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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宣王이 問曰人皆謂我毁明堂이라하나니 毁諸아 己乎잇가 孟子對曰夫明堂者는 王者之堂也니 王欲行王政則勿毁之矣소서 王曰王政을 可得聞與잇가 對曰昔者文王之治岐也에 耕者를 九一하며 仕者를 世祿하며 關市를 譏而不征하며 澤梁을 無禁하며 罪人을 不孥하더시니 老而無妻曰鰥이오 老而無夫曰寡요 老而無子曰獨이오 幼而無父曰孤니 此四者는 天下之窮民而無告者어늘 文王이 發政施仁하시되 必先斯四者하시니 詩云哿矣富人이어니와 哀此煢獨이라하니이다
王曰善哉라 言乎여 曰王如善之則何爲不行이니잇고 王曰寡人이 有疾하니 寡人은 好貨하노이다 對曰昔者에 公劉 好貨하더시니 詩云乃積乃倉이어늘 乃裹餱糧을 于橐于囊하여 思戢用光하여 弓矢斯張하며 干戈戚揚으로 爰方啓行이라하니 故로 居者有積倉하며 行者有裹糧也然後에야 可以爰方啓行이니 王如好貨어시든 與百姓同之하시면 於王에 何有리잇고
王曰寡人이 有疾하니 寡人은 好色하노이다 對曰昔者에 大王이 好色하사 愛厥妃하더시니 詩云古公亶父 來朝走馬하사 率西水滸하여 至於岐下하여 爰及姜女로 聿來胥宇라하니 當是時也하여 內無怨女하며 外無曠夫하니 王如好色이어시든 與百姓同之하시면 於王에 何有리잇고
<家苑 譯>
제선왕이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다 나에게 명당을 헐라하는데, 헐까요? 말까요?” 맹자 대답하여 가라사대, “무릇 명당은 왕자의 집이니, 왕께서 왕정을 행하려 하신다면 헐지 마소서!” 왕 가라사대, “왕정을 들을 수 있습니까?”
(맹자) 대답하여 가라사대, “옛적에 문왕이 기산을 다스림에 밭가는 것을 구분의 일로 하였고, 벼슬하는 자를 세대로 녹을 주었으며, 관문과 시장을 살피기만 하고 세금을 거두지 아니했으며, 못의 어량을 막지 않았으며, 사람에게 죄줌을 자식까지 하지 않으시더니, 늙어서 아내 없음을 홀아비라 하고, 늙어서 남편 없음을 과부라 하고, 늙어서 자식 없음을 독거라 하고, 어려서 아비 없음을 고아라 하니, 이 넷(鰥寡獨孤)은 천하의 궁한 백성이며 고할 데가 없는 자이거늘, 문왕께서 정사를 펴서 仁을 베푸시는데 반드시 이 넷을 먼저 하셨으니, 시(小雅 正月편)에 이르기를 ‘괜찮은 것은 부자이거니와 불쌍하고 홀로된 이가 가엾도다.’고 하였나이다.”
왕 가라사대, “훌륭하도다. 말씀이여!” 가라사대, “왕이 훌륭하게 여기신다면 어찌 행하지 않으시나이까?” 왕 가라사대, “과인에게 병이 있으니, 과인이 재물을 좋아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옛적에 공류가 재물을 좋아하시더니, 시(大雅 公劉편)에 이르기를, ‘노적을 쌓고 곳집에 쌓거늘 마른밥과 양식을 싸기를 전대에도 하고 자루에도 하고서 (백성의) 화목함을 생각함으로써 빛나시어 활과 화살을 매며 방패와 창과 작은 도끼와 큰 도끼를 챙겨서 이에 비로소 길을 떠나셨다.’하니, 그러므로 거처하는 자는 곡식을 쌓아둔 창고가 있고, 길을 떠나는 자는 식량을 싼 연후에야 이에 비로소 길을 떠나니, 만약 왕께서 재물을 좋아하시거든 백성과 함께 하시면 왕 하심에 무엇이 있겠나이까?”
