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수박 농사 짓다 러시아 우주공학 박사로 “배우고 싶은 것이 아직도 많아요”
공근식 박사가 극초음속 분야 주요 공식 가운데 하나인 랭킨 휴고니오트 관계 공식을 적으며 웃고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만학도의 전설’ 공근식 박사
2010년 9월, 태풍 ‘곤파스’의 위력은 무서웠다. 충북 영동군의 한 마을, 처참하게 망가진 수박 밭 앞에서 한 사내는 망연자실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이후 20년 넘게 수박 농사에 모든 것을 바쳤지만 자연 앞에선 무력했다.
2년 후 그는 러시아의 ‘모스크바 물리기술대(Moscow Institute of Physics and Technologies·MIPT)’ 예비학부에 입학했다. MIPT는 노벨상 수상자만 10명 이상 배출한 러시아의 명문이다. 그의 나이 42세 때였다. 그리고 10년 만에 MIPT 물리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우주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올 3월 학기부터 서울 성균관대학교에서 인공지능(AI)을 연구하는 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양자역학 강의를 하고 있다. ‘만학도의 전설’로 불리는 공근식(54) 박사다.
공부가 싫어 고교도 중퇴하고 수박 농사 짓던 시골농부가 어떻게 우주공학 박사가 됐을까? 배움에는 때가 있다지만 배움의 시계는 각자 다른 모양이다. 그의 뒤늦은 학구열은 러시아 언론에도 소개가 될 정도였다.
수박 밭에 멈춰 있던 그의 공부 시계가 다시 움직인 것은 28세 때였다. 수박 출하하러 공판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대전역에서 야학 개강 안내문을 봤다. 기차를 타는 대신 그 길로 야학 문을 두드렸다.
야학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카이스트 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물리와 고전역학 등을 배웠다. 공부의 재미를 알아버린 그는 매일 농사일을 마치면 기차를 타고 야학으로 달려갔다. 야학 선생님들의 졸업과 때를 맞춰 검정고시와 수능을 연달아 보고 배재대 전산전자물리학과에 입학했다.
질문 많고 열정 넘치는 늦깎이 학생은 금방 교수 눈에 띄었다. 학교 측 주선으로 카이스트의 물리학 수업을 청강할 수 있었다. 부족한 공부를 위해 충남대를 무작정 찾아가 교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배재대에 초청을 받아 온 MIPT 연구원을 졸라 1주일에 4시간씩 빈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기도 했다.
새벽엔 수박 밭으로, 낮엔 학교로 달려가는 ‘효경주독(曉耕晝讀)’이 이어지다 2010년 태풍이 그의 인생 경로를 아예 바꿔놓았다. 본격적으로 공부에 매진해 2012년 러시아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언어의 벽은 높았다. MIPT 예비학부 1년을 마치고 물리학과 본 수업이 시작된 지 한 학기 만에 퇴학당했다. 다시 수박 농사를 지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다시 한 번 학교 측의 기회가 주어졌다. 재입학한 후부터는 장학금까지 받으며 공부했다. 하루 세 시간씩만 자며 이가 전부 빠질 정도로 사력을 다한 결과였다.
그를 지금의 자리로 이끈 건 오직 ‘배움에 대한 의지’였다. 롤모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노벨상 같은 대단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을 뿐이었다. 평범치 않은 이력이 화제를 모으면서 그는 TV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이제는 길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한 이들의 희망으로 자리 잡은 그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강의 준비가 한창이던 그를 지난 2월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러시아 학술지 ‘자유로운 비행’에 소개된 공근식 박사. 오른쪽 페이지 상단에는 그가 러시아에서 공부하는 모습이, 왼쪽 페이지에는 1992년 ‘농진종묘’에 실린 그가 농사를 짓던 시절의 사진이 실렸다. 사진 공근식 박사
수박 농사를 짓다 공부를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공부에 대한 갈증이 심해졌다. 일하다가도 멍하니 흐르는 강물을 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수박을 출하하기 위해 대전으로 나갔다가 야학 광고를 봤다. 무료고 오후 6시부터 시작이니 저녁에 가서 배울 수 있겠더라. 그 길로 찾아갔다. 너무 즐거워서 수업이 없는 주말에도 나가서 공부했다. 총 1년 6개월 과정이었는데 5년을 검정고시도 보지 않고 다녔다. 합격하면 그만 나오라고 할까봐. 그러다 야학 선생님들이 카이스트를 졸업할 때가 돼서 나도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교에 입학했다.
배재대 재학 시절에도 카이스트 수업을 청강했다고.
학교에서 한 명씩 카이스트 수업 청강생으로 추천할 수 있었다. 학과 박종대 교수님이 내게 기회를 주셨다. 근데 너무 어려웠다. 기초부터 더 배우고 싶어서 근처 충남대에 가서 불 켜진 물리학과 연구실을 두드렸다. 다섯 분의 교수 가운데 세 분이 허락해주셨다. 배재대에 파견온 MIPT 연구원도 찾아갔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이 즐거웠다. 누군가는 내게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냐고 묻기도 하는데 그때는 그저 배우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러시아로 유학을 간 이유가 궁금하다.
MIPT 연구원과 인연을 맺은 것도 작용했지만 유학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당시 미국의 1년 학비가 8000만~9000만 원 정도였다.
