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깊이 생각에 잠겨 있다. 한쪽 발은 신발을 벗었다. 펜은 왼손에 들고 있다. 누추한 잠자리와 허름한 옷, 홀아비의 꾀죄죄함이 흐른다. 눈은 퀭하고 노인의 눈처럼 물기가 약간 있을 듯하다. 인생의 달려갈 길을 거의 다 마친 듯한.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하나 감옥은 감옥이니, 갇힌 자의 심정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으니 지인들과 바울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과의 거리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을 터. 바울은 무슨 생각에 골몰하고 있을까.
감옥의 창살로 햇볕이 들어오고 있다. 실내는 잡풀이 나고 바닥은 방이라고 할 수 없겠다. 벌레들이 창궐할 것 같은 곳인데 바울은 그런 것에 대한 괴로움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책을 잡고 있다. 이 당시에는 저렇게 생긴 책이 없었을 텐데 렘브란트는 자기 시대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바울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저 책의 내용을 살피면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옮겨적고 있다. 바울 서신의 숱한 구약성경 인용구는 바울이 구약성경을 열심히 참고했음을 알게 해준다. 자기의 경험이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그 말이 원래 성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찾아보고 맞추어본다. 드러나게 인용하는 부분도 있고 드러나지 않게 인용하는 부분도 있다. 바울은 책 위에 편지지를 가지고 있다. 저 편지에 성도들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뜻을 써서 보냈을 것이다.
이채로운 것은 화면 왼쪽에 있는 칼이다. 감옥의 죄수에게 칼을 주지는 않는다. 칼이 있어도 빼앗을 것이다. 저 칼은 바울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엄격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혹은 성령의 검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브리서 4:12). 인간의 언어는 표현에 한계가 있어 얘기하려고 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지만 바울이 쓴 인간의 언어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저와 같이 역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죽게 되어 있다. 바울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화가 렘브란트 역시 늙어가면서 바울을 통해 늙어가고 낡아지는 것 이면에 있는 빛과 활기를 보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린도후서 4:16)
렘브란트는 낡아지는 겉사람을 그리면서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을 그리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꾸미지 않은 말 그대로 <낡아지는> 겉사람의 모습에서 보는 이의 마음 속에 속사람이 그려지는 그런 그림을 꿈꾸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