왕 가라사대, “과인에게 병이 있으니, 과인은 색을 좋아합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옛적에 태왕이 색을 좋아하시어 그 비를 사랑하시더니, 시(大雅 緜편)에 이르기를 ‘고공단보가 아침에 말을 달려와서 서쪽 물가를 따라 기산 아래에 이르시니 이에 강녀와 더불어 마침내 집터를 보셨다.’ 하니, 이때를 당하여 안으로는 원망하는 여자가 없었으며 밖으로는 짝 없는 남자가 없었으니, 왕께서 만약 색을 좋아하시거든 백성과 함께 하시면 왕 하심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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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註>
梁 어량(魚梁, 물살을 가로막고 물길을 한쪽으로만 터놓은 다음에 통발이나 발을 쳐서 물고기를 잡는 장치) 량 孥 자식 노, 처자(妻子) 노 鰥 홀아비 환 哿 좋을 가, 옳을 가 煢 외로울 경 裹 쌀(包裝) 과, 꾸러미 과 餱 마른 밥 후, 간량(乾糧) 후 橐 풀무 탁, (밑 없는) 전대 탁 囊 (밑 있는) 주머니 낭 戢 화할 집, 모을 집 戚 도끼 척 揚 도끼 양(부록 그림 참조) 率 따를 솔 滸 물가 호 聿 마침내 율 胥 서로 서 宇 집 우, 거할 우 曠 빌 광
* 明堂은 五嶽중 하나인 東쪽 泰山의 명당으로, 주나라 천자가 동쪽으로 순수하면서 하늘에 제를 지내기 위해 머물면서 제후를 조회한 곳이다. 많은 인원이 거처해야 했으므로 그 규모가 제법 컸을 듯하다.
* 王政은 ‘王道政治’를 뜻하는 말로 맹자가 이곳에서 처음 거론했고, 등문공하편 제5장에서도 썼다. 王道는 『서경』홍범편에 뒤이어 앞서 양혜왕상편 제3장에서 “養生喪死 無憾 王道之始也”라고 거론되었다. 그 외에는 대부분이 왕도정치의 구체적 내용을 설명하면서 “然而不王者 未之有也”(양혜왕상편 제3장과 제7장의 끝부분, 양혜왕하편 제4장, 공손추상편 제5장, 고자하편 제4장)라고 했고, 위에서처럼 “於王 何有”라는 말로 갈음하였다.
* “耕者 九一”은 공손추상편 제5장, 등문공상편 제3장과 부록 참조.
* “仕者 世祿”은 만장하편 제2장 참조.
* “關市 譏而不征”은 공손추상편 제5장 참조.
* “詩云哿矣富人이어니와 哀此煢獨이라”는 『시경』 小雅 正月편 제13장의 끝부분의 노랫말로, 주나라가 幽王의 어지러운 시기를 맞아 대부가 때를 한탄하며 근심하는 내용이다.
* “詩云乃積乃倉이어늘 乃裹餱糧을 于橐于囊이오아 思戢用光하여 弓矢斯張하며 干戈戚揚으로 爰方啓行이라”는 大雅 公劉편 제1장의 내용으로 后稷의 曾孫인 公劉가 邰(태)땅에서 豳(=邠, 빈)으로 옮기는 첫 과정을 노래한 시이다. 현재 시에서는 乃자는 迺로 戢자는 輯으로 전한다. 이 시의 배경은 주나라의 무왕이 죽고 성왕이 친정(親政)을 시작할 즈음에 召康公(名은 奭, 召公, 召伯이라고도 함. 燕땅에 봉해졌으나 낙읍 경영으로 바빠 대신 장자가 부임)이 조상인 공류의 일로써 빗대어 경계시켰다.
