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소설작법》
이동하(소설가)
장차 소설가가 되겠다고 작심한 것은 중2 때였다. 1950년대 후반, 전후의 폐허 속에서 너나없이 누더기 같은 삶을 이어가던 시절이었다. 이향, 도시생활, 굶주림 등 고통 속에서 나는 어머니를 잃었고, 그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감과 허무의식을 내게 안겨주었다. 당신이 없는 이 세상에서 더는 아등바등하며 잘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대신에 나의 슬픔, 나의 속내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졌던 것이다.
<코스모스 피는 마을>이란 제목의 단편소설을 쓴 것은 그 얼마 뒤의 일이다. 난생 처음 써본 소설이었다. 나는 이것을 [학도주보](당시 학도호국단 발행 주간지)의 전국 학생문예작품 모집에 투고했는데 결과는 3등입상이었다. 지금 생각이지만, 이 일이 나를 혼란 속에 빠트렸다. 정말 소설가가 될 성부르다는 자신감을 얻은 대신에 역설적으로, 그런데 정말 소설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부쩍 몸이 달아올랐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 일이, 내가 소설작법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학교도서관을 포함하여 공공도서관 출입을 모르던 때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초등학교 4학년 과정을 끝으로 나는 학교가기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골방이나 거리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동네 대본집을 드나들며 정음사나 을유문화사 판 세계문학전집 따위를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곤 하던 어느 날 나에게 색다른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야시장 난전의 헌책들 속에서 [정비석 저 소설작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런 책도 있었더냐 싶어 나는 얼른 그것을 챙겼다. 그리고는 밤을 새워 독파했다. 그 무렵 내가 잡은 책들 중 가장 난해한 저서였다. 그럴밖에. 우선, 한자투성이라 연신 옥편을 뒤져야 했다. 그렇게 간신히 읽어낸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읽었지만 나에게 소설작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뒤흔들어놓은 책임은 분명했다. 특히 속표지를 장식한 저자의 육필원고 와 ‘저자근영’은 나로 하여금 소설가에 대한, 무한히 신비한 환상에 젖게 만들었다. 정비석 선생 특유의 필체와 주름살 많은 얼굴, 그리고 책상 위에 높이 쌓아놓은 선생의 저서들이 나를 온통 압도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이 책에서 받은 감동은 훗날 김동리 이범선 선생이나 서정주 박목월 선생을 직접 뵈었을 때보다 훨씬 강렬했다고 생각된다. 소설공부가 지겹거나 절망적일 때마다 나는 불쑥불쑥 이때의 감동을 되새기곤 했다.
[이무영 저 소설작법]을 손에 넣은 것은 그로부터 대략 1년쯤 뒤였다. 역시 야시장 난전에서였다. 계진문화사가 단기 4282년(1949년)에 간행한 것으로 내가 입수한 것은 단기 4290년(1957년) 5판 째였다. 한 번에 몇 부씩 찍은 건지는 모를 일이나 8년 만에 5판이라면 웬만한 소설작품보다 많이 팔린 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소설쓰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나로서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도대체 무슨 영화를 기대해서일까. 어쨌거나, 나는 이 책도 열심히 읽었다. 옥편과 국어사전 따위를 부지런히 뒤져 가면서 정말 열심히 읽고 또 읽고 한 다음, 참 거짓말처럼 말갛게 잊어버렸다. 오랜 세월 동안 내용은 물론 이 책의 존재마저도!
