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정원
임상태
대교大橋를 건너는 차 안에서 어머니가 약을 발라 주신다.
“어머니, 우리는 괜찮았어요. 내 친구네 집은 아침밥상에 유리병이 날아들었데요.”
차창이 흔들린다.
눈썹 밑 강물이 일렁인다.
고추
모든 식물은 꽃이 진 후 열매를 맺는다. 어머니가 일군 밭은 네 번의 꽃이 진 후 열매를 맺었다. 고추였다. 해거름 찬 강에서 몸을 건져내신 어머니. 힘든 몸을 곧 세우며 빨간약을 챙기셨다.
“나리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정원
개나리 정원에 고추밭을 가꿨다. 참새가 날아들었다. 그즈음의 새들은 유난했다. 발톱에서 진딧물이 흘렀다. 허수아비를 세웠다. 그래도 참새는 날아들었다. 가끔은 다른 새도 찾아 왔다. 카나리아가 노래했지만, 어머니는 노래가 시끄럽다며 귀를 막았다. 구관조가 춤을 췄지만, 아홉 색이 정신 사납다며 눈을 가렸다. 때로는 쫓는 손길에 정원이 다치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모르는 듯했다. 어느 날 잉꼬 한 쌍이 안방 창가에 둥지를 틀자, 자신은 새가 아니라며 뒷마당에 홀로 움막을 쳤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모든 기억은 무덤이어요.’
차 안엔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말을 붙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발병
어머니의 몸이 아팠다. 점쟁이는 손가락을 꼼질, 얼굴을 씰룩이며 신이라도 받은 듯 마당의 연못을 메우라고 했다. 이튿날부터 공사가 시작됐다. 일꾼들은 개나리꽃을 따 물고 노오랗게 물든 이빨을 제가끔 자랑했다. 참이 나오자 막걸리 사발을 들고 채 영글지 않은 고추를 따 한 입씩 베어 물었다. 개나리는 그렇다 쳐도 고추는 왜 땄냐며 어머니는 눈을 희번덕였고, 인심 사납다며 돌아선 한 일꾼은 자기네 집에도 콩나물은 기른다며 침을 뱉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시월이 되어도 고추가 여물 생각을 안했다. 진딧물 때문일 거라 생각했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머니의 병이 도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종양, 심인성이었다. 정원 일을 시작하며 돋아 오르던 것이 마음 한쪽 점점 자라, 고추가 크는 만큼 꽃이 만발한 만큼, 무수한 가지에서 뿌리내려 쇠잔한 발등 위로 약 알을 쏟아냈다.
어머니의 눈가엔 짓무른 고추만 어른거리고.
미소
주름진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시다 엄지손으로 어르신다.
곪지 않게 조심하라시며.
은행잎이 쏟아진다.
사금파리처럼 쓸려간다......
‘어머니, 그땐 정말 그랬어요. 모두들 상처에 고름투성이였어요. 숨 가쁜 계단발자국 소리, 깨진 창 새로 바라보던 잿빛하늘, 문지방을 날름대던 시퍼런 이끼의 혓바닥이요! 경황이 없었어요. 빨간약이 있었지만 서로를 보지 못했어요. 모두가 잘못 영근 알이에요. 미운오리새끼처럼 요.’
어머니는 숨을 가누셨다. 끊길 듯 한 숨결 사이로 낮은 구름이 드리웠다. 문득 새가 스쳐갔다. 어머니의 입가에 미소가 배었다. 강 너머 태양 같은 정원이 떠올랐다. 잘 영근 대청마루에 놓인 수박 속살 같은 붉은 정원. 차창엔 꽃잎이 날아들었고, 저물녘 햇살은 강물 속 비늘 지듯 몸을 던졌다.
임상태
1968년 서울 출생.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연극학과와 성균관대 대학원 공연예술학과, 강릉원주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에서 수학했다. 2011년 《문학나무》 겨울호에 미니픽션으로 등단했다. 1996년 기독교 미술대전에서 입상했으며,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가졌다. 쓴 책으로는 경계선적 문학집 《천국보다 낯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