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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 ( 1899-1970) 국민총력조선연맹이사·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
1899년 1월 18일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났다. 호는 이며 어렸을 적 이름은 이다. 기독교 신앙이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7세 때 전 가족이 세례를 받았고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한자식으로 고쳐 활란이라 했다. 1907년 인천 학당에 입학했다가 1908년 이화학당 고등과로 옮겨 1918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했다. 1922년 조선감리교 감독이었던 웰취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에 편안해 철학·교육학·웅변학 등을 공부하고 1924년 6월에 졸업했다. 10월 보스턴대학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해 1925년 봄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콜롬비아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고 1931년 10월 「조선의 부흥을 위한 농촌계몽」이라는 제목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28년 덴마크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데남크의 방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농촌계몽을 하자는 내용의 「의 경제부흥론」이라는 논문을 써서 6월에 발표했다.
미국 유학 전인 1918년 3월 이화학당 졸업 직후부터 이화학당 고등보통과의 교사로 활동했다. 1919년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1920년 6월 이화전도대를 결성해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계몽과 복음 전도활동을 했다. 1922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함께 조선여성 대표로 참석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23년 3월 김필례 유각정등과 함께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창설했다.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1925년 7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 1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 신흥우와 함께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같은 달 귀국해 이화여자 전문학교의 교수 겸 학감을 맡아 1930년 6월까지 재직했다. 1927년 1월 전문진 여성들의 친목모임인 망월구락부가 직업부인회로 개편될 때 실행위원에 선정되었따. 같은 해 4월 유영준 유각경 최은희 황신덕 박원민 정종명 주세죽 등과 함께 근우회 창립준위원을 맡았고, 5월 근우회 창립 때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해 7월고ㅛㅏ 8월 사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2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 유억겸 백관수와 함께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1928년 미국 켄자스시에서 열린 감리교 총회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고 1928년 4월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회의에 신홍우 홍병선등과 함께 참석했다. 1929년 11월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3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 조ㅛ선 대표로 윤치호 송진우 유억겸 백관수와 함께 참석했다.
1931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 1932년 9월부터 1939년 8월까지 이화전문학교 교수로서 학감 및 부교장을 지냈으며, 재직 중이던 1935년 11월 잠시 교장 대리를 맡았다. 이 무렵 농촌교육을 통한 문맹퇴치와 계몽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1932년 북미기독교감리회의, 1934년 세계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 동남아세아회의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는 등 기독교 단체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1936년 말부터 교육과 여성계몽분야에서 친일활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1936년 12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가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목적으로 주최한 사회교화진흥간담회에 참석했고, 이어 1937년 1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주최의 방송교화선전협의회 부인 강좌반 강사로 참여했다. 이 때 참여한 강사들을 중심으로 같은 달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결성되자 상무이사를 맡았다. 조선부인문제연구회는 조선여성들의 교화를 위해 생활개선과 부인수양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생활개선이란 총독부 의례준칙의 준수, 혼상례의 간소화, 가사와 육아에서 근로보국 정신의 앙양 등을 통해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절약을 가정에서부터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었고, 부인수양은 황거요배와 축제일 국기게양 등과 같이 황민화정책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이런때 민중들을 얼마나 우매하게 봤을지, 그런 관점은 친일경쟁에 강력한 힘이 되었을 것이나 우리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더욱 무지한 길을 걷게 되는 촉매가 되었을 것이다.같은 해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다음 달인 8월에 전쟁협력을 위해 조직된 애국금차회의 발기인과 간사를 맡았다. 애국금차회는 귀족 고위관료 부인들과 여류 명사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조직한 단체로서 황군의 환송영, 총후가정의 위문과 조문, 일반 가정부인의 시국인식 강화철저와 국방헌금 위문금품 헌납 등의 활동을 벌였다. 같은 달 조선신궁을 중심으로 일본정신을 발양하여 국운의 융창을 도모하는 한편, 국가안태 무운장구 기원제를 거행하고자 조선인 유지 26명이 발기해 조직한 기원제거행준비회의 발기인 겸 위원으로 활동했다. 10월에는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출정군인가족간담회에 참석했고, 12월에는 “남경함락전첩봉고제”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남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걸 몰랐다 하더라도 이족의 융성과 안전을 위한 기원제를 지낸다는 것이 그 형식은 차지하고라도 내용에서 ‘동포의 일’로 이해하기가 손끝만큼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외다-
1938년 3월 ‘황국여성으로서의 국민도덕과 부덕을 갖춘 현모양처의 양성’ 등을 목적으로 한 3차 조선교육령이 개정 공표되자, 그해 6월 ‘총후 조국을 내조한다’는 취지로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윢학교 학생 400명으로 이화애국자녀단을 결성하고 단장을 맡았다.
