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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1장에는 아브라함까지 이어지는 셈의 족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주목해야할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입니다. 생계유지를 위해서 우상을 만들어 팔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창11:28)라는 증거에 따르면, 그는 고향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이는 참척慘慽입니다. 창자가 조각조각 끊어질 정도로 견디기 힘든 슬픔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미사여구를 모두 다 동원한다 할지라도 위로받을 수 없는, 아무리 잊으려 해도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엄청난 슬픔입니다.
평생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되 뇌일 수밖에 없는 깊은 슬픔입니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먼저 떠나보낸 자식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히는 부모들의 모습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창11:31a)라고 이어집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향을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성경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지만 얼마든지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아들에 대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에서는 더 이상 살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먼저 보낸 아픔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을 향해 가던 도중 하필 아들의 이름과 같은 지명을 가진 땅에 도착했습니다. 잊으려고 몸부림치던 아들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났습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얼마나 슬펐을까요?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을까요? 그는 거기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아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땅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아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지만, 아들과 같은 이름을 가진 땅에 묻히고 맙니다.
견디기 힘든 상처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자신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워버리려고 몸부림쳤지만, 당시에는 지명만 알고 있었던 미지의 세계 가나안을 향해서 무작정 출발했지만, 상처가 고스란히 되살아난 땅에, 상처를 그대로 간직한 채 묻히고 말았습니다. 비극悲劇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의 결국은 언제나 이렇습니다. 현재 진행하는 일들이 모두 잘 되고 있어도 그렇습니다. 간과하지 말아야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가 하란에서 데리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 사라, 하란의 아들 롯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중에 믿음의 조상으로 거듭납니다.
여호와께서는 견디기 힘든 아픔과 슬픔과 상처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시도했던 그들의 떠남을 믿음의 출발로,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인생은 고해입니다. 고통의 연속입니다. 하나의 고통을 겨우 이기고 나면 또 다른 고통이 쉴 겨를도 없이 다가옵니다. 하루하루가 고통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평생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들 속에서 몸부림치며 고생고생만 하며 살다가 소중한 인생이 끝장 나 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Horace Walpole는 18세기 세계 최초로 “오트란토 성The Castle of Otranto”이라는 허황되어 믿기 어려운 괴기 소설을 탄생시켰습니다.
자신의 소설을 읽거나 연극을 보고 어떤 느낌을 갖게 된 사람들은 누구나 공포에 사로잡혀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비극으로 규정했습니다. 자신처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희극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똑같은 상황도 어떤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서 비극이 될 수도 있고, 희극이 될 수도 있다고 규정했습니다. 희극 배우이면서 영화감독인 그Charlie Chaplin는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Nadia Comaneci의 삶은 크고 작은 포기와 실패와 거절로 채워졌습니다. 그렇다고 삶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계속 이어졌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비극적인 삶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 어른으로 성장했습니다. 지난 삶을 돌아봤습니다. 비로소 멀리서 볼 수 있었습니다. 살아내기가 결코 쉽지 않았지만 비극으로 단정 지을 수 없었습니다. 살짝 눈물이 흐르기는 했지만 웃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비극 같았던 삶의 무수히 많은 편린들이 오늘의 희극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안다.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다. 너희에게 희망이 가득 찬 미래를 주려는 것이다.”(렘29:11b)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당장의 상황은 그야말로 깜깜한 절망입니다.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끝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도리道理가 없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재앙처럼 보이는 당장의 상황은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평안을 이루어내기 위한,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를 창조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 비극으로 끝날 것 같았던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희극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결과는 언제나 이렇습니다. 희극입니다. 떡집에 떡이 떨어졌습니다.
