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누나들
최 방식
유월 초순 이지만 날씨는 한 여름이다. 금년 일월 코로나19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전 누나들과 샤브사브 집에서 점심 식사를 한지 오 개월이 지났다. 코로나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어 확진 자들이 줄어들자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로 바뀌었다. 어제 둘째 누나가 코로나 재해지원금을 받았으니 식사를 하자며 전화가 왔다.
“내가 먼저 전화를 해야 하는데 누나가 먼저 하셨네요. 이번 식사는 내가 사겠다”고 말하자
“이번에는 누나가 사고 다음번에 동생이 사라”며 전화를 끊었다.
여든 살을 앞둔 둘째 누나의 전화를 받고서야 큰누나에게 전화를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여든 중반의 큰 누나는 보조휠체어에 몸을 의존하며 근근이 거동을 한다. 같은 동洞에 살고 있어 식사를 하기 위해 모시러 가면 부축을 하고 겨우 차에 올라 매번 미안해서 하는 말이 “너희들끼리 가라 내가 너그들 번거롭게 하고 성가시게 하는데 뭐 하러 데리러 왔노?” 하신다.
“그래도 오랜만에 모여 식사를 하는데 큰 누나가 빠지면 서운하지요”하고 말하면, “아이고 마 그냥 너희끼리 가지.”하며 마음에 없는 말을 하며 함께 모이는 것을 은근히 좋아하신다. 오래전 무릎을 수술하고 혼자 사시지만 정신도 맑고 기억력이 또렷하니 감사하다. 큰 누나와 나는 열 일곱 살이나 차이가 난다. 어머니가 열여덟 살에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으니 엄마뻘이다. 내가 어릴 때 누나를 따라 시장에 가면 사람들이 가끔 아들이냐고 물었단다. 엄마가 장사하러 나가시면 큰 누나가 살림을 살며 여러 동생들과 나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혼을 하여 자형이 공무원 이었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인하여 일찍 사별을 하여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고, 어린 자식들을 키우면서 고생을 많이 한 누나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자식은 내명을 두었고 아들은 직장 따라 수도권에 살고 있어 내가 자주 전화도 하고 찾아가 봐야 하는데 잊어버리고 살 때가 더 많다. 다행히 딸들이 부산에 살고 있어 전화도 하고 종종 부식을 사오거나 반찬을 만들어 돌봐주고 위로해 주어 자식 도리를 해주니 고맙다. 이래서 부모가 늙어지면 자식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지난달 점심을 대접하려고 계획을 했다가 코로나 때문에 취소했는데, 둘째 누나의 전화로 식사 모임을 갖게 되었다. 예약한 식당은 코로나 때문인지 손님이 뜸해 넉넉하게 자리 잡고 앉았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둘째 누나를 보니 건강이 눈에 띄게 안 좋아 보였다. 작년 가을 허리수술을 하고 경과가 좋았는데 오늘 보니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한다. 어릴 적에는 가난하여 고생을 많이 했지만 이제는 아들 딸들도 출가를 하고 물질적으로 풍요 속에 살지만 건강이 받쳐주지 못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누나들과 격월 마다 식사를 했었는데, 코로나가 발생하자 가족끼리 식사모임도 기약 없이 연기 되었다. 식사 모임이 있을 때에는 아내와 나는 우스개로 오늘도 위험한 상견례를 하러 간다며 웃었다. 누나들이 처음 만나면 반가워서 화기애애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다 가는 지난 날 서로 간 섭섭했던 얘기들을 하면 어느새 냉전의 기류가 흐르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분위기를 얼어 붙게 만드는데, 어떤 때는 일촉즉발 위기 상태로 간적이 한 두 번 아니었다. 그때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나와 아내는 진땀을 흘렸었다.
강한 기질을 물려받은 경주 최 씨 집안의 딸들이 아니라 할까봐 다들 개성과 자존심이 강하다. 결혼 후 자식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서서히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가정사 모두 주도권을 쥐는 모습이다. 심지어 내 딸도 최 씨의 유전자 이어 받아서 그런지, 결혼하여 손자가 태어나자 어느새 사위보다 딸의 입김이 더 센 것 같아 보인다. 집안의 내림 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누나들을 만나 보니 세월의 흐름 속에 조금씩 늙어 가는지 말 수가 적어졌다. 예전처럼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 탓인지 위험한 상견례의 광경은 사라졌다. 누나들의 나누는 대화가 부드러워 졌고 기력이 예전 보다 떨어지니 말의 기세도 떨어져 버린 것 같았다.
셋째 누나도 칠순을 넘겼다. 셋째 누나를 생각하면 어릴 때 내가 철이 없어 고의적으로 심술을 많이 부리고 다투어 미안한 생각이 든다. 미녀인 누나는 성미가 급한 탓인지 학창시절에 잘 넘어져서 무릎에 반창고를 늘 붙이고 다녔다. 그래서 한 때 누나는 먼 산을 보다가 잘 넘어 진다 하여 ‘먼 산’이라고 별명을 부른 적이 있었다.
결혼 전 누나는 화장을 조금 짙게 하였고 나는 짙은 화장을 하는 누나를 싫어했다. 마침 선을 보러 가야 하는일이 생겼다. 당시에는 관습인지 모르지만 처녀가 선을 볼 때에 아버지나 오빠나 남자가 동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 가셨고 사촌 형님을 부르기도 어렵고 동생인 내가 갈 수 밖에 없었다. 범생이인 나는 짙은 화장과 매니큐어와 속눈썹을 붙이면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누나는 몇 번 나를 설득 하였지만 소용이 없자 하는 수 없이 매니큐어도 지우고 기초화장만 하여 선을 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다.
이런저런 옛이야기를 하면서 원망하고 미워했던 지난날도 덧없이 지나가고, 아등바등 힘겨운 삶을 살았던 세월도 다 지나가고, 격랑의 순간들도 묻혀 지나 갔으니 모처럼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며 아름다운 추억의 노트를 한장 한장 넘기고 있다.
해는 서산마루 위에 걸려 있고 퇴색되어 가는 기억 속에 가족애가 녹아있는 추억을 이야기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들 잘 알고 있다. 삶의 여정에서 가족이라는 묶음 속에 젊은 날의 미움과 다툼이 이제는 사랑으로 다가와 흑백사진 속의 추억처럼 아름답게 다가온다. 자주 만나고 싶지만 코로나 때문에 다음 만남은 기약도 없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가 자주 만난다 해도 몇 번이나 더 만날까?” 말하든 큰 누나의 말이 귀전에서 맴돈다.
첫댓글 세월의, 흐름을, 볼수있네요....
가족의, 애잔한맘을 느껴보기도 합니다.....
행복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자주 만나는게 제일 좋은 사랑입니다
보기 좋습니다
잘 계시죠? 좋은 계절 입니다.
행복하고 건강한 하루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