- 이 또한 미친 짓이오. 대저 현모양처라는 것이 사람죽이는 군인을 길러내자는 것은 아니건만 제목에서 이미 전후가 충돌하는 모순을 그 잘 난 머리로 읽지 못했다는 것인가. 여기에 일말의 회오도 없어도 아이들까지 동원한 무엇에 단장을 맡았다는 말인가-
7월에는 전시체제하 조선 민중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총후활동의 강화를 목적으로 조직된 전시 최대의 관변 동체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같은 달 창립한 국민정신 총동원 경성부연맹의 상담역을 맡았다. 11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주최 순회강연반 연사로 참여해 황해도 지역에서 한규복 이각종 등과 함께 순회강연을 했다. 1938년 이후 기독교계의 친일화에도 앞장섰다. 1938년 5월 경성 거주 일본인과 조선인 기독교인의 일치단결을 도모하려는 경성기독교연합회에 신흥우 양주삼 유억겸 유형기 윤치호 홍병선 등과 함께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이어 6월 7일 윤치호 등이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의 일본기독교청년회연합회 가입을 결정하자, 8일 유각정 김마리아 등과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실행위원회를 열어 세계기독교청년회연합회에서 탈퇴하고 기독교여성의 내선일체를 위해 일본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에 가맹할 것을 결의 했다.
이 때 개회사를 통해 ‘비상시국에 기독교 여자 청년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 모이지 아니하면 안되겠으므로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믕로서 앞날의 활동을 기양가흔 의미에서 이런 선택을 하였다“고 발표했다.
-내용없고 비상시국 운운하는 것이 지금의 박근혜와 꼭 닮았고나 이렇게 니들들은 80년째 동포와 민족을 우롱하고 각 이익의 관점에서 해쳐먹고 있는데 이 나라 사람들은 그 반역의 역사에서 통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현상만 집착하니 이 또한 억울하고도 통탄할 노릇이 아닌가!-
이 결의안은 10월 5일 제 12회 정기대회에서 정식 통과되었고,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는 일본기독교여자청년회조선엽합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939년 4월 기독교학교의 교장을 조선인으로 교체하려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의 교장에 취임했다.
같은 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평의원 겸 참사를 맡았고 7월에는 조선일보사 강당에서 비상시국 생활합리와에 대한 시국강연을 했다. 이 즈음에 총독 미나니와 잦은 회합을 하였는데, 총독 관저를 방문하여 개인적인 교분을 쌓기도 했다. 당시 초선총독을 ‘솔직하고 검소한 인품, 믿음직스러운 성격, 한 집안의 아저씨같다’고 묘사했다.
-미나미와 연애도 했다는 말이런가, 39년에 나이 사십이고나. 김무성이와 나경원의 역겨운 면상이 지나가는 것은 도가 지나친 억측인가-
1940년 11월 열린 기원2600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받아 참석했으며, 기원2600년 축전기념장을 받았다. 같은 달 더욱 강력한 전시통제를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확대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사무국 훈련부 참사를 맡았다.
-박근혜같은 여자가 이미 있었다, 이토록 쥐어짜는 기술은 주지하는 바대로 친일파에서 나온바이다-
1941년 2월 조선의 청년들을 국방의 전위전사로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청년단의 로 활동했으며, 4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겸 평의원을 맡았다. 같은 해 8월 임전대책협의회(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위원을 맡았고, 9월에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을 통합한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했고, 10월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될 때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주최한 부인궐기 촉구강연대회에 강사로 참여했다. 10월에는 전위여성격려대 강연위원으로 평안남도 평양 진남포 안주 평안북도 신의주 선천 정주에 파견되어 「일본여성의 갈 길」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11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유일한 여성 이사로서 전선중앙지방이사회 개최에 앞서 “황국의 여성으로서 미래지원병, 황군용사의 어머니로서 심신 모두가 건전한 여성을 창조하도록 노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같은 해 12월 여성들을 전쟁에 보다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조선임전보국단 산하기관으로 부인대가 결성되었을 때 지도위원을 맡았으며, 같은 달 조선임전보국단이 애국반원과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회원들을 대상으로 주최한 결전부인대회와 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했다.
1942년 5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겸 평의원에 다시 선임되었고, 훈련부 이사도 겸했다. 8월에는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11월 국민총력 조선연맹 주최 임시특별지원병에 관한 좌담회에 참석했다. 같은 달 조선교화단체연합회에서 특별지원병제의 취지 고취와 지원병 참여 권유를 위해 전국 각지에 파견한 전위여성격려대에 참여해 평안북도 신의주 정주 선천 지역에서 강연했다. 1944년 1월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이화여자전문학교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를 발족하는 자리에서 ‘황국의 미증유의 전시에 처하여 황국반도의 미교육 여성의 지도양성기관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됨은 뜻깉은 일이다. 여러분은 입영을 한 기분으로 열심히 연성을 하여주기 바란다“라고 훈시했다. 같은 해 9월 내선부인의 총권기를 결의하는 좌담회에 참가했다. 같은 달 ’결전하 전의앙양과 근로동원에 관한 주지의 보급철저‘를 목적으로 조직된 국민동원총진회 이사를 맡았다. 1945년 6월 조선총독부와 국민동원총진회 이사를 맡았다. 1945년 6월 조선총독부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주도로 언론인들을 ’총력전의 사상전사‘로 이용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언론보국회의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7월 조선국민의용대 참여위원을 맡았다.
