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국민화가 박수근
화강암 표면 같은 우둘투둘한 질감 속에 새긴 우리네 삶의 정경
강원도 양구가 고향인 박수근은 18세 때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데뷔하여 1965년 작고 할때까지 33년간 화가로 활동했으나 해방 전 후와 6.25 전쟁으로 인한 공백으로 그림 그린 기간은 단 10년에 불과하다. 작업도 까다롭고 오래 걸려 작품의 수가 적어 고가의 가격으로 거래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삼성미술관 리움, 양구 박수근 미술관, 몇몇 대학 박물관 등이 주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우리 정서에 와닿는 매력
0.박수근이 사랑받는 이유는 작품성에 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그의 작품에
공감하고 감동을 느낀다. 그만큼 우리 정서에 와 닿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1).첫째는 소재다.
그의 그림에는 한국인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이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겨있다.
2).둘째는 소박한 아름다움이다.
박수근의 그림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그의 예술관과 진실한 마음이
배어있어 공감을 자아낸다.
3).셋째는 독특한 표현 양식이다.
박수근은 물감을 여러 차례 발라 화강암의 표면과 같은 우둘투둘한 재질로 만든 후
여기에 단순한 "선묘"로 대상의 형태를 새겨넣어 암각화 같은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고향의 흙과 같은 수수한 멋을 살려내고 있다.
< 박수근 ‘젖먹이는 아내’ 1950년대>
농촌 태생인 박수근은 "밀레"처럼 농촌의 정경, 그중에도 일하는 여인들을 즐겨 그렸다.
조선의 화가 김홍도가 시대의 모습을 풍속화로 남겼듯이 박수근 역시 그가 살았던
시대의 자연과 사람들을 주제로 후세에 남을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긴다.
종로구 창신동 시절 한 여대생을 만난다..
아내 김복순에 의하면 6.25 동란 중에도 군산에서 부두 노동으로 연명했고,
미 8군 PX (현 : 신세계)에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꾸려야 했던 시절에는
당시 경리를 보던 소설가 박완서(서울대생)를 만난다.. 그녀는
박수근을 모티브로 한 "나 목"이라는 소설을 쓴 인연으로 유명하댜
중앙이 박수근 (미군 PX.. 현 신세계)
<초가집 앞 우물에서 물을 길어 빨래를 하는 아낙들과 소녀의 모습을 그린 농촌 정경>
다수의 그림 배경은 길 위이고 路上이 특징이다
인물 그림의 공통점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室內에 있지 않고 바깥 공간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있어 길이란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길은 단순히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의 기능 외에 시장이 형성되기도 하고 또는 쉬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길 위의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장사하는 광장이요,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는 쉼터며 또한 아이들의
놀이터다. < 평론가 오광수 >
6.25 동란 직후 변변한 건물하나 있었을까.. 그러니 사람들은 밖에 나와서 생활해야 했다.
할아버지들은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고 아이들은 맨발로 골목을
뛰어 다녔다. 소녀들은 동생을 등에 업은 채 놀기도 했다.
박수근이 살던 창신동에는 동대문이 가까워 서민들이 많았다. 과일이나 먹거리 등을 좌판에 놓고 쪼그려 앉은 아낙네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여인들은 함지 혹은 광주리에 물건을 내다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곡식이나 소금, 채소나 생선 등을 팔기 위해 종일 路上에 앉아 있어야 했다. 가지고 나온 것을 다 팔아도 몇 푼 안 되지만
여인들에게 路上의 장사는 온 가족이 허기를 면할 수 있는 생계수단이다. 날이 저물면 여인들은 좌판을 머리에 이고 총총히 집으로 돌아갔다.
박수근, [시장의 사람들], 1961년 하드보드에 유채, 25×62cm
박수근의 그림 몇 점을 감상해보자
그림속의 순박한 사람들..작은 그림 중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작품 하나가 있다.
아들 박성남씨의 기억으로는 창신동의 집 골목에 기름장수가 살았다. 글을 몰라 엄마가
편지를 읽어주거나 써주면 기름 한 병을 주곤 했다 한다. 머리에 기름병을 담은 광주리를 이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그렸으며, 검은색의 곡선으로 윤곽을 잡고 굵은 붓질로 질감을
살렸다. 두상이 작고 어개가 좁은 아낙의 모습에서 고단하지만
끈질긴 삶의 무게가 전해지는 작품이다.