* “詩云古公亶父 來朝走馬하사 率西水滸하여 至於岐下하여 爰及姜女로 聿來胥宇라”는 大雅 緜(면)편 제2장의 내용으로, 고공단보가 豳땅에 거주하다가 계속되는 狄人들의 침탈을 피해 梁山을 넘어 岐山 아래에 도읍지를 정하는 과정을 노래한 시이다. 이 시의 배경은 양혜왕하편 제15장에 잘 나타나 있다.
* “內無怨女 外無曠夫”는 남녀를 內外로 구분하여 시집 못 가고 장가 못가서 밤을 홀로 지키며 원망하는 여자도 없고, 텅 빈 방을 홀로 지키는 남자도 없이 모두 一夫一妻의 가정을 꾸리고 화목하게 살게 했다는 뜻이다. 이 내용은 훗날 위세 부리는 남성들의 축첩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쓰였다. 前漢 宣帝(在位 기원전 74 ~ 59년) 때 桓寬이 정리한 『鹽鐵論(염철론)』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옛적에 부부의 좋음이란 한 남자에 한 여자로 실가의 도를 이룸인데, 뒤에 이르러 士는 (본부인 외에) 첩 하나를 두고, 대부는 둘을 두고, 제후는 외동서들 아홉 여자를 두었을 뿐이라. 지금 제후들은 백여 명을 헤아리고, 경대부는 십 여 명을 헤아리고, 중간층은 몸종들을 거느리고, 부자들은 집안을 가득 채웠으니, 이로써 여자들은 혹 빈방을 원망하면서 때를 놓치고, 남자들은 혹 떠돌다가 짝도 없이 죽었다(古者에 夫婦之好는 一男一女而成家室之道한대 及後에 士一妾하고 大夫二하고 諸侯有姪娣九女而已라 今諸侯百數요 卿大夫十數요 中者侍御요 富者盈室하니 是以女或曠怨失時하고 男或放死無匹이라).”했다. 참고로 漢나라 초기에 국가의 막대한 재원들이 거의 대부분 제후 및 개국공신들과 지방의 토호세력들에게 장악되자 武帝가 이를 타파하고 황제 권력을 바로 세웠다. 하지만 무제가 죽은 뒤 이의 존손 여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기원전 81년), 이를 정리한 것이 『염철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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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說>
앞서 제4장에서 전국시대에 이르러 과거 왕이 善政의 방법으로 삼았던 巡守는 없어져 버린 사실이 언급되었다. 한편으로는 제후들이 부국강병을 추구하느라 지방 순시를 통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 한편 백성들로부터 물자를 징발하거나 세금을 독촉하면서 접대 받는데 치중했기에 巡狩는 오히려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는 ‘流連荒亡’으로 변질되었다. 맹자는 제선왕에게 제경공의 사례를 들어 위정자의 민정시찰이 백성의 생업을 확인하고 보장해 주는데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 곧 왕도정치라고 하였다.
마침 제선왕이 맹자에게 태산에 있는 명당의 철거문제를 상의했다. 태산은 본래 춘추시대에는 노나라 영역이었는데 아마 이때 제나라가 이 지역을 병합한 듯하다. 태산의 명당은 천자가 순수하면서 하늘에 제사도 지내고 제후들도 조회하기 위해 마련된 곳이므로 제법 규모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천자가 巡狩하지도 않고 관리하는 제후도 없는데다 너무 오래되어 흉물스럽게 되었기에 이의 처리 방안을 의논하게 된 것이다. 일부에서 철거하자고 했으나 제선왕으로서는 선왕들의 자취가 남아있기에 함부로 할 수 없었다. 以羊易牛의 不忍之心이 있는 제선왕이었기에 맹자는 얼른 ‘명당은 왕자의 집’이라고 하면서 나름 ‘王者’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제선왕의 마음을 일깨우면서 문왕의 仁政을 들었다. 이는 마치 춘추시대 들어 초하루에 양을 희생으로 하여 제를 지낸 뒤 책력을 돌리던 의식이 없어지자 子貢이 곡삭(告朔)용의 희생 처리를 물었을 때 공자가 ‘나는 禮를 아낀다.’는 말로 답한 것과 같다(子貢이 欲去告朔之餼羊한대 子曰賜也아 爾愛其羊가 我愛其禮하노라 - 『논어』 팔일편 제18장).