친일단체 활동뿐 아니라 여러 차례의 강연 좌담 논설 기고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황민화정책을 선전했다. 1938년 1월 1일 신년을 맞아 『매일신보』에 기고한 「조선인의 진로와 각오」에서 “지나사변은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이 분기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사변이 있을 후 학생층은 물론이려니와 일반적으로 내선일체의 사상이 철저하여진 것 같이 보입니다.……국가 대방침하에 당국에서 지시하는 것을 충실히 실행하는 것이 조선인으로서 현하 시국에 대한 국민적 의무……내선일체가 된 동시에 국민의 의무도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이니 조선인의 징병의무도 실현되어야 될 것입니다.”라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전쟁협력을 독려했다. 1939년 6월 『동양지광』에 실린 「부인동지의 애정과 이해-내선 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라는 글에서는 “부인문제도 내선일체로!”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남성들의 활동에 비해 여성들의 내선일체가 부진한 것을 반성하고 조선의 부인문제를 내선일체라는 입장에서 해결하는 부인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에서 주최한 임전보국단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의 무장」(『조광』1942년 2월호 게재)이라는 제목으로 ‘총후의 반도여성’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남성들의 정신적 방파제 역할을 해서 제일선의 장병들을 보조하여 동아시아로부터 미국과 영국을 격퇴하자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1942년 2월 일제의 싱가포르 공략대강연회에서 「대동아건설과 우리 준비」라는 강연을 했고(『매일신보』1942년 2월 15일자 게재), 같은 해 5월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겠다는 발표가 나오자 『신시대』1942년 12월호에 「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를 발표해 징병제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커다란 감격‘이라고 했다.이 밖에 「시국과 도회여성」(『총동원』1939년 7월호), 「지원병 모자에 송하는 서」(『삼천리』1940년 7월호), 「일천만 여성의 익찬-애국정신에 빛나는 총후의 각오」(『매일신보』1941.7.5.), 「선전의 날에 듣는다-최대노력」(『동양지광』1942년 1월), 「필승태세 하의 반도국민에게-위대한 세대의 인도자」(『반도의 빛』1942년 2월호), 「징병제실시와 조선청년-선발대의 책임(『춘추』1943년 9월호)」, 「열혈남아이거든 이때를 놓치지 말라」(『매일신보』1943.11.18.), 「학병출진훈-뒷일은 우리가」(『조광』1943년 12월호), 「학병출진훈-뒷일은 우리가」(『조광』1943년 12월호), 「감격과 가중한 책임 그처럼 우리를 기대햤던가」(『매일신보』1944.1.4.), 「군인의 가족에게-’이웃사촌‘의 정신을 바치자」(『매일신보』1944.4.28.) 등 여성계의 총동원체제 구축을 뒷받침하는 다수의 친일 글을 가고했다.많이도 썼다해방 후, 1945년 9월 미군청정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0월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복구해 교장을 맡았다. 12월 독립촉성중앙부인회를 조직하여 반탁운동을 전개했으며,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재건해 재단이사장을 맡았다. 1946년 4월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 인가를 받은 후 초대 총장을 맡아 1961년까지 재임했다. 1946년 9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연합총회에 참석한 이해, 1956년 9월, 1965년 12월 등 다섯 차례에 걸쳐 국제연합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서대문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0년 4월 중앙교육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으며, 8월부터 11월까지 제1공화국 전시 내각의 공보처장을 지냈다.
1952년 1월부터 1954년까지 영자신문『코리아타임즈』사장을 맡았다. 1955년 대한적십사사 부총재를 맡았고, 1959년 12월부터 1970년 2월까지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1959년 한국아시아반공연맹 부이사장과 한국여학사협회 회장을 맡았다. 1961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명예총장 겸 재단이사장을 맡았다. 1961년 금란전도협회를 조직해 농촌기독교전도활동을 전개했고, 대한기독교교육자협회 회장, 전국복음화운동 명예회장, 한국기독화운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62년 11월, 1964년 11월, 1966년 11월에 열린 12차, 13차, 14차 유네스코총회에 한국 수석대표 및 대표로 참석했다. 1963년 8월 교육부분의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막사이사이상의 공익부문상과 미국 감리교회에서 주는 다락방상을 수상했다.
1970년 2월 10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사망후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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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걸 몰랐다 하더라도 이족의 융성과 안전을 위한 기원제를 지낸다는 것이 그 형식은 차지하고라도 내용에서 ‘동포의 일’로 이해하기가 손끝만큼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외다-
1938년 3월 ‘황국여성으로서의 국민도덕과 부덕을 갖춘 현모양처의 양성’ 등을 목적으로 한 3차 조선교육령이 개정 공표되자, 그해 6월 ‘총후 조국을 내조한다’는 취지로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윢학교 학생 400명으로 이화애국자녀단을 결성하고 단장을 맡았다.
- 이 또한 미친 짓이오. 대저 현모양처라는 것이 사람죽이는 군인을 길러내자는 것은 아니건만 제목에서 이미 전후가 충돌하는 모순을 그 잘 난 머리로
한국 여성계의 가장 큰 오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