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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 47. 엘리야를 부른다 - 마 27: 50. 영혼이 떠나시다.
마 27: 47. 엘리야를 부른다 -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
큰 소리로 외친 예수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어떤 자들은 예수가 엘리야를 부른다고 하였다.
1]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로마 군인들 중 몇몇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다(Zigabenus, Euthym).
적어도 구약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유대인들이었음이 분명하다. (Theophylact).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엘리'의 정확한 발음을 듣지 못했다는 점에서 헬라와 유대인일 가능성도 높다.
2]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엘리야는 죽지 않고 살아서 승천한 의인이다.
* 왕하 2: 9-12 – 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10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 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12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유대인들의 전통적 종말관에 따르면 그가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하러 다시 올 것으로 기대 되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엘리 엘리...'하는 절박한 절규를 듣고 엘리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들은 '엘리'라는 말을 '엘리야'를 뜻하는 히브리어 '옐리야후'(*)로 잘못 듣고 있었다. (특히 70인 역은 이를 '*, 엘루우'로 기록함).
40절에서 예수에게 조롱하여 말하기를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었다. 이렇게 말하는 저들의 심정은 신성 모독죄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속에 비록 그 대상이 눈앞의 예수가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 애타게 고대해왔던 메시야 대망(待望)이 담겨져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의 메시아 대망은 예수의 말씀 '엘리 엘리...'를 듣는 순간 곧 오해를 하여 엘리야가 와서 도와주나 보자고 하였다. 그들은 엘리아가 와서 예수를 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여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예수 자신보다는 십자가 아래서 예수를 조롱하고 있는 자기들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마 27: 48. 신 포도주 -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 중 한 사람이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 갈대에 꿰어 예수가 마시도록 하였다.
1]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이 일이 발생한 동기는 예수께서 목마르다(요 19: 28)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 요 19: 28-30 –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이 같은 행동은 예수에 대한 동정심에 근거한 것이기 보다 예수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켜 과연 엘리야가 그를 구해주는지를 보려고 한 악한 의도(47, 49절)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해면에 신 포도주를 머금어 그것을 갈대에 꿰어 예수께 마시우게 한 행동은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구약 예언(시 69: 21)을 다시 한번(34절) 성취시킨 사건이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해면'이란 일종의 스폰지(sponge)같이 다량의 액체를 빨아들이는 도구로서 바다 생물의 뼈대 같은 것에서 추출한다.
'신 포도주'(*, 와소스)란 원래 '식초'란 뜻으로서 정확히는 '포스카'(posca), 즉 신 포도주와 계란, 물을 섞어 만든 로마 군인들의 음료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예수께 최후의 음료를 제공한 것은 로마 군병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마 27: 49. 구원하나 보자 -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는 것을 보자고 하였다.
1]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만 두어라'는 말은 '지금 혼자 내버려두라', '조용히 물러서라' 등의 말일 것이다. 이는 예수를 향한 더욱 조롱적인 어투임이 분명하다.
마태에 의하면 이 말을 한 자는 예수에게 방금 신 포도주를 준 로마 군병이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임에 비해 마가복음에서는 신 포도주를 마시우게 한 후 자신의 행동을 금하는 군중들에게 신 포도주를 예수께 먹인 바로 그 사람이 계속해서 말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 막 15: 36 -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이에 비해 요한은 그것이 누구에 의해 발설되었는지, 그리고 조롱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성경 말씀이 성취된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따라서 어느 것이 정확한 보고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찌되었든 예수의 절규하는 소리에 자극을 받은 군중들은 떠들고 그 와중에 로마 군병들은 심정적으로 합세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 요 19: 28-29 –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2]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적어도 유대인들은 예수가 지금 도저히 희생 불가능한 죽음의 문턱에 이른 것이라고 자신하며 이 같은 조롱을 거듭하고 있다.
어떤 사본에서(시내, 바티칸 등) 본 절과 다음절 사이에 요 19: 34에 기록되어 있는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는 이야기를 추가시키고 있다.
요한복음과는 반대로 '물과 피'의 순서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물과 피를 통하여 상징되는 성례전과의 절차상의 일치를 위함인듯하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Robertson) 이 이야기가 후대의 필사가에 의해 기계적이고도 무모하게 베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위의 몇몇 사본은 역사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신학적 측면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삽입구라 본다.
마 27: 50. 영혼이 떠나시다. -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
예수께서는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셨다.
요한복음 19: 30은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후 머리를 숙이고 영혼이 돌아가셨다고 증언했고, 누가복음 23: 46은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셨다고 증언했다.
