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란도트> 각색하기
오랜만에 아들놈을 만났다.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는데, 그런 것 치고는 잘 먹고 잘 입고 다닌 모습이다. 표정은 좀 어두워 보인다만. 새삼 느끼지만 참 개연성 충만한 얼굴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 녀석과 내가 부자지간이란 걸 믿기나 할까? 떠나간 그이가 절색이기는 했지. 그립읍니다 여보… 거기서는 잘 지내시오? 저만치 잘 생겼으니 리우처럼 참한 아이가 반할만도 하다 싶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신분도 선도 넘나들었을, 여러모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런 만큼 리우는 반가워 어쩔줄 모르는 모양새인데, 어째 칼라프 녀석은 불안해 보인다. 뭐지?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어떻게, 어쩌다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갑자기 큰 소리가 들리며 황궁 문이 열린다. 어제 공주에게 도전한 페르시아 왕자의 처형식이 열리는 모양이다. 광장 외각으로 병력들이 배치되고 사람들이 중앙으로 구경을 위해 몰려든다. 개미 하나 빠져나가기 힘든 상황에서 투란도트 공주와 쳐형대에 매달린 페르시아 왕자가 등장했다. 분명 처형식은 내일 거행될 예정이었을 텐데, 왜 하루 일찍 진행되는 것일까? 잘생긴 아들놈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떨고 있다. 공주가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우리 쪽을 보고 살짝 미소 짓는다. 칼라프의 떨림이 멈추더니, 어딘가 초연한 미소를 짓는다.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리우도 불안해하며 말한다.
“주인님, 당신의 미소를 다시 보고자 이곳까지 찾아왔어요.”
칼라프의 미소가 처연하다. 앞서 지은 초연한 미소도, 지금 짓는 처연한 미소도 아마 리우가 보고 싶었던 그 미소는 아니겠지.
“리우, 나는 더 이상 너에게 미소 지어줄 수 없을 것 같구나.”
리우에게 말하지만 아들의 눈은 나에게 향하고 있다. 절박한 그 눈에서 내게 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우를 붙잡고 조금씩 바깥으로 이동한다. 칼라프는 화려하게 광장 중앙으로 도약해 징을 울렸다. 이제, 되돌릴 수는 없다.
멀리서 칼라프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노래의 형태지만 교묘하게 나와 리우의 탈출을 돕고 있다. 칼라프가 징을 울린 시점으로부터 반나절 동안 일어난 일들은 그야말로 촌극이었다. 여태까지 각종 난제들과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들로 가득했던 공주의 질문은 애매모호하고 어떤 대답이든 끼워 맞출 수 있는 농담 같은 물음들로 대체되었다. 더욱 가증스러운 점은, 그렇게 우스운 문답 이후에 마치 자신의 의도가 아니란 듯이, 이름도 모르는 자와는 결혼할 수 없다며 너스레를 떤 것이었다. 당연히 황제는 불허하였고, 아들은 기지를 발휘해 하루의 시간을 벌었다. 이름을 아는 사람을 찾겠다는 명목으로 공주는 병사들을 풀었고, 진짜 목적은 명백하다. 나는 몰라도, 리우의 목숨은 절대 보장할 수 없겠지. 그래도 이제 거의 다 도착했다. 이제 이 거리만 넘어가면 된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땀이 비 오듯 흐르지만, 일단 도시 밖으로 나가면 좀 더 많은 선택지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으로 버텨낸다.
(절박한 묘사 끝에 붙잡혀서 정신을 잃는 내용이 들어가야 하지만 시간과 필력의 부족으로 스킵)
낯선 천장이다. 정신을 잃은 순간으로부터 얼마나 지난 것일까? 리우나 칼라프는 무사한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으로 보아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을 터인데, 그렇게 오랜 기간 정신을 잃었음에도 몸에는 별 다른 이상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깨어난 것을 눈치챘는지 누군가 들어온다.
“저와 함께 있던 아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저희는 공주께 도전한 자에 대해 정말 모릅니다.”
“망국의 왕이시여, 말씀을 낮추시지요. 이미 모든 것이 끝났사옵니다.”
이미 우리에 대해서는 모두 알고 있었나. 하지만 모두 끝났다는 건 대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왕자님의 이름을 알기 위해 공주님께서 친히 리우라는 시종을 심문하셨고, 그 자는 스스로 자살하여 주인에 대한 충심을 지켰나이다. 이에 왕자께서 감복하며 공주님께 눈물로 읍소하셨고, 열정적인 키스 끝에 공주님의 마음을 얻었나이다. 왕자께서 스스로의 이름을 밝히셨고, 마침내 황제 폐하 앞에서 두 분이 진정으로 맺어졌나이다.”
“그럴리가 없습니다.”
“그 장면을 직접 보고 감동한 화백이 그림을 남겼나이다. 이를 보고도 제 말이 거짓인 것 같사옵니까.”
빌어먹을 정도로 사실적인 그림이다. 리우는 쓰러져있고 칼라프는 눈물을 흘리며 공주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것처럼 보인다. 직접 보고 그렸을 수밖에는 없다고 느껴지는 그림이다.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구나. 그야말로 개 같은 결말의 연극이었다.
“그래, 저 그림은 진짜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뭐? 이름을 알기 위해 리우를 고문해? 감복하며 읍소하고 열정적인 키스 끝에 공주의 마음을 얻어? 지랄하지 마라 개자식들아. 아들놈이 마음을 꺾지 않으면 리우를 죽인다고 협박했겠지. 그딴 그림으로 진실을 호도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느냐?”
화를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는데, 저쪽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다. 오히려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다, 대체 뭐가 그리도 웃긴 것인가?
“못할 것은 또 무엇입니까. 망국의 왕이시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제국은 이 시대의 지배자입니다. 나라를 잃은 왕자, 칼라프의 사랑 이야기 따위, 얼마든지 손쉽게 비틀 수 있나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냐. 나도 칼라프도 죽음을 불사하고 너희를 저주할 것이다. 시체를 안으며 그를 얻었다 자위할 것이냐? 공주는 결코 칼라프를 진정으로 얻지 못할 것이다. 네놈들 네놈들은 절대! 허억…”
몸을 가누지 못하고 혀가 꼬이기 시작한다. 이 놈들 무슨 짓을 한거지?
“아니지요. 항상 그러셨듯이, 공주님은 이번에도 얻고자 한 모든 것을 얻으실 것입니다. 슬슬 약효가 도시는 모양이군요. 나라 잃은 왕이시여, 저와 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왕자는 아비를 인질 잡힌 채로 스스로의 뜻을 관철할 수 있으실까요?”
눈 앞이 흐려진다. 바보 같은 말싸움을 할 때가 아니었다. 리우의 죽음을 깨달은 순간 혀를 깨물고 죽었어야 했다. 내 무능 탓에 딸 같던 아이가 죽었고, 아들의 마음은 썩어갈 것이다. 저 악마들을 저주하고, 스스로의 무력함에 한탄한다. 수렁과도 같은 깊은 절망 속에서 의식이 침잠한다.
첫댓글 공주는 결코 칼라프를 진정으로 얻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