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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성서세미나 후기
■ 참석자 정혁현 목사, 강형숙, 박성호, 박연옥, 서선미, 서은혜, 안태형, 이미영, 이샛별, 정단희, 정명수 (총 11명) ■ 내용 요약 * 정체성 정치는 68혁명 이후 메타담론(세계를 하나의 담론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거대 담론) 붕괴 후 사람들이 구체성에 주목하며 각 주체가 세계에 대해 어떤 변화를 이끌어낼까를 고민하며 대두된 흐름이다.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에 신학도 영향을 받았다. 68혁명의 구호이기도 한 가부장적 아버지의 권위를 무너뜨리자는 흐름 속에서 성해방운동 등이 발흥되었다. 자본의 고유 운동은 축적을 목표로 한다. 자본이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은 임노동자에게서 임금을 착취하고, 이노베이션 즉 기술개발을 통해 생산비를 절감하는 것 등이다. 파업은 자본의 운동을 멈추는 노동자의 강력한 저항방편이 된다. 산업사회가 탈포드주의 시스템으로 넘어가는 상황과 더불어 정체성 정치가 강화되었다는 것에 주목해보자. 노동자의 저항전선이 붕괴되어가고 자본이 착취를 강화하고 노동의 경쟁을 가속화시켜 자본의 위기를 탈출하고자할 때 임금은 점점 줄어들고 신자유주의가 확산하며 1970년대부터 30년 이상 부의 편중이 가속화되었다. 차이를 강조하는 정체성정치는 실은 자본의 논리와 쿵짝이 잘 맞아떨어졌다. 각 운동이 각개격파하는 것은 자본의 입장에선 휘파람을 불 일이다. 최근에는 각 운동이 서로의 차이를 부각시키며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보다는 연대를 모색해나가자는 흐름이 대두되고 있다. 자본은 전세계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강력한 단일대오를 이루는데 세계는 민족, 국가 단위로 사분오열되고 세계인민의 삶의 질도 추락하며 전지구적인 생태파국이라는 종말적인 상황이 되었다. 이제 생태해방, 여성해방 등의 부문운동등은 보편성의 이데올로기로 함께 하지 않으면 지구 위 모든 인간, 생명체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만큼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희생을 받는 자가 희생적 위치를 점유해 자기 삶의 위치를 확인하고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희생을 당할 때마다 나르시시즘적 경험에 접하고 만약 희생을 하지 못한다면 그의 사회적 지위가 상실되는 방식은 타자를 위한 주체적 헌신이 아닌 은밀한 마조히즘적 쾌락으로 변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향후 변혁운동은 누가 더 많이 갖느냐하는 '공정'의 문제가 아닌 '정의'와 '평등'의 차원에서 접근해야만 한다. 성경은 가난한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하나님이 소외된 자들의 편에 계심을 강력하게 드러낸다. 가진 자와 지배층들은 이것을 교묘하게 순치시켜 지배이데올로기로 변모시키려고 끊임없이 애쓰지만 기독교신앙의 본령은 그런 것이 결코 아닌 해방의 목소리일 수 밖에 없다. 히스패닉 신학에서 혼혈성, 혼종성을 이야기한다. 경계에 있는 두 이야기가 합류해 전혀 새로운 질적 차원으로 도약할 가능성이 발생한다. 20세기 초의 뛰어난 신학자 자크 엘륄은 "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활동하라 (ecumenical local)"을 말했다. 기독교 전통의 동일성과 지역과 상황의 타자성이 결합해서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할 가능성에 주목하자. ▲자크 엘륄/프랑스 신학자 *기독교가 제국주의 침투의 첨병 역할을 했던 것과 관련해서 .....만약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아프리카 등 부족단위로 국가가 형성되어있던 곳에서는 오히려 서구문물을 아무 저항없이 받아들여버릴 위험성도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영향받은 서구근대정신은 개인을 발견하게 해주었고 주체로서 활동할 정신적 장을 제공했기에 외부문물에 대항하는 주체라는 인식도 발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주체 자체가 탄생되지 않았다면 내 삶의 주체성과 자유를 확보하려는 의식 자체, 제국주의에 대한 반발 역시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타자의 시선을 통해 나의 고유성을 확보하는 것에는 이러한 아이러니함이 존재한다. 발제문 9장,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고백하기 상황신학, 상황적 기독론은 모든 기독교적 삶과 증언과 신학에 있어 역사적 문화적 상황이 주요 요인임을 상기시킨다. 상황적 기독론으로부터 오늘날의 교회 역시 풍성한 것을 배울 수 있다. 복음의 특수성과 보편성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 기독교가 전파되며 함께 침입해 들어간 서구의 문화적 제국주의에 분노하며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사상 형태에 주의를 기울이며 신학을 형성하고자 했다. (상황신학)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번역’으로서 하나님의 첫 번째 번역활동은 새로운 번역을 불러일으키며 기독교적 다양성을 촉발한다. 초대교회의 바울도 상이한 문화배경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면 해석의 노고가 필수적임을 갈파했다. 오직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문화만이 복음메시지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가정은 거짓된 걸림돌을 만들어 낸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고백하는 행위 속에는 필연적으로 세계적 차원과 지역적 차원 양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남미 해방신학의 기독론 남미 해방신학자들에 따르면 기독론은 성경메시지가 읽혀지고 들려지는 구체적인 배경, 특정역사적 상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남미의 가난, 비인간화 현상, 식민지적 착취, 1세계국가에 무력하게 의존하는 상황 등 경제적 ,문화적, 영적 의존성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한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과 연대하심을 확증한다. 