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공원시조설과 비슷한 주장은 비단 전주최씨뿐만 아니라 대부분 성씨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는 본관에 반드시 지명(地名)이 들어가고 또 한 성씨에 여러 본관이 있으므로 단순한 발상으로 같은 성씨 중에서 역사가 유구하고 화려한 어떤 가문이 처음 성씨를 사용하였고 그 후손이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살면서 그 고을 이름으로 본관을 만들어 여러 본관으로 분화(分化)했을 것이라 쉽게 생각하여 발생하는 매우 초보적인 오류다.
경주최씨는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에서 시작되었고, 신라 건국 초기부터 귀족으로 행세(行世)해왔으며, 신라하대(780~935)에 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한 저명인사를 많이 배출했고, 고려시대에도 최승로(崔承老), 최항(崔沆) 등 저명인사들이 연달아 나왔으니 역사가 유구하고 가문이 화려한 틀림없는 명문거족이므로 그런 화려한 역사를 가지지 못한 본관이 경주최씨에 투탁(投託)하여 자기 본관을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것이다.
문영공원시조설은 전주최씨에 국한된 용어이지만 전체 최씨로 확장하면 최씨대동경주기원설이 된다. 최씨대동경주기원설은『삼국사기』<유리이사금 9년>의 사성(賜姓) 기록을 바탕으로 한국 모든 최씨가 사량부에서 시작되었으며 문영공원시조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사량부 출신 최씨가 해주, 강릉, 탐진에서 살면서 해주최씨, 강릉최씨, 탐진최씨로 분화했다고 믿는 것이다.
『삼국사기』 사성 기록은 해방 전까지 사실로 믿어 왔으나 해방 후 통일 이전 신라 비석이 많이 발견되고 비문이 해석되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입증(立證)되었다. 사실이 밝혀지기 이전이면 모르겠으나 사실이 명확하게 입증된 상황에서 잘못된 이론을 바탕으로 조상을 논하면 환부역조(換父易祖) 패륜을 피할 수 없다.
신라사람들은 부(部, 고을)에서 정착 생활을 해 왔고, 부를 기준으로 본관을 분정(分定) 했으므로, 말하자면 성씨보다 부가 먼저 있었고 훗날 부가 본관으로 바뀌었으므로 성씨보다 본관이 먼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