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요인들의 내방--이박사 비롯, 정계요인들 속속 찾아와
[498호] 1987년 09월 16일 (수) 원불교신문
어느날 검은 승용차가 한남동에 들어닥쳤다.
이승만 박사를 위시하여 장덕수 조병옥 김병노씨등 정계인사 20~30명이
일시에 초라한 한남동을 방문한 것이다.
팔타원님께서 보육원 관계로 이승만 박사를 자주 만나는 가운데
「도인이 계시니 뵈고 가자」고 하셨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이날 일시에 당시의 거물급 인사들이 오시게 되었다.
나는 이박사 내방 소식을 오전에 전해 듣고도 막연하게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했다.
열심히 구내청소를 하고 그분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남루한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제일 먼저 미국인 하지장군의 고문인 쿠펠로씨가 차에서 내리더니 나를 만나러 왔다.
날씨는 유난히 추웠다.
승용차 기사들은 추위에 떨며 밖에서 있었다.
나는 기사들을 들어오게 하라고 통역에게 일렀다.
그랬더니 운전기사들은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차별현상에 민망함을 느꼈지만 참고서
『일반사회에서는 어떨지 모르나 이곳은 부처님 나라라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설명을 했다.
그 통역은 어찌 생각했는지 돌아가서 기사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미국인 통역은 나에게 「닥터 김」하면서 「닥터 리」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닥터 리는 이박사를 가르키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미국에서는 그런식으로 부르는지 모르나
우리 나라의 예절은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고
대통령은 아버지 같은 분이므로 깍듯한 예우를 해야지 「닥터 리」하면 안된다고 했다.
그는 내 얘기를 알아들었는지 OK 하는 것이다.
나는 일행을 법당으로 안내했다.
그분들은 구두를 신은채 법당에 들어가려고 했다.
나는 다시 통역에게 신을 벗으란 말을 영어로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노 ㆍ 슈즈」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쿠펠로씨에게 가서 「노 슈즈」라고 말했더니 모두들 구두를 벗고 들어갔다.
우리는 싸구려 찻잔 50개를 사다놓고 미삼차를 준비하여 대접했다.
나는 이박사에게 『이리 중앙총부에 가시면 웃 스승님이 계시고 의자도 있어 편히 모실 수 있는데 여기는 아직 준비가 안되어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는 관세음보살상 하나를 선물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일본인들이 아무렇게나 놓아 두고간 조그마한 불상이었다.
이박사는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이 어른을 모시면 내가 수한다』고 설명하니까
『OK OK』를 연발하는 것이다.
분위기는 퍽 부드럽게 무르익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이박사 만나러 가시면 너무 어려워
새나 되어 날아가면 몰라도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박사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는 이기붕씨에게 싸인해 주라고 하여 나는 그것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나는 정부 요인들과 접촉할 수 있게 되었고 대화하며 우의를 돈독히 할 수 있었다.
순수한 인간적 만남이었다.
나는 그 후 가끔 틈을 내어 이박사를 만나러 갔었다.
어느날 방문한 나를 본 이박사는 『김소장도 나를 비애국자라고 때리러 왔오?』하는 것이다.
그 당시 남북협상차 김구 선생과 김봉식 박사가 이북에 갔는데 그 때 이박사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각 신문에서는 크게 보도를 하며 이박사를 비판했었다.
이박사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세 분은 모두 소중한 분이었다.
그런데 만일 세 분이 모두 다 이북에 가셨다가
잘못되어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이북에 안가신 일은 장하신 것입니다』
이박사는 의외라는 듯이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세 분이 함께 가셨다가 혹 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번에 가시지 않은 것은 지혜있는 일이었습니다』
내 손을 꼭 잡은 이박사는
『서울에서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 있네.
나도 내 목숨이 아까워서 안긴 것이 아니요.
꼭 가야할 일이면 갔지요』
마냥 기뻐하던 이박사.
정치인으로서 말못할 고뇌도 많았을 것이다.
어려운 결단을 내릴때의 외로움도 있을 것이며
찬반 의견대립이 있을 때 조화롭게 타개하기도 힘겨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36년의 일제치하에서 맞은 해방이후의 나라살림을 맡아
수습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박사에게 나의 스승님은 이리 총부에 계시다는 말씀을 여러번 드렸고
언제든지 한번 총부를 방문해 줄 것을 말씀드렸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하나의 씨앗이 되었던지
그 해 8월 이박사는 전국을 순회하던 중 이리에 들리게 되었다.
나와의 약속을 상기시켜 이리교당(구건물)에 들리셨다.
나는 이리교당으로 나가 이박사를 만나 총부에 가시자고 했다.
이때 모종교인들이 둘러싸고 야단을 했다.
차량까지 차단시켰다.
종교감정의 유발로 그리된 것이다.
나는 서장에서 상황을 말하고 차를 한 대 내달라고 하여 모시고 총부로 들어왔다.
국가 원수로서는 첫 방문이었다.
대종사 성탑을 참배하고 구조실에 들려 정산 종사님과 대담을 하셨다.
이박사는 이날 붓을 들어 「敬天愛人」이란 글귀를 써주셨다.
이 친필은 현재 원광대학교 총장실에 표구하여 걸어놓았다.
총부에서는 밀가루빵을 만들어 대접했다.
구타원님께서 식당에 나오시어 총지휘 해주셨다.
그 후 이박사는 나를 김구 선생에게도 소개해 주셨다.
이 두 분은 그때까지만 해도 퍽 가깝게 왕래하던 시절이었다
첫댓글 대산 종사께서 이승만 대통령과 친하게 지내신 것 처음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