그는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버지께서 명하신 택자들을 위한 구속(救贖) 사역을 다 이루시고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예수는 신 포도주로 목을 축이신 후 '가상 칠언'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제 6, 7번째 말씀(눅 23: 46. 요 19: 30)을 외치신 것 같다.
예수께서 최후의 순간에 '크게' 외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당신에게는 생명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당신의 생명을 내어준 결과에 의해서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생명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지만 스스로 포기할 수는 있었다.
* 요 10: 17-18 –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2] 영혼이 떠나시니라(*, 페켄 토 프뉴마).
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의를 설명하지 않고 오직 그의 죽음의 사실만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예수의 죽음을 묘사할 때 '생명, 목숨'을 뜻하는 '프쉬케'(*)의 떠남으로 표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영'을 뜻하는 '프뉴마'(*)의 떠남으로 표기한 것은 물론 당신의 죽음이 우리 인간과 똑같은 영, 육의 분리를 뜻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내어주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영혼이 떠나가시다'(he gave up his spirit)란 담담한 표현은 정해진 바로 그 시간에 예수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는 강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께서 성부로부터 버리심을 당하여 깊은 심연(深淵, gulf)으로 떨어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잔인한 조롱을 받고 숨지시던 바로 그 순간이 그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ransom for many)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때이다.
* 마 20: 28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본문의 이 사실을 어거스틴(augustine)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분은 당신이 원하셨기 때문에, 원하시던 때에, 원하시는 대로 떠나가셨다.
갈보리 십자가는 세인이 말하듯 한낱 범죄자의 처형이 아니라 인류의 구속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즉 성부께서는 그 십자가 위에서 성자 예수님을 죽도록 하신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은혜를 주신 것이다.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가운데도 주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십자가상에서 겪으셨던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묘사해 주고 있다.
(1) 제육시로부터 구시까지 계속된 어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달리신 후 아무런 까닭 없이 3시간 동안 온 땅이 어두워졌다. '제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더니'(45절).
①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6시부터 9시까지,즉 정오부터 3시까지 팔레스틴의 태양이 빛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모든 사람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것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죽는 날이기 때문에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즉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사건이므로 이같이 놀랍고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의 가장 존귀한 창조물인 인간들에 의해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께서 고난받으시고 운명하시는 것을 자연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②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어두움은 인간의 질고와 멍에를 벗겨 주기 위해 싸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무감각하고 무표정한 모든 자들의 시선을 가로막으면서 마치 수의와도 같이 예수님을 감쌌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루어 가시는 구원 사역의 신비와 경이에 인간이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듯하다.
구원 사역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로 어느 누구도 이 일을 대신할 수 없다. 우리들은 다만 그가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은총을 감사하며 받아들이면 된다.
③ 인류를 향해 내리신 하나님 진노의 표시다.
빛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주신 것으로 자연계에 있어서 가장 좋은 선물이며, 축복이었다.
이제 그것이 없어진 세계는 곧 하나님의 축복보다 진노가 사랑보다 저주가 임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2)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주님의 마지막 순간이었던 제9시가 가까와지자 매우 큰 소리가 어두움을 뚫고 퍼져 나갔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나니'(46절).
이 말은 아람어로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이는 시편 22: 1에도 기록된 바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① 주님은 운명의 순간에서도 예언의 성취를 이루셨다.
주님께서는 종종 자신의 앞날에 대해 예언을 하셨다. 그리고 구약의 예언이 자신을 통해 성취되어질 것임을 약속하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예언과 약속은 모두 성취되었고 앞으로도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든 행위는 그대로 말씀이시며 예언의 성취였다.
그의 마지막 순간의 모든 말씀은 인류를 향한 위대한 구속 사역의 완성이다.
② 주님의 고통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를 위로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이 아무리 심하다고 해도 주님의 고통만큼 심한 경우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잃은 채 주위에는 온통 어둠만이 깔려있는, 그야말로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다면 눈을 들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는 친히 가장 극심한 고난을 체휼하신 분이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비록 크나큰 고난에 처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연단하신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으리라'라는 예수님의 따스한 위로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3) 그리고 운명하셨다.
주님이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외치신 후 그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셨다. (50절).
주님의 영혼은 그의 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으면 실제로 운명하셨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의 첫아담에게 일어났던 일과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죽음은 그 자체가 첫 언약을 파기한 데 대한 결과로 온 것이었으므로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죽음'을 대신해야 했으며, 그것을 통해 인류의 죄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실 수 있었다.
* 히 9: 15 -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하여 주님은 자신의 전부를 인간의 모든 화목 제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죽으심을 그저 감상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죄인의 생명을 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죽음이었음을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