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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도(藝都) 진도(珍島) 표상의 후광 -
고군면 오일시 박영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 장성현 대맥동리)가 소쇄원(명승 제40호·전남 담양군 지곡리) 주인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1503∼1557, 담양군 창평)에게 보낸 시가 전한다. ‘1548년 정월보름날 소쇄원에 드리다(무신상원봉기소쇄원 戊申上元奉寄瀟灑園)’ 제목으로 ‘하서전집(河西全集)’에 실렸다.
소쇄원에는 소쇄옹이 있어(瀟灑園中瀟灑翁·소쇄원중소쇄옹)/ 한 해 농사를 동풍에 점쳐보네.(一年春事占東風·일년춘사점동풍)/ 매화 소식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니(梅花消息渾依舊·매화소식혼의구)/ 묻노니 인심 또한 그대로인지(爲問人心同不同·위문인심동부동).
김인후는 1510년 담양 인근 장성에서 태어나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경상북도 안동시)과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한 후, 154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3년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를 지내며 당시 세자였던 인종(仁宗, 1515∼1545, 재위 1544∼1545)을 가르쳤다.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가 일어나자 낙향해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정진한 올곧은 인물이다.
소쇄원은 정자가 있는 별서 정원이다. 첫 행의 ‘소쇄옹’은 소쇄원을 건립한 양산보를 일컫는다. 양산보는 15세 때 상경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서울) 문하생이 되어 수학했으며, 기묘사화(1519, 중종 14)로 스승 조광조가 사약을 받자 충격을 받고 낙향했다. 그 뒤 소쇄원을 짓고 세속적인 것과 거리를 멀리했다. 김인후가 ‘인심 또한 그대로인지’ 물은 대목은 양산보가 여전히 세속 물욕과 상관없이 살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소쇄원 경영에는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2, 담양)과 김인후 등도 참여했다. 송순은 양산보와 이종사촌, 김인후는 양산보와 사돈 간이었다. 담양부사를 지낸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 해남)과 인근 환벽당(環碧堂 2013년 11월 6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107호 광주 환벽당 일원으로 승격)의 주인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 광주광역시), 동래부사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금산싸움에서 작은아들 학봉(鶴峯) 고인후(高因厚, 1561∼1592, 광주광역시)와 함께 전사한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 광주광역시) 그리고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나주),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 서울),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1525∼1597, 광주광역시) 등이 소쇄원을 드나들며 시를 읊었다. 김성원은 임억령, 정철, 고경명 등과 함께 ‘성산사선(星山四仙)’으로 불린다.
훗날 정조 때에 이르러 문정공(文正公)이란 시호와 더불어 문묘에 배향된 18현 중 한 사람이 김인후이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하응(李夏應), 1820∼1898)]이 김인후의 고향 장성을 가리켜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즉 ‘학문으로는 장성만 한 곳이 없다’고 말한 까닭도 그로부터 연유한다.
우리 진도는 어떤가? 학고(鶴皐) 김정호(金井昊, 1937∼, 진도군 임회면 사령리) 전)문화원장은 ‘예불여진도(藝不如珍島)’, ‘예술로는 진도만 한 곳이 없다’고 문화원 벽면에 호기롭게 게시한 적이 있는데 적어도 이 정신과 기상만큼은 대대로 지켜가야 한다.
진도는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9∼1892, 진도읍 쌍정리) 선생을 비롯하여, 대금산조의 명인 박종기(朴鍾基, 1880∼1947,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 동양의 명필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3∼1981, 진도읍 교동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충남 예산)와 소치(小痴),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 진도읍 남동리) 선생을 잇는 남종화의 대가 금봉(金峰) 박행보(朴幸輔, 1935∼, 진도군 군내면 신동리), 불문학자 김현[金炫, 1942∼1990, 본명 김광남(金光南), 진도읍 남동리], 국악인 신영희(申英姬, 1942∼,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곳이며, 손꼽는 후계자들도 늘어섰다.
더구나 2022년 8월 1일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3종[강강술래(2009), 아리랑(2011), 농악(2014)], 유형문화재 27종(국가 12, 도 15), 무형문화재 12종(국가 5, 도 7) 보유자는 15명(국가 6, 도 9)이고, 향토문화유산은 36종(유형 23, 무형 13)이다. 실로 대단하다. 또한 진도를 주제로 연구한 학자들은 2022년 10월 14일 현재 석사학위 262명, 박사학위 논문 발표자가 39명이다. 어느 지역과 견주어도 드높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 그 중심에는 사람이 우뚝하게 빛나야 한다.
민속문화예술이 영롱히 간직된 진도! 그래서 2013년 전국 최초로 유일하게 「민속문화예술특구」로 지정되지 않았는가? 진도는 예부터 시(詩)·서(書)·화(畵)·창(唱)으로 이름난 곳이며 민속 문화가 빼어난다. 이제 진도군과 의회, 사회단체, 군민이 한마음으로 「민속문화예술특구」에 자만하지 말고 「예도(藝都 : 민속문화예술의 수도) 진도(珍島)」라고 선언하고 걸맞게 가꿔가야 미래가 찬연하다. 예도(藝都)로 선언하면 그 표상(表象)의 후광으로 군격(郡格)이 높아지고 시너지 효과로 정신문화(군민의 정신적 자존감, 문화 예술 분야)나 경제적(관광객 증가, 진도 특산물 가치 상승 등)인 성장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날을 위하여!
박영관 칼럼-진도의 자존감 예도(藝都) 진도(珍島) 표상의 후광 - - 예향진도신문 (yhjin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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