삼위일체와 영원한 로고스의 성육신 교리로부터 시작하는 것과 달리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예수의 구체적인 역사적 사역으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을 구속하는 죄와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구원은 개인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 양자 모두를 지닌다. 구원이란 고립된 개별 영혼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회복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고 본다. 남미의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독특하게 해석한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이라기보다 예수의 (사회에 거리끼는) 메시지와 사역의 결과로 인해 초래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삶의 절정의 모습이다. 십자가의 선포는 갇힌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된 고통과 타인에 의해 강제적으로 부과된 고통 사이의 큰 차이를 모호하게 만드는데 잘못 이용되기도 한 바 있다. 십자가는 착취와 학대가 초래하는 고통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방어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억눌린 자들과 동행하실 것이라는 약속일 뿐 아니라 불의한 고통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남미 해방신학자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를 아는 것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소브리노) 실천과 분리된 기독론은 본질을 놓치고 헛된 것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 이상주의적, 마르크스적 분석에 과도하게 의존, 로마교황청등 주교권위에 대한 도전, 인종과 성의 문제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함. 흑인신학의 기독론 1960년대 미국 시민권 투쟁시기에 처음 등장한 흑인신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역사와 경험에 근거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힘을 얻어 불의한 억압에 맞서 투쟁하고, 잔혹한 학대에도 살아남으며 인종차별적 태도와 현실의 표적으로 억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해방의 복음을 재발견해왔다. 이들은 그리스도는 ‘흑인’이라고 선언한다.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와 멸시받는 자와 흑인들이 존재하는 세계 안으로 실제로 들어왔기 때문이며 그들을 해방된 일꾼으로 변혁시키면서 함께 함을 드러낸다고 한다. 19세기 대다수 백인교회들은 노예제도를 지지했다. 흑인신학의 기독론은 지상의 가난한 자와 멸시받는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가 행한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에 집중한다. 흑인신학은 교회신학일 뿐 아니라 정치신학이기도 하다. 인종차별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악한 세력을 폭로하는 것을 추구한다. 마틴루터킹이 비폭력적 저항의 메시지를 일관되게 주창한 반면, 맬컴 액스는 강인하고 비타협적인 목소리로 인종차별주의에 대적하면서 폭력에 맞서 자신을 옹호할 흑인의 권리를 지지했다. 제 1 세대 흑인신학자들이 미국사회와 교회에 만연한 인종차별을 폭로하고 성경의 해방메시지의 정치적 함의를 강조해왔다면 후속 세대들은 흑인의 역사와 문화를 오늘날 기독교신앙과 신학의 자료로서 탐색했다. 흑인신학은 주류사회를 심판할 뿐만 아니라 흑인 공동체 내에 존재하는 억압적인 관행과 태도에 대해서도 심판한다. 특히 우머니즘womanism은 흑인신학의 기획 속에 여성과 여성적 관심이 부재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페미니즘 신학, 흑인 페미니즘신학, 남미계 페미니즘신학의 기독론 페미니스트는 여성이 온전한 인간임을 인정하는 자이고, 수세기 동안 교회와 사회 안에서 여성의 상황을 특징 지웠던 불균형과 불의를 분별하는 자이다. 여성은 교회와 사회에서 제도적으로 열등한 지위로 전락되어왔으며 , 다수 영역으로부터도 배제되어 왔다. 페미니즘신학의 목적은 가부장제의 체제적인 불의를 폭로하고 그것에 맞서서 투쟁하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의 경험의 중요성을 활용하고, 성경과 교회 역사와 기독교 신학에 내재한 왜곡된 여성관을 폭로한다. 신앙공동체에 대한 여성의 수많은 기여는 감춰지거나 억눌려왔고, 여성과 남성 모두를 온전히 포괄하는 방식으로 기독교 교리를 재진술하고 교회를 개혁할 것을 요구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전통적 삼위일체 언어가 남성 중심적 언어이며 하나님 이해를 성차별주의적으로 변질시킨다고 비난한다. 또 한편에선 진짜 문제는 문자주의적, 단의적 이해, 한 개 이미지집합만을 배타적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 등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많은 페미니즘신학자들이 전통적 교리와 씨름하는 부분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닌 속죄의 의미에 대해서이다. 고통과 희생과 대리를 미화함으로써 여성의 삶에 해악적 영향을 끼친 모든 해석을 거부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신학내에서도 격렬한 논쟁대상이 되고 이는 이런 주제들에 일부 페미니즘 신학자들은 자신을 내주고 소유 나누는 행위가 자발적이기만 하다면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가 된다고 주장한다. 