어머니 혼자 농사를 짓는 상황에서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태풍 ‘곤파스’ 때 모든 것이 다 쓸려 내려갔다. 땅을 빌려서 계속 농사를 지을 수도 있었지만 땅값도 비쌌다. 이를 계기로 공부에 전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끝에 유학 결정을 내렸는데 어머니가 반대를 안하셨다.
첫 학기가 끝나고 퇴학을 당했다고.
1년 동안 예비학부에서 러시아 말을 공부했지만 수업을 알아듣기 힘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시험 날짜를 몰랐다. 한국 학생이 아무도 없어서 도움 받을 친구가 없었다. 결국 시험을 보지 못했고 한 학기 만에 제적당했다.
어떻게 재입학을 하게 됐나?
창피해서 퇴학당했다는 말도 못했다. 땅 빌려서 농사라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메일이 왔다. 양자역학을 청강했는데 시험인지도 모르고 갔다가 운 좋게 응시했는데 만점을 받은 거다. 담당 교수가 다음 학기에도 오라고 했는데 내가 안 오니까 궁금해서 학교 측에 알아본 모양이다. 퇴학당한 걸 알고 다시 불러줬다.
전공을 바꿔 재입학했다고?
다시 짐을 싸서 비행기에 탔다. 학교 규칙상 퇴학을 당하면 같은 과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선택한 과가 우주항공공학과였다. 가자마자 외국인 학생 담당 부서를 찾아가서 내가 러시아 말도 잘 못하고 컴퓨터 사용도 미숙하니 시험 일정이 나오면 휴대전화로 통지해달라고 했다.
더 치열하게 공부했을 것 같다.
실패를 경험한 터라 정말 열심히 했다. 필기 잘하는 친구의 노트를 빌려 보고 수업을 녹음해서 알아들을 때까지 계속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잠 잘 시간이 없었다. 수식은 다행히 야학 시절에 배운 게 있어서 이해가 빨랐다. 잠이 올까봐 점심도 먹지 않았다. 정 배고프면 기숙사에 가서 계란 몇 개 삶아 먹고 다시 공부했다. 러시아에서 12년 정도를 그렇게 생활하니 지금도 점심은 잘 안 먹는다.
가장 힘든 건 무엇이었나?
다른 건 참아도 치통은 참기 힘들었다. 학부 때 이가 하나씩 빠지더니 박사 과정 때는 컴퓨터 프로그램까지 함께 배우느라 하루에 3~4개가 한 번에 빠진 적도 있다. 진통제도 먹을 때뿐이라 나중에는 그냥 버텼다.
그렇게까지 해서 공부를 해야 했나?
잘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다른 욕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더 배우고 싶었다.
학사, 석사 모두 수석 졸업을 했다. 장학금도 받았다고?
러시아 말을 슬슬 알아듣기 시작한 3학년 때부터 성적이 좋았다. 학교 측에서 방학 때 주한러시아대사관에 가서 면접을 보라고 해서 봤는데 러시아 유학생 중 1등을 했다더라. 알고 보니 학교에서 대사관에 성적표를 보내서 국비 장학생으로 뽑힌 것이었다.
학교생활은 어땠나?
3학년 때 친하게 지낸 학생이 내 기숙사 방에 놀러 왔다가 농사 짓던 시절 내 사진이 실린 ‘농진종묘’ 잡지를 봤다. 어머니가 내 짐 속에 넣어둔 잡지였는데 그 친구가 그걸 총장에게 보여준 거다. 그 뒤부터는 대접이 완전히 달라졌다. 기숙사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고 교수들도 관심을 가져줬다. 농사를 짓는 한 교수는 자신의 별장에 초대도 해줬다.
러시아에서 공부 외에 즐긴 것은 없나?
학교가 있는 모스크바 시내만 해도 붉은광장이나 크렘린 대궁전 등 유명한 곳이 많았지만 여행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었다. 유학 시절 사진은 다섯 장뿐이다. 전부 학교나 학회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러시아에서 만장일치로 박사 논문이 통과됐다고?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사실 박사 논문을 발표한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발표를 앞두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떻게 발표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극초음속 분야 연구로 박사 학위를 따고 박사 후 연구원(Post Doctor) 과정에 들어갔는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외국인 학생에 대한 장학금이 끊겼다. 어쩔 수 없이 2023년 귀국해 연구를 계속 진행하면서 논문을 쓰고 있다. 감사하게도 성균관대에서 제안이 와서 강의를 하게 됐다.
공부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특별한 방법이 있나?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가고 뉴스를 통해 사연이 알려지다 보니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때마다 반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진도를 나가는 것보다 이미 아는 것을 확실하게 되짚고 가는 게 중요하다. 모든 걸 반복하라는 건 아니다. 중요한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쉬운 문제들을 되짚으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공부는 정말 때가 있나?
내가 후회하는 게 딱 두 가지다. 두루두루 공부를 안하고 내가 좋아하는 과목들만 한 것, 고등학교를 그만둔 것이다. 한두 가지만 파고들다 보면 사람이 편협해진다. 젊은 친구들과 공부하면서 벽을 자주 느꼈다. 특히 기억력이 그렇다. 어렸을 때 시작했으면 이가 흔들리거나 빠지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나 계획이 있나?
극초음속 분야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 ‘이걸 배워서 내가 뭘 어떻게 하겠다’라기보다 그 분야를 더 알고 싶을 뿐이다. 아직도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고 배울 것도 쌓여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계속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고유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