 머리에서 나옴.
타 종족의 원로원 진출에 불만.
"정치론" 집필 포기, "카토" 간행.
-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 BC44년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공식 발표, 3월 18일 출발키로 결정.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서약을 요구.
"카이사르를 적대시하는 사람은 그들에게도 적이고, 그 적과 맞서서 카이사르를 지키겠다."
"오직 왕만이 파르티아 원정에 성공할 수 있다"는 신탁으로 카이사를가 와위를 노린다고 소문남.
루페르칼리아 축제 참관 중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에게 왕관을 본 뜬 관을 바침.
한 달 뒤인 BC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장에서 카이사르가 살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