맹자는 정전법을 통해 경작자인 백성에게 생업을 보장해주고, 물가통제와 세금경감을 통해서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또한 생계를 위한 고기잡이를 허용하고, 범죄에 대해선 연좌제를 폐지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민생을 보장하기 위해 취하는 이러한 모든 조치로부터도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는 별도의 구휼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즉 오늘날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보장과 복지 개념이다.
맹자의 王政 방안을 듣자 제선왕은 겉으로는 훌륭한 말씀이라고 하면서 의중은 딴 데 있음을 드러냈다. 즉 자신은 제나라가 천하의 盟主를 넘어 통일국가의 왕, 곧 천자가 되려면 재화가 많이 필요하기에 복지비용에 국가의 재원을 낭비할 수 없다는 투로 好貨를 말했다. 하지만 맹자는 시를 인용해 백성들을 위해 태땅에서 빈땅으로 옮긴 后稷의 후손인 公劉의 사례를 들었다. 그 뜻은 백성들의 주거를 보장해주고 생업활동을 장려하여 백성들의 물자가 풍족해지면 그에 따라 국가의 財源도당연히 늘게 됨을 담은 내용이다.
이 내용은 노나라 애공과 유약의 문답과 같은 맥락이다. 애공은 공자의 수제자인 유약에게 국가의 물자가 부족하여 세금을 더 걷어야겠다고 묻자 유약은 “백성이 족하면 인군이 누구와 더불어 부족할 것이며, 백성이 족하지 못하면 인군이 누구와 더불어 족하겠습니까?(哀公이 問於有若曰年饑用不足하니 如之何오 有若이 對曰盍徹乎시니잇고 曰二도 吾猶不足이어니 如之何其徹也리오 對曰百姓이 足이면 君孰與不足이며 百姓이 不足이면 君孰與足이리잇고 - 논어 안연편 제9장)”라며 국가의 자원을 늘리려면 오히려 정전법인 徹法을 제대로 시행하여야 한다고 간언했다.
맹자의 달변(達辯)에 궁색해진 제선왕이 급기야 자신은 ‘여색을 밝힌다(女色).’고 하면서 화제를 돌리려 했다. 제선왕은 여색을 좋아하다 패망한 군주가 많은 역사적 사례를 의식하고 맹자에게 아예 자신에게 더 이상 왕도정치에 대해 논하지 말라는 입막음용 답변이다. 여기서 王道의 유세를 꺾을 맹자가 아니었다. 태왕으로 추존된 고공단보의 사례를 시를 통해 摘示했다. 때가 차서 남녀가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제선왕에게 혼자만 많은 여자를 거느려서 怨女와 曠夫가 없도록 하여 ‘與民同樂’할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고공단보가 室家를 두지 못하다가 기산으로 옮길 즈음에 姜女를 사랑하여 姜女와 함께 한 내용을 이끌어, 맹자는 진정으로 色을 좋아하면 荒淫無道함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고공단보와 강녀처럼 함께 백성들 일을 살피면서 백성 가운데 室家를 두지 못한 자까지를 헤아릴 줄 알아야 왕 할 자격이 있다고 받아친 것이다.
맹자는 제선왕에게서 나름 옛 성현의 글을 좋아하면서 不忍人之心의 실마리를 보았다. 그러하기에 王이라 칭함을 구실로 好樂을 시작으로 하여 與民同樂의 王政을 열도록 시도하였고, 好勇과 好貨와 好色으로 회피하려는 제선왕을 붙잡아 일일이 역사적 사례까지 제시하며 왕도정치로 이끌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맹자는 갈수록 더욱 이끗만을 다투는 시기에 位를 갖지 못한 채 유세만으로는 당시 군주들의 仁政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더욱 요원해짐을 절감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출처 : 孟子易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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