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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이 꿈에 나타났다"며 풍납토성 복원 의지 밝힌 박원순 서울시장
“우연히 어제 밤에 백제왕이 꿈에 나타났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래서 오늘 직원들과 함께 한성백제박물관과 풍납토성 일대를 둘러보고 결심했습니다.
여기를 제대로 보상, 발굴하여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겠다고 말입니다.”
풍납토성 일대 복원 계획은 1993년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추진키로 한 바 있으나 보상예산 문제로 유보되어 왔다. (2015.5.19. 조선일보,한국일보) |
▷ 주요 유적 - 몽촌토성, 풍납토성, 송파구 석촌동의 적석총, 방이동의 고분군, 아차산성
유적 살펴보기
고대 사회의 고분(古墳:역사적 가치가 있는 옛 무덤)은 대체로 도읍지를 중심으로 주변에 무리지어 있다. 이러한 사례를 우리는 서울에 있는 백제의 고분군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무덤을 잘 살펴보면 평지나 구릉의 경사면에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대체로 평지에는 ‘돌무지 무덤(적석총, 積石塚)’이나 ‘널무덤(토광묘, 土壙墓)’ ‘독무덤(옹관묘, 甕棺墓)’으로 분류되는 봉토분(封土墳)이 있고, 반면에 구릉의 경사면에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 橫穴式 石室墳)’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성시대 방이동 고분군이나 공주시대 송산리 고분군, 부여시대 능산리 고분군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백제는 중, 후기로 갈수록 무덤을 구릉의 경사면에 ‘굴식돌방무덤’으로 만들었다.
석촌동 백제 고분군
석촌동 백제 고분군은 백제가 한강 하류인 한성에 도읍을 정하고 475년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축조한 백제 전기 고분군이다.
남한땅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분묘형태일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조사된 한성백제 시대의 다양한 무덤 형식 가운데 돌무지 무덤이 가장 규모가 크다.
대표적인 고구려의 영향을 받는 한성백제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지배계급이 온조계 사람들임을 증명해주는 무덤이기도 하다.
이곳은 1916년 일본인에 의해 극히 간략하게 조사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매우 많은 수의 ‘돌무지 무덤’이 남아 있었다. 석촌동이라는 마을이 순수 우리 이름으로 ‘돌마리’라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이곳에 많은 수의 돌무지 무덤이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석촌동 제3호분과 제4호분인 돌무지 무덤 2기와 제5호분인 봉토분 1기가 남아 있고 그 사이에 10여기의 돌무지무덤, 돌덧널무덤 같은 초기 고분의 잔구가 있을 뿐이다.
우리 학술 조사단에 의해서는 1969년과 1974년, 1986년에 조사되었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하자.석촌동 3호분은 고구려 돌무지무덤과 같은 형식이며,
기원전후부터 고구려 무덤 형식에서 나타난 ‘기단식 돌무지 무덤’이다. 무덤의 축조 과정은 약간 높은 지형을 평탄하게 40~40cm 두께로 진흙을 깔고 다진 다음, 자갈을 20~30cm 정도로 고르게 깔아 바닥면을 정지하였다.
밑테두리에는 크고 긴 자연괴석이나 포갠돌을 수평으로 깔아 네모단(방단, 方壇)을 마련하였으며 층단을 이루면서 자연석을 쌓아올려 3단이 되었는데 파괴가 심해 고분 전체 규모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현재 복원된 상태로 보아 제3호분은 압록강 유역 집안 지방에 있는 장군총에 버금가는 큰 규모이다.
그 크기는 동서 50.8m, 남북 48.4m, 현재 높이 4.5m로 대형급의 돌무지 무덤이다. 발굴 조사를 하면서 서남쪽 부분에서 2m x 1.5m x 0.8m 규모의 덜덧널(석곽, 石槨) 확인되었다. ☞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3호분 내부 동쪽의 대형 널무덤의 윗층에는 널무덤과 독무덤이, 그 아래층에는 대형 널무덤이 발굴되었습니다.
그중 대형 널무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특이한 형태의 무덤 양식으로, 제일 아래층에는 점토층을 파내고 그 안에 여러 개의 나무널을 안치한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장군총은 하단의 한 변이 30m, 층단이 일곱 단에 전체 높이 11.28m에 이르는 장대한 무덤이다. 반면 3호분이 하단이 50m에 달하는 반면 높이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우선 장군총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3호분과 비교하며 백제문화와 고구려문화의 미적 감각의 차이를 비교해봅시다.
제4호분은 3호분과는 달리 우선 8.7m x 8.7m x 2m를 다져서 쌓아올린 점토 방형체의 4면에 석벽을 쌓아 제2방단을 만들었다. 그 다음 제2방단의 바깥쪽에 덧붙인 것 같이 석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쌓은 뒤 제3방단을 제2방단 위에 쌓아 ‘제3방단 계단식 분구’가 되도록 축조하였다.
그리고 각 방단에 돌을 쌓을 때 맨 아래에 포갠돌을 놓고 그 위에 10cm 정도 두께로 자갈을 깔고 그 위에 다시 포갠돌을 놓는 방식으로 쌓았다. 각 방단의 측면은 포갠돌의 평편한 면을 맞춰 쌓았다.