사라 코우클리는 모든 형태의 연약성과 상처받을 가능성을 억압하는 것 자체가 기독교적 페미니즘에 오히려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흑인페미니즘신학, 히스패닉 페미니즘신학은 성차별주의 , 인종차별, 계급주의가 지닌 억압적 힘에 주목하며 백인페미니즘신학이 제대로 파악해내지 못한 것에 비판을 제기한다. 결론적으로 모든 여성들 사이에 협력을 위한 헌신과 심오한 차원의 연대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히스패닉 기독론 히스패닉신학은 남미해방신학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사회적 지위의 중요한 읨, 역사적 예수로부터 시작하기,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편파적 애정, 신앙과 실천의 불가분리성 등 많은 주제를 공유한다. 엘리존도는 문화적,인종적 혼혈성을 강조한다.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었고 지리적,사회적,문화적,언어적,종교적으로 소회된 자로 분류된다. 갈릴리는 혼혈인들이 살았던 지역인 동시에 예루살렘의 권력 중심으로부터 분리되고 경제적으로 주변화된 지역이엇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단순히 한 인간이 되신 정도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수치를 당하며 거부당하는 자가 되었다. 예수의 메시지와 길 전체는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적하는 자와 갈등하지만 비폭력적 사랑을 공격적으로 선포한 예언자이기도 하다. 혼혈성이 새로운 기독교적 보편주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엘리존도처럼 곤잘레스도 성경을 해방적 관점에서 읽기를 요청한다. 니케아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의 확증이 오늘날 히스패닉 교회에도 적실성을 갖는다고 했다. -니케아 공의회-하나님을 콘스탄티누스화하는 것에 반대,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 고백, -칼케돈 신조-가현설(예수님은 겉몸뚱이 모양만 인간이지 속은 신이다.고통 느끼지 않는 등..) 배격 아시아계 미국인 기독론 동양문화와 서양문화 사이의 접촉 속 동양적 음양개념을 수용하고 포괄적, 상호보완적, 양자긍정적인 사고형태를 선호한다. 아시아계 미국인 신학자들의 주요개념은 ‘주변성’이다. 미국으로 이민 오며 아시아인들이 경험한 배척과 모욕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한편 인종차별적 편견 때문에 주류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나는 경험을 말하는 주변성에는 차이점들이 만나며 창조적 활동의 계기를 제공하고 불의와 배타의 구조에 맞서 정의를 위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들도 예수의 죽음에 대한 서양의 표준적 해석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이다. 예수는 세상종교와 정치의 파괴적인 중심주의에 대항하여 십자가에 달리며 주변부를 위해 중심성을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그 중심성을 확증한다.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들은 예수는 여성을 긍정하고 존중하며 해방과 온전성을 향한 힘든 여정에서 여성들과 함께 하신다고 주장한다. 기독론의 지역성과 세계성 지역적 신학이 없으면, 세계 교회의 목소리는 과도하게 추상적이며 이론적이 된다. 또 지역교회는 고전적 신조와 신앙고백을 예전을 통해 표현되는 전 세계 교회의 공동의 증언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이로써 지역적 편협성과 일방성에 사로잡힐 위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기독론의 상황적 관심사와 에큐메니칼적 관심사를 결합하기 위해 에큐메니칼 신학은 오랫동안 침묵해왔던 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또 책임감 있는 지역적 신학은 목적에 있어 에큐메니칼적이어야 한다. ■ 발제소감 각 지역과 상황 속 인간들이 기독교신앙 안에서 예수를 만날 때 어떤 사건들이 발생하는지 그 어마무시함에 새삼 놀랐다. 한국의 주류 기독교에서 흔하게 생각하는 자기의 내면적 평화와 순결만을 우선적으로 소듕히 여기는 그런 신앙은 기독교의 전부가 절대 아니다. 링컨과 당대 미국인들에게 수십만 부가 팔려나가며 흑인노예제의 참혹함을 알린 '톰 아저씨의 오두막'소설의 작가는 신학자를 남편으로 둔 여류 소설가 해리엇 비처스토 부인이었다. 이 소설은 엄청난 반향과 충격을 일으키며 노예제 폐지 논란을 이끌고 미국은 남북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신앙의 나비날개짓이 엄청난 폭풍을 일으키며 미국사회를 인류가 지향해야 마땅한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2천년 인류사에서 부지기수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이 놀라웠다. 마르크스의 탐구도 초기예수공동체가 심어준 인류에게 심어준 잊을 수 없는 꿈에서 영향을 받은 측면이 강하다고 할 때에, 우리의 삶도 세계도 예수운동을 따르는 끊임없는 시도를 한다면 .........5년 내에 지구 기온이 1.5도 상승하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하는 절망적인 이런 시간에 ..신앙인이라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는 임무가 있을진대, 그 구체적인 실천들이 당장 무엇일까? 무척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금껏 당연하게 생각해오던 모든 삶의 방식들, 세계의 모습들, 관계들을 예수님의 시선에서 내 눈을 예수님 눈으로 바꾸어 다시 바라본다면 , 그리고 다시 세계를 재편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이 신앙인이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
첫댓글 발제문에 사진까지 첨부하니 눈에 확 들어오네요. 소감까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