박수근 "기름장수" 하드보드에 유채, 29.3x16.7cm, 1953
[빨래터](1950년대)는 여러 점 그렸는데 그중 한 점이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박수근이 빨래터를 자주 그린 것은 아내 김복순을 처음 본 추억의 장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각선 구도에 각기 다른 여인들의 뒷모습에생동감을 더하고 있다..아래
대표적으로 2005년, 2007년에 박수근의 대표작 '빨래터'가 위작에 휩쌓였다
감정을 통한 진품으로 확인 되면서. 빨래터는 2007년 5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돼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인물 그림에는 아기 업은 엄마와 소녀의 모습이 등장하는데.."아기 업은 소녀(1953년)나
절구질 하는 여인 (1952년)에서 엄마와 누이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진다..아 래
박수근 '아기 입은 소녀와 아이들 1953년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1952년
노상의 여인을 그린 작품중에서 소금 파는 아낙의 무료한 모습은 꽉 짜인 구도와 질감이 求道者적인 종교화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아 래
박수근 소금파는 여인 유채, 33×23.5cm, 1956년
아래 그림 "농 악"은 박수근의 인물 그림 중에서 색다른 소재로 매우 동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는 원숙기에는 농악을 주제로 여러 점을 남겼는데 무리 지은 사람들의 배치가 독특하고 세부 묘사가 뛰어나 농악의 울림이 들리는 듯 생동감이 넘치고 있다.
박수근 [농악], 1960년대 하드보드 유채, 59.3×121cm
박수근의 인물들은 가난한 사람들인가..?
<평론가 오광수>
그 시대가 궁핍했고 서민들도 가난했다. 그러나 박수근이 그린 것은 시대의 가난이었지 정신의 가난은 아니었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박수근에게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헐벗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진솔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일하는 사람, 거리의 사람들은 절망하는 빈민이 아니라 그 시대를 열심히 살았던 보통 사람들이며, 그래서 결코 삭막하지 않고 정겨운 삶의 정경들을 보여주고 있다..그가 그리는 대상은 사람들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끼리 나누는 감정의 교류까지를 포함한 것이 된다”고 했다.
<박수근, [고목과 여인], 1962년 캔버스에 유채, 45×38cm>
잎을 떨군 고목 곁으로 함지를 인 여인들이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고목과 여인],에서는 삶의 고단함보다는 옛날의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그림의 특징은 화강암 표면 같은 우둘투둘한 질감.
그는 어려서 부터 우리 산하에 지천에 널린 화강암의 표면에 익숙한듯.. 거친듯 하면서도 토속적인 색채로 친근감을 담아내는 그만의 화풍을 만들어 냈다고 볼수있다.
그의 호가 "美石"임은 그런연유에서 나온듯하다..!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1964년 하드보드에 유채, 19.7×44.5cm
박수근, [시장],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25.8×37.2cm
박수근, [시장의 사람들], 1961년 하드보드에 유채, 25×62cm
박수근 휴식 1960년
박수근 소와 유동 1962년
박수근 노상 1957년
박수근 노인과 소녀 1959년
박수근 "한가한 날" 1950년대
박수근 모란 1960년
박수근 "시장에 앉아 있는 3명의 여인들" 1950년대
박수근 "귀 로" 1965년
박수근 "대 화" 1950년대
<창신동 집에서 가족함께 박수근>
<평론가 최열>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만 조금 기다려 보면 어떤 소리가 흘러 나온다”고 했다.
단색의 평면화에서 입체적인 표정이 보이고 소리까지 들리는 것,
이것이 박수근 그림의 독창성이고 매력이다. 그의 그림을 주의 깊게 보면 인물이나
나무가 정지된 형태가 아니라 항상 움직임과 함께 이야기가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했다
두터운 질감과 강렬한 직선, 회갈색의 화면 작업은 기교가 없는듯 하면서도 치밀한 세련성으로 충만되어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한국미의 원형질이라는 것이다. 많고 많은 화가 중 유독 박수근이 진정한 국민화가로 꼽히며 뜨겁게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이처럼 한국인의 소박한 모습을 통해 한 시대의 진실함을 담았기 때문이다. 우리 산하에서 흔히 접하는 화강암처럼 질박한 질감(마티에르) 속에 꾹꾹 눌러 새긴 박수근의 그림은 우리의 토속성과 정서가 배어있어 시공을 초월해 감동을 준다..<유홍준 전 문화제청장>
<편집후기>
그런데 박완서 작가의 PX 생활과 박수근 화백과의 만남은 소설 『나목』에서 허구가
가미 되지 않은 사실 그대로의 모습, 그리고 날렵하고 감칠맛 나게 박력 있게 풀어낸
작가 박완서의 원숙한 글솜씨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까지 내려오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좀 딱 딱하진 않았는지요.
평론가 최열님 오광수님과 유홍준 전 문화제청장님의 평론이 가슴에 와 닿아요
미흡한점에 많은 이해바랍니다..2024.6월 3일 (편집자)
첫댓글
당시 그림 한 점에 겨우 20 $ ~ 50 $
암울했던 1960년대 ..
그림을 가만히 보노라면..
작품은 자신의 분신 같은 느낌이 들어요
주 고객은
주한 미군들 였다지요..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들려오는 시절의 아픈 소리들..~
지금은 호당 (우편엽서 한장크기) 가격이 2억5천만원..그는 이 나라의 보석같은 귝민화가죠..+ 그가 그립습니다..+
@방랑객 아..! 그렇군요..ㅎ
일전에도 느겼지만 미술 전공하셨죠..