제1방단이 1변의 길이가 17.2m, 높이 52cm, 2단은 길이 13.2m, 높이 95cm, 3단은 길이 9.2m, 높이 45cm 인 정방형으로 맨위의 둥그스름한 봉분 70cm의 높이를 합하면, 무덤 전체 높이는 3m가 채 되지 않는다.
4호분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제2방단의 동쪽 측면에 세워져 있는 5개의 자연석과 북쪽 측면의 동쪽 모서리에 세워져 있는 1개의 자연석이다. 이런 형식은 중국 집안지방에 있는 장군총과 태왕릉이 있는데 주술적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고, 시베리아 지방 분묘의 전통이라는 전파설이 있다.
☞ 3호분과 4호분을 비교해보면서 차이점을 얘기해봅시다. 3호분이 돌로 쌓았다면, 4호분을 가운데 흙을 쌓고 바깥으로 석축을 보강한 것입니다. 물론 맨 위는 봉분처럼 만들어놓았구요.
다시 말해 한성시대 백제의 무덤을 크게 돌무지 무덤 계열과 흙무덤 계열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중 돌무지 무덤은 고구려 계통의 이주세력들의 무덤 형식이고, 흙무덤 계열은 토착세력의 무덤 형식입니다.
4호분처럼 내부는 전통적인 널무덤이면서 외부는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입니다. 이러한 이중적 무덤형식을 통해 우리는 한성백제시대 이주세력과 토착세력의 결합 속에서 지배계급의 변화 뿐만 아니라 문화양식의 변화도 감지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1호분은 북쪽과 남쪽으로 두 개의 무덤이 나란히 놓여 있는 쌍분이지만 내부 구조는 서로 다르다. 남분은 돌덧널을 가진 전형적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이고, 북분은 석축 내부가 점토로 채워진 백제식 돌무지무덤이다.
학자들은 이를 부부합장묘로 추정하면서, 북분은 토착계 부인의 무덤으로 먼저 죽으면서 먼저 토착민의 전통적인 널무덤으로 하되,
외부는 나중에 고구려계 남편의 무덤과 쌍분을 만들 계획 아래 돌무지 무덤으로 만들면서 나중에 죽은 남편의 고구려식 돌덧널무덤과 합친 것으로 추측한다.
제5호분은 겉으로 보기에는 큰 흙무덤으로 보인다. 하지만 발굴 조사해본 결과 무덤의 주인공은 여럿으로 이들은 하나의 단일한 봉토로 덮어나가다가 봉토 중간에 마치 지붕을 덮듯이 돌로 한 겹 봉토를 덮고 다시 그 위에 흙을 얹어 봉분을 마무리하였다. 흔히 즙석봉토분(葺石封土墳)이라 한다.
가락동과 석촌동 등 한성시대 초기 백제무덤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식으로 봉토중간을 돌로 덮은 이런 형식의 무덤은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영향을 받은 토착민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무덤의 규모로 모아 주인공은 상당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여러 사람을 동시에 매장한 것으로 보아 가족묘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내외원방분과 제2호분등이 있고, 이들 큰 무덤 사이사이로 자그마한 움무덤(토광묘 土壙墓, 널무덤)이 많이 있는데 이는 한성백제가 끝난 뒤에도 이곳에 살던 토착민들은 계속 정착해 살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단초이다.
다시 말해 석촌동 고분군은 돌무지무덤으로 대표되는 한성시대 백제 지배층의 공동묘역이자 백성들의 최후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곳이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다시 한번 석촌동 고분군과 그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해봅시다.
방이동 백제 고분군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식 무덤이라고 할 경우에 그것은 백제 웅진 시대의 공주 송산리 고분군과 사비시대의 부여 능산리 고분군으로 대표되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 橫穴式 石室墳 )이다.
하지만 앞서 석촌동 고분군에서도 보았지만 한성백제 초기의 무덤은 평지의 돌무지무덤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웅진시대와 사비시대의 구릉 경사면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변화되어 갔는지를 밝혀주는 열쇠고리가 바로 방이동 백제 고분군이다. 이런 점에서 방이동 백제 고분군은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며 송산리 고분군의 주인공들인 백제 지배계층이 한성시대 백제지배계층과 그대로 연결됨을 밝혀주고 있다.
방이동 고분군은 1971년과 1975년~76년에 일부 발굴, 조사되었다. 방이동 고분은 봉분의 형태가 모두 원형이고, 내부 구조는 두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가 ‘굴식돌방무덤’으로 대부분 이러한 형식이고, 지금은 도식계획에 따른 도로공사로 없어진 제5호분이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분 竪穴式 石槨墳)이다.
굴식돌방무덤이라 하면 널길이 달린 방형 또는 장방형의 돌방무덤으로 고구려 고분의 전총과 연결되는 무덤이다. 특히 제1호분은 백제 중기 도읍지인 공주의 송산리 제5호분과 그 구조와 형식이 흡사하다.
