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여행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군에 입대하였고 제대 후에도 사회 경험을 해 볼 틈 없이 곧바로 교사 발령을 받았다. 발령을 받고 6개월 후에 결혼하여 그 이듬해 딸이 태어나고 3년 터울로 태어난 아들을 키우느라 숨 가쁘게 달려온 20년 세월이다. 20년 교직을 퇴직하자마자 만사 제쳐 놓고 여행을 떠나고 싶어 여행지를 물색하던 중 마침 속초에서 중국 훈춘, 연길 쪽으로 보따리무역상을 주 대상으로 하는 동춘호가 정기적으로 운항하고 있어서 가이드를 소개받아 처음으로 백두산 여행을 하게 되었다.
찜통 같은 무더위가 가시고 선선한 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하는 9월 어느 날, 수속을 마치고 동춘호에 승선하였다. 파란 하늘에는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이, 은빛 파도가 넘실대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가슴 시리게 하는 황홀한 색감으로 우리들의 여행을 축하해 주는 듯하다. 갑판에 올라 나는 갈매기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아내와 둘만의 오붓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두 번의 선상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깨어 보니 17시간의 항해를 끝내고 러시아 자루비노항에 도착하고 있었다. 구 소련 시절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땅에 쉽게 도착한 것이다. 수속을 마치고, 중국 훈춘을 향해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달리는 차창 밖으로 바라다보이는 풍경은 우리나라의 산하와는 많이 달라 보였다. 러시아 국경 수비대로 보이는 군인들이 검문하기 위해 차를 세우는데, 6.25당시 한반도를 침략했던 붉은 군대라는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살짝 긴장이 된다.
한 시간 정도의 비포장 도로를 달려온 버스는 훈춘의 한 정류장에 도착하고 있었다. 러시아 영토를 지나올 때와는 달리 훈춘의 거리는 한글 간판도 많이 보이고, 오가는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한 외모를 가져서인지 낯설지가 않았다. 마침 점심 때가 되어서 한글 간판으로 되어 있는 음식점으로 들어가 보니 다행히도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우리 부부와 보따리무역을 하는 가이드는 칼국수와 야채를 말아 놓은 듯한 음식을 시켜서 먹어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맛이 있다.
훈춘에서 연길까지 택시로 이동하면서 중간중간 관광을 하기로 하고, 택시를 한 대 렌트했다. 택시를 타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한글로 된 안내 간판들도 많이 눈에 띄고, 우리나라 60년대 시골 풍경을 연상케 한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중국이 경계를 이루는, 북한과 가장 가깝다고 하는 도문에 들렀다. 도문은 두만강에서 배도 탈 수 있는 한국의 유원지와 같아서 관광객뿐만 아니라 중국인 가족, 연인들도 나들이를 나왔는지 제법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북한 땅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차를 달리며 왼쪽으로 보이는 강 건너 북한 땅은 한결같이 큰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이다. 아마도 땔감으로 나무를 베었기 때문이리라. 그런 산 아래로는 판잣집 같은 가옥들이 간간이 보이는데 북한의 어려운 실상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려 온다. 민족 시인 윤동주의 모교이며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독립 운동가와 애국지사를 배출해 낸 용정중학교(구 대성중학교)에 들렀다. 윤동주 시비가 있고, 애국지사의 유품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을 돌아보며 독립투사들의 항거에 가슴 뭉클함을 느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에 도착하여, 한국에 잠시 취업차 나와서 알게 된 조선족 자매가 살고 있는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우리보다 10년은 위인 듯한 자매의 부모님에게서 한국 시골 촌부의 순박한 모습을 보며 여행중에 가졌던 긴장감이 풀어지는 느낌이다. 준비해 간 선물을 드리고 잠시 한담(閑談)을 나눈 후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보기보다는 꽤 깔끔하게 꾸며져 있어 중국에서 처음 맞이하는 잠자리로서 하루의 피곤을 풀기에 충분할 것 같다.
연길 시내를 구경도 하고 저녁식사도 할 겸 가이드와 함께 호텔을 나와 보니 도로 곳곳을 파헤쳐 놓고 한창 아스팔트를 포장하는 등 발전하는 모습이 보인다. 요사이 경제적으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힘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되면서 우리나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6․25동란에 중공군에 당했듯이 또다시 그런 일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을 듯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동북3성이라 불리는 만주 벌판이 고구려, 발해 시대에는 당당히 우리 땅이 아니었던가? ‘역사는 반복되어 흐른다’는 교훈은 역사를 바라보면서 후세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하는 금언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가와 국가 간에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여행중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다니, 내가 생각해도 기특하기만 하다.