지금도 후학 양성에 힘 쓰고 계시곘군요..+ㅎ
이미 작고하신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두식 선생님..그분은 감성과 직관의 예술가로 알고 있어요..ㅎ
특정한 사전 드로잉없이 느낌 그 차체로 오염되지 않는 순간의 느낌을 화폭에 옮기시는 강한 임팩트의 화가시죠..ㅎ
그리고
운보 김기창 선생님과 결혼한 부인의 작품도 압권이지요..
찿아주시어 감사드립니다..방랑객님..+
대인의 대작을 만났습니다
박수근 국민 화백님
단번에 읽었지만
오래 두고
흠향해야 할
귀한 옥고와 작품들
배음의 향기로도
은 산 선생님을
뵙는 듯합니다
네..이미 떠나가신 그분들의 발자취는 오래 오래 기억되겠지요
근대 한국 미술사 100년에는 슬픈 이야기가 많아요..
나혜숙과 고희동(한국최초의 서양화가) 등.. 숫한 밀알이 되었기애 오늘의 한국미슬이 있었겠죠..
찿아주시어 감사드립니다..김미애시인님
와...
은 산 님
이렇게 귀한 작품으로
깜짝 출연하시다니요
먼저 반갑습니다
남 무탈하게 잘 있오
하는 안부이지요
그 시절에 이렇게 명작품들을 연출하셨다는 것엔
그림의 문외 하지만
상당한 안목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나라를 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이지 해 봅니다
은 산 님
그려서요
문득 이렇게 안부를 주셔야지요
쉬엄쉬엄 허리 가끔씩 펴시면서요
반갑습니다
은 산 님
네..농번기 오기전에 올리려다가 그냥 놓쳤죠..ㅎ
그림
나도 잘 몰라요..그냥 막내딸의 지도로 조끔식 읽혀가고 있죠
사실 은산 보다 훨씬 높은 식견을 가지신 미술 전공하신 회원분이 한두분이 아니예요..
방랑객님만 해도 홍대 에서 30년을 근무하셨다 하잖아요..!!
은산은 걱정이 많아요 창에 올리기전에 몇번씩 review 하곤 해요..딸래미 함께요..ㅎㅎ
그나 저나 양떼님..!!
이 창 저 창 찿아 다니며 일일이 댓글 달고 하시면.. 진작 본인의 살림은 언제 하시나요..? ㅎ
그러다가 옆지기한태 쫏겨 나는건 아닌가요..ㅎㅎ
와우~엄지척!!!
평소 토속적인 민속화가로만 알고있는 데
요로코롬 박수근 화백님의 전생애의 귀한 작품을 소개해 주심에
깊은 감사의 맙 전합니다~ 수고해주신 빈티지 이미지 캡쳐 편집 영상 창출해 볼께요~
아이고..+ 심 향선생님..ㅎ
선생님만 만나면 미소부터 터져요..ㅎㅎ
편안해서요..ㅎㅎ
빈티지 편집하신다 하니 넘 감사해요..부인께서도 빠른 쾌차를 기원합니다..찿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와 ~~
양구에 가서 그림 감상했었답니다
교회에서 한 번 우리 친구들과 한 번 이렇게 두번 갔었습니다
우리네 토속적인 그림인듯 정감이 갔었어요
뭐라 저는 감히 평을 할 수없지만...
덕분에 다시 감상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이렇게 자세한 설명까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박수근 화가를 만나러 양구까지 가셨군요..+
은산이 화가 박수근에게 매료된것은 그의 그림과 편지에서 우러나는 그의 인간성였죠..특히
그가 남긴 편지에도 나와있지만..결혼전 부인이 될 처녀 김옥순에게 보낸 연애 편지였습니다..
내용의 말미에 <...물질적으로는 그대를 풍요하게 해드리지 못하겠지만 정신적으로 그대를 편안케 하겠습니다..> 라는 문장였지요..
내용 그대로 작품에서도 오롯이 묻어나는 그의 본심이 보였답니다..찿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은 산 샘~🙇🏻♀️
멋진 작품 안고 오셨어요~
당뇨병으로 세상을 일찍도 떠나셨네요.
두 부부 러브스토리도 유명하지요~
부인에게 털실로 만든 속치마를
못사줘서 미안해하셨다고 합니다.
은산 샘~
갈길이 바빠서 아웃하고
부산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편히 주무셔요~🙇🏻♀️🌛🙏🏻
늘 바뿌신 대장님..+
사인의 근본 원인은 국선에 낙선한 홧병 였다지요
절망끝에 가까이 한 술은 지병을 악화시켰고..결국 그렇께 하여 먼길 떠난 우리가 몰랏던 국민화가 박수근
심성이 순수했던 그가 그립습니다..영화의 한 소재로도 손색이 없을 그의 love story..
언젠가는 영화로도 나오겠죠..
부산 친정엄니도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대장님..+
추신)
장마철에 다시 돌아 올께요..그런되 혹시 장기 결석이라고 은산 모가지 되는건 아니겠지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