떡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힘들었습니다.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떡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정해 주신 땅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순전히 떡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포도청인 목구멍의 필요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옥의 땔감 정도로나 여기고 있었던 이방인의 땅으로 들어가서 정착했습니다. 동족인 다른 지파가 거주하고 있었던 지역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영원한 기업으로 주신 땅을 떠난 것만큼은 사실이었습니다.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거기서 떡을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설상가상 가장家長까지 맥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금지하셨던 이방 여인과 결혼했던 두 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차례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졸지에, 과부 셋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비극이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피와 땀과 눈물과 희생과 봉사와 헌신과 수고의 궁극적인 결과는 언제나 이렇습니다. 비극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극에서 비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결과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으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1-24)라는 증거대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비극적인 존재입니다. 비극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Naomi는 이어지는 비극을 통해 비로소 너무 쉽게 하나님의 기업을 떠난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지켜야했었던 자신의 자리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동시에 감사한 일들이 이어졌습니다. 여호와께서 떡집에 임했던 기근을 끝내셨습니다. 양식을 주셨습니다. 며느리 룻Ruth이 죽는 순간까지 함께 동행 하겠다며 따라나섰습니다. 떡집으로 돌아온 룻은 밭에 떨어진 이삭이라도 주어다 끼니라도 해결하겠다며 집을 나섰습니다. 이삭을 줍기 위해서 들어간 밭의 소유주가 공교工巧롭게도 기업을 이어줄 사람Boaz이었습니다. 의도가 전혀 없는 그야말로 우연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기업 무를 사람이 밭을 찾아왔습니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었던 룻을 발견했습니다. 곡식을 베고 있던 일꾼들에게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나오미를 따라서 떡집으로 들어온 이방 여인으로, 일꾼들이 거두면서 흘린 이삭을 뒤따르며 줍게 해달라고 사정한 이후 아침부터 그때까지 앉아 쉬지도 않고 이삭을 줍고 있다는 대답을 들은 다음에는 룻에게 이삭을 줍기 위해서 굳이 다른 사람의 밭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삭을 줍다 목이 마를 때는 언제든지 소년들이 길어다 놓은 물을 값없이 마셔도 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룻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기대하지 않았던 은혜를 베풀어주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라. 여기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사55:1)라고 외치는 하나님의 음성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룻은 이방인에 불과한 자신을 혈기 왕성한 소년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고 또 과분한 은혜까지 넘치도록 풍성하게 베풀어주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남편을 잃은 이후,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혀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들어온 것은 물론 시어머니를 얼마나 극진하게 섬기고 있었는지도 이미 들어서 충분히 알고 있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또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2:12a)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나눠주었습니다. 일꾼들에게는 의도적으로 곡식다발에서 조금씩 뽑아서 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꾸짖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대로 이방인인 룻은 보아스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조상이라는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룻기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비극으로 시작해서 희극으로 마무리됩니다.
“우연”과 “마침”이 그야말로 절묘하게 어울 어진 결과입니다. 성경은 또 “그들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그리로 들어갈 때 사무엘이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 나오더라.”(삼상9:14)라고 증거 합니다. 그Saul는 누구나 흠모할 정도로 준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오라는 아버지 명령에 최선을 다해서 순종했습니다. 며칠 동안이나 헤매고 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걱정할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함께 암나귀를 찾아 나선 종이 돌아가는 길에 선지자Samuel를 만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길을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선지자가 있다는 성읍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중간에, 물을 길러가는 소녀들을 만났습니다. 선지자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소녀들은 있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선지자가 제사를 위해서 오늘 성읍에 들어왔고, 산당으로 올라가는 중이니까 조금만 서두른다면 제사를 시작하기 전에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세한 설명까지 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예비해 주신 은혜였습니다. 그는 서둘렀습니다. 그때, 마침 선지자가 그들을 만나서 함께 제사드릴 산당에 올라가기 위해서 성읍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미 여호와로부터 되어 질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들은 선지자는 그가 언제쯤 자신을 찾아올지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우연이었습니다. 당연했습니다. 선지자의 입장에서는 아니었습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 주권과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탁월한 섭리로 지으신 세계는 물론 개인을 다스리시는 여호와께서 사전에 예비해 놓으신 필연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나야할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반드시, 필연적으로 만나야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섭리해 놓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치밀한 섭리만 있습니다. 필연입니다. 결론은 최상입니다. 더할 나위 없는 선입니다. 흘러넘치는 복입니다. 희극입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호흡하는 동안 세상 사람들이 눈에 쌍불을 켜고 추구하는 복들 가운데 단 한 가지도 누리지 못해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해도 그렇습니다.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내고,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 중의 위험, 수고하며 애쓰고,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고, 이리저리 유리해도 그렇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교회에 대한 염려에 짓눌려 있어도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치밀한 사전 계획과 준비 끝에 사모하던 선교지에 도착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한번 전하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순교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 영원한 구원과 생명은 물론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가 그들을 위해서 선물로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축복이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노래를 잘하는 학생이 남의 집 창문 아래서 노래를 부르고 대가를 받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노래가 엉망진창일 경우나 창문 안의 주인 성품에 따라 무안을 당할 수도, 빈손으로 쫓겨날 수도 있었습니다. 중세를 대표하는 성직자, 성서학자, 언어학자로 종교 개혁에 앞장섰던 그Martin Luther도 학창 시절 한 부잣집 창문 아래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노래를 시작하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열고 바라보더니 갑자기 뛰어나왔습니다. 원래 노래를 잘 못한다는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자신이 부르는 노래를 듣기 싫어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고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나이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쫓아왔습니다. 발이 빠르지 못했던 그는 결국 잡히고 말았습니다.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서 공포에 질렸습니다.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순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험상궂은 사나이는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뭉칫돈을 쓱 내밀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따라온 이유가 뭉칫돈을 주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감사하고 좋게 보인다. (자신을 위한 창세전 작정을 이루시기 위하여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줄곧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갑자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깊이 잠들어 있던 가축들이 놀라 깨었습니다. 어머니는 인자한 얼굴로 웃었습니다. 감동한 아버지는 감사를 올려드렸습니다.