중고교 시절 두어 해에 걸쳐 열심히 뒤적거렸던 이 두 [소설작법]을 그 뒤 한참 잊고 살다가 다시 내 서가에서 찾아낸 것은 1980년대 들면서였다. 그러니까 줄잡아 스무 해가 지나서다. 어쩌다가 대학(목포대학) 강단에서 소설창작 강의로 밥벌이를 하게 된 나는 갑자기 그런 류의 책들이 필요해졌던 것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그 많은 작법서들을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던 나는 내 10대에 그리도 감동적으로 읽고 또 읽었던 저 두 권의 책을 문득 기억해냈다. 결혼초의 잦은 이사에도 불구하고 그 책들은 고맙게도 서가 한 귀퉁이에 숨어 있었다. 표지가 나달나달 헤지고 속장들이 누렇게 삭아있을망정 내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어 저 젊은 날의 숨결과 혼이 그대로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시중의 그 많은 다른 작법서들은 죄다 밀쳐놓고 나는 그 두 책에 빠져 들었다. 이번에는 술술 잘 읽혔다. 군소리 없이 간명한 서술들이어서 따로 메모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소설에 대한 내 평소의 생각들과 어찌나 잘 부합하는지 속이 다 시원할 정도였다. 이후 정년퇴직할 때까지 내가 강단에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때 얻은 자신감에 뿌리를 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소설이란 사물의 온전한 모습이 비로소 내 안에 분명하게 들어앉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4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렀다. 지난달에 [문학사상]의 원고청탁을 받고 나서 나는 새삼 등 뒤를 돌아보는 마음이 되었다. 나를 작가로 만든 책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 곰곰 생각하던 끝에 나는 위의 두 책을 다시 기억해냈다. [이무영 저 소설작법]은 금방 눈에 띄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비석 저 소설작법]은 찾을 수가 없었다. 빈약한 내 서가를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골똘히 생각해 본즉 언젠가 내버린 기억이 났다. 앞뒤 표지가 떨어져 나가고 속장들도 상당량 뜯겨나가 더 이상 책 구실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게다가 또, 내가 언제 다시 이런 책을 뒤적거리랴 속단했던 것도 같다. 그렇게 속이 짤 수가 없었다. 책(장서)이란 그런 거 아니냐, 없어져도 그만일 듯싶지만 살다보면 생각나서 다시 찾게 되는 그런 거 아니더냐, 새삼 깨닫고 자책했다. 박수동의 만화를 연상하게 하는 선생의 독특한 필체와 유독 주름살 많던 ‘저자근영’이 몹시 보고 싶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서운한 마음을 접고 나는 [이무영 저 소설작법]을 펼쳐 들었다. 적지 않게 훼손된 상태여서 책장을 조심스레 넘겨야 했다. 선생은 무슨 이야기를 하셨던가? 문득 자문해 보았지만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하기야 적은 세월인가. 그것과 맞설 만큼 성능 좋은 두뇌의 소유자도 못된다. 새 책을 읽는 기분으로 나는 서문부터 읽었다.
-내 자식에게는 절대로 문학을 시키지 않겠다는 것이 현재 문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의사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의 의사를 갖고 있다. 다소의 소질만 있다면 딸이고 아들이고 미완성의 나의 문학생활을 계승시킬 생각이다. 내가 이런 책을 만드는 것도 오로지 그런 뜻에서이다.
이렇게 시작된 서문은 금방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나는 그들의 글재주를 은근히 자랑은 했을망정 아비의 업을 계승해 주었으면 하는 욕심 같은 것은 별로였던 것이다. 이런 속내를 잘 안다는 듯이 자식들도 이 길을 비켜 갔다. 사족이지만, 지난해에 나는 소설집 [우렁각씨는 알까?](현대문학)로 ‘이무영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그래서일까. 문학에 임하는 선생의 열정과 의지 앞에서 더 많이 부끄러워졌는지도 모른다.
선생은 또, ‘대학에서 강의한 노트를 중심으로 체계화’한 저서임을 밝히고 있어 나로 하여금 거듭 자괴를 느끼게 만들었다. 나는 어떤가? 지난해 2월 퇴직을 하면서 서랍 정리를 하다보니 30년 가깝게 강의하며 남긴 자료가 적은 양이 아니었다. 그냥 내버릴까 하다가 혹 시간은 남아돌고 소설은 씌어지지 않는 날이 오면 한번 뒤적거려보자 싶어 덮어두기만 했을 뿐 그새 손도 대지 못했던 것이다. 밤낮 소설만 붙잡고 있었더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책임의 반은 게으름에 있고 나머지 반은, 무슨 쓸만한 얘기가 있으랴 싶은 자격지심 탓이었으리라. 그렇다면 그 짧지 않은 세월동안 나는 강단에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주절댔더란 말인가? 새삼 부끄러움과 함께 문득 자문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본문을 읽어가면서 나는 쉽게 그 의문을 해소했다. 예컨대, 선생은 ‘거짓말과 참말’을 분석하여 소설적 허구의 참뜻을 해명하는 것으로 서론을 삼고 있는 바 이는 내가 소설창작론 첫 시간에 흔히 주절대던 이야기였다. 뿐더러, ‘테-마론고’나 ‘풀롵연구’ 같은 장의 사정도 대체로 그랬다. 그러니까 나는 선생의 책에 깊이 영향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평소에는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고 몹시 놀랐다. 분명코 [정비석 저 소설작법]도 마찬가지리라. 다시 읽어보면, 지난 세월 내내 내가 잘난 듯이 주절댔던 그 많은 담론들이 실은 오래 전, 내 문학의 여명기에 무작정 읽고 또 읽었던 이런 책들로부터 빌려온 것임을 나는 다시 한번 확인했던 것이다. *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