천연기념물인 황쏘가리를 회로 먹을 수 있다는 북한 식당을 가이드의 안내로 들어갔다. 황쏘가리회를 시키고 잠시 기다리는데 3명의 아리따운 여인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나와서 춤과 노래를 한다. ‘동포를 만나 반갑습니다~’ 노래를 구성지게 한바탕 부르고 다소곳이 인사를 하고 들어가는데 왠지 애처롭다는 생각이 든다. 저들의 신분은 북한에서도 범상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바닷가에 살다 보니 여러 종류의 회를 많이 먹어 보았지만 난생 처음 먹어 보는 민물회인 황쏘가리회는 바다 생선회와는 전혀 다른 감칠맛을 느끼게 한다. 호텔에 돌아와 잠을 청하지만 쉽게 잠이 들지 않는다.
다음날, 백두산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천문봉까지 대략 5시간 정도 걸리는 장거리 여행을 위해 서둘러 출발했다. 행운일까, 하늘에 구름이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가을 특유의 파란 하늘이 천지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화창한 날씨다.
백두산 아래 첫 마을인 이도백하를 향해 택시를 타고 달리는데 조선족인 기사 아저씨의 북한 억양의 말투가 재미있다. 우리가 건넨 캔 음료수를 마시고는 대수롭지 않게 차창 밖으로 버리는 것을 보고 우리가 한마디 하니 “일 없습네다” 한다. 하기야 워낙 땅덩어리가 넓으니 웬만해서는 흔적 하나 남지 않을 듯싶다. 가는 길에 철도 건널목이 있는데, 나무 기둥을 대충 묶어서 만들어 놓은 차단기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온 느낌이다.
이도백하는 작은 마을이지만 백두산 관광 기지로서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소나무이면서도 한국의 소나무와 모양이 다른, 곁가지가 없이 위로 시원하게 뻗은 일명 ‘미인송’이 많이 보인다. 화장실을 찾아보니 저쪽 구석에 화장실 같은 것이 보여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가간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들은 이야기는 중국에 화장실, 아니 변소는 앞에 문이 없어서 우리나라 사람이 볼일을 보기에 엄청 난감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휴~, 다행히도 변소에 문이 달려 있었다.
짚차로 백두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도로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걸어서 올라가는 수고는 덜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무모한 개발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 같아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다. 올라가는 도중에 저 멀리 비룡폭포가 보이는데 사방으로 물보라가 휘날리는 모습이 장관이다. 잠시 멈춰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출발한다. 한참을 굽이굽이 아흔아홉굽이도 훨씬 넘는 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려 도착한 백두산 정상, 약 50m 전에서 차를 내린 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가이드와 우리 부부는 천지를 보기 위해 서둘러 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시퍼런 물과 함께, 책에서 사진으로만 보아 왔던 천지를 대면하게 되는 감동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안개로 천지를 조망할 수 있는 날이 일 년 중에 며칠이 안 되는데, 우리는 첫 번째 여행에서 천지를 보게 되다니 감동이 아닐 수 없다. 가이드는 세 번째 와서 천지를 보았다고 하면서 우리 부부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축하의 말을 건넨다. 천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또 언제 올지 모르는지라 눈속에, 마음속에 천지의 풍광을 심호흡하듯 깊이깊이 담는다. 가이드가 건너편 쪽을 가리키며 북한 땅이라고 설명해준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내와 단둘이서 시작한 백두산 여행, 러시아․중국․백두산까지 오면서 내내 느낀 것은 바로 ‘우리 땅이었는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뼛속 깊이 들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선조들의 잘못된 판단과 유비무환의 정신 부족으로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 나라 땅을 밟으면 더 쉽게 올 수 있었는데, 먼 길을 돌아 남의 땅을 밟고 오게 된 것이다. 우리 땅 개마고원을 지나 백두산에 오를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랄 뿐이다. 121203
첫댓글 '백두산 여행'
그 추억 그리기는 유일한 행복입니다.
초가을에 부인과의 백두산 여행
만유의 자연 사물과 함께 포근하게 안겨서
초가을을 만끽 하셨네요
'백두산 천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아름다운 동행이었습니다.
천지를 보게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