이러한 양식은 5세기 중엽의 일본 북큐슈지방의 고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곧 백제 문화가 일본의 고대 문화에 미친 영향을 밝히는 데에도 그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제6호분은 방이동 고분군 중에서 제일 낮은 지대에 있다. 굴식돌방무덤으로 특이한 점은 돌방(남북 2.88m, 동서 2.28m) 중간에 돌벽을 쌓아 서쪽과 동쪽에 각각 무덤방을 만들고 중간벽의 북단에 큰돌 크기(16 x 36cm)의 영공(靈孔:부부 합장묘에서 창을 뚫어 부부의 혼이 소통할 수 있게 한 것과 같은 구조)이 뚫려 있다.
이곳의 유물은 이미 도굴되고 남은 것으로는 2점의 사람뼈와 전형적인 신라토기인 회청색의 굽다리 접시가 나왔다. 이는 백제와 신라가 교역했음을 알려준다.
몽촌토성
풍납토성과 함께 한성백제시대의 왕궁이었던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밝혀주는 귀중한 단서를 제공해주는 것이 몽촌토성이다.
남한산에서 뻗어내린 최고 높이 44.8m인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구릉이 낮거나 끊긴 부분에만 판축 기법을 이용해 입자가 곱고 잘 들러붙는 점토를 5~10cm 두께로 차곡차곡 올려쌓은 산성이자 토성이다.
규모는 풍납토성의 반 정도로 면적이 13만6천여평, 전체 성벽의 길이는 총2,285m로 남북이 동서보다 약간 긴 마름모꼴 형태이다.
성벽의 높이는 현재 10~13m 정도이지만 성벽의 바닥이 지금보다 2~4m 아래에 있고, 그동안의 풍화작용을 감안한다면 원래 높이는 13~18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성 옆 북동쪽으로는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이 자연적 방어선으로 감싸고 있고, 서북벽과 동벽 아래로는 목책과 해자를 설치,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토성으로 통하는 문은 4개였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현재로는 북문과 동문, 남문터를 추정, 확인했을 뿐이다.
풍납토성은 발굴된 풍부한 기와와 전돌들로 인해 왕궁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몽촌토성은 출토유물이나 내부 시설, 축조방법 등에서 초기 한성시대를 대표하는 성곽 정도로 추정될 뿐 구체적으로 이 성곽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중국 서진시대(265~316)의 회유전문토기가 나와 몽촌토성의 축성연대가 늦어도 3세기말 이전이라는 점 외에는 정확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고구려 토기가 적지 않게 발굴되어 한성 백제의 멸망 후 한동안 고구려에 의해 점령,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아차산성
아차산 정상에 올라가보면 천호대교 건너편에 있는 풍납토성과 조금전 우리가 돌아보고 온 몽촌토성과 석촌동과 방이동 고분군들이, 지금은 높은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음 속으로 건물들을 걷어낸다면, 한강 너머로 훤히 드러나 보이는 위치에 있다.
다시 말해 백제가 북쪽의 적인 고구려로부터 도읍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아차산 방어가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한강변을 따라 조성된 서울은 4계절이 뚜렷하되 항상 기후가 온화하고 너른 평야지대라 살기가 매우 좋은 곳이다.
백제는 바로 이러한 곳에 자리잡고 국력을 튼튼히 할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위로는 고구려와 아래로는 신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아야 했다.
아차산성은 옛날 고구려, 백제가 한강을 두고 뺏고 빼앗기는 혈투를 되풀이하던,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아차산은 비록 해발 203m밖에 되지 않는 산이지만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이 백제가 평지에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면 아차산성은 산에 머리띠를 두르는 쌓은 테뫼식과 골짜기를 포함하여 쌓는 포곡식(包谷式)의 중간형태인 산복식(山腹式)의 백제 산성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성벽은 협축(夾築)이라 하여 성벽의 안팎을 가지런히 쌓아올리면서 그 사이를 돌이나 흙으로 채우는 방법과 흙을 깎아 내어 대강의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쪽에 돌로 켜를 지어 쌓아올리는 이른바 삭토법(削土法)을 지형에 따라 적절히 혼합하여 완성한 토석혼축식(土石混築式)이다.
요충지마다 보루가 있을뿐더러 곳곳에 범상치 않은 돌덧널무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투의 치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홍련봉 보루의 경우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세워진, 남한내 보기 드문 고구려 유적이다.
홍련봉과 아차산성을 경계로 하여 고구려군과 백제군이 대치하여 싸우다가 결국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고, 백제 멸망 후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다가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추정 근거로는 아차산성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유물이 동시에 출토되고, 홍련봉 보루에서는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의 유적과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아차산이 지금은 도시민들의 산책로로, 휴식처로 자리잡고 있지만 천오백여년전 이곳은 삼국의 치열한 각축장이었음을 기억하며, 온달장군의 주먹바위와 평강공주의 통곡바위 등 범상치 않은 돌덩이들에 새겨진 전설을 함께 되새겨보며 하루의 답사 일정을 마무리하자.
<출처 : 2004년 家苑 어린이.학부모 문화유적답사 안내 프로그램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