별을 따라왔던 목자들은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10-12)라고 일러주었던 천사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렸습니다. 찬송을 부르며 돌아갔습니다. 하늘의 뜻을 알고 동방으로부터 찾아왔던 박사들은 아기에게 무릎을 꿇어 경배 드렸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이어져 왔던 비극을 끝내고, 인류의 참된 희극을 시작하시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드렸습니다. 한 나무꾼이 나무하러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칡넝쿨을 거두려고 붙들었는데, 하필 그늘에서 자고 있던 호랑이 꼬리였습니다. 크게 놀란 그는 쏜살같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화가 난 호랑이는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나무를 마구 흔들었습니다. 나무꾼은 겁에 질렸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공교롭게도 호랑이 등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호랑이가 놀랐습니다. 나무꾼을 떼어 놓으려고 정신없이 몸을 흔들었습니다.
나무꾼은 호랑이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호랑이는 어떻게든 나무꾼을 떼어놓기 위해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무꾼은 살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서 호랑이 등을 더 힘껏 껴안았습니다. 그 모습을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던 농부가 보았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사력을 다해서 호랑이 등을 붙잡고 있었던 나무꾼이 너무 부러워보였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팔자가 사나운 놈은 평생 쉬지도 못하고 땀 흘려 일만 하고 있는데, 팔자가 좋은 어떤 놈은 호랑이를 타고 다니면서 놀고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때로 남들을 보면 모두 행복해 보입니다. 나만 죽을 등 살 등 고생하는 것 같습니다. 남들은 호랑이 등을 타고 다니며 신선놀음하는 것 같습니다. 나만 뜨거운 뙤약볕에서 죽어라고 일하는 것 같습니다. 실상은 다릅니다. 사람 사는 것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거의 비슷합니다. 내용만 다를 뿐이지 나와 똑같이 아픔이 있습니다. 상처가 있습니다. 해결하지 못한 고민이 있습니다. 새털같이 많은 밤을 뜬눈으로 새울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와 똑같이 외로움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환한 웃음 속에도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습니다.
천문학적인 재물을 하늘 높이 쌓아놓은 부자도, 누구나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강력한 권세를 누리는 자도, 온갖 세상 지식으로 무장한 자도, 다양한 경험과 함께 탁월한 지혜까지 두루 갖춘 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비교하다 보니까 나만 불행해질 뿐입니다. 희극처럼 살아도 순식간에 지나가는 짧은 인생,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것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합니다. 감사할 수 있어야합니다. 세상 끝날 마침내 영원한 구원과 생명은 물론 더 이상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게 될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곧 성민 이스라엘을 향해서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겔16:6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있으라חָיָה(하야)”는 “호흡하다, 생존하다, 소생하다, 안전하다, 회복하다.” 등의 뜻입니다. 명령형입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더 이상의 살 소망도 없이 버려진 성민 이스라엘은 어떤 환경과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무조건 살 수밖에 없도록 명령되어진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성민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시겠다는, 무조건 살 수밖에 없도록 명령되어진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살려내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본 절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 주권적인 명령입니다. 반드시 순종해야하는 불가항력적인 명령입니다. 성민 이스라엘 너만큼은 반드시 살아내야 한다는 선택적인 명령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만큼은 반드시 살아내야 한다는 선택적인 명령입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주어진 삶이 어떠하든지 반드시 살아내야 한다는 선택적인 명령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희극으로 끝날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반드시, 무조건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자신은 무조건 살 수밖에 없도록 명령되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역사해 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희망이라곤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비극적인 삶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결코 스스로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오늘 누구보다 밝고 환한 삶을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참된 희극인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