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의 리더십
조선의 태종 이방원(재위 1400∼1418)은 태조 이성계의 5남이다. 서열로 봐서 그가 왕이 될 확률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조선의 3대 왕이 되어 실질적인 이씨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고, 태조 이성계가 말끔히 제거하지 못했던 고려의 잔재와 갖가지 폐해들을 말끔히 털어낸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다.
두 차례에 걸친 골육상쟁을 넘어 피 값으로 이룩한 건국 초기의 개혁은 바로 다음 대의 세종에게 이어져 조선 왕조 5백 년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강국을 만들어내는 기반이 됐다. 태종 이방원이 5백 년 계속될 왕조와 보위를 이어갈 다음 왕을 위해 보여준 과감성과 도전정신, 어려움을 극복해간 투지는 오늘날 눈앞의 이익만 좇아 우왕좌왕하는 가벼운 인생들에게 살아 있는 교훈을 던져준다.
문무 겸비한 준비된 리더십
흔히 태종 이방원 하면 수하를 시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때려죽인, 칼이나 휘둘러대는 무식한 무인 출신의 왕자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아버지 이성계도 무장 출신이었으니 그런 생각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선입견이다. 이성계는 정말 무장 출신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정도전 같은 책사를 수하에 둘 수밖에 없었다. 머리는 정도전에게 빌리고 힘은 이성계 자신이 써야 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지혜나 학식이 오히려 앞섰으면 앞섰지 결코 다른 신하들보다 못하지 않았다.
이방원은 우왕 8년이던 1382년 고려 왕조가 실시하던 문과시험에 급제한 문사였다. 그는 태조의 여러 아들 가운데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고 문무를 겸비해 일찍이 왕이 될 재목이라고 주위에서 칭송을 받았다. 그는 문사로서나 외교관으로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줬다.
조선이 개국했을 때 일시적으로 명나라와 조선의 사이가 불편해진 적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조의 왕대별 해제 편에는 이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조선 왕조의 개국 당시에 크게 활약했고, 이후 명(明)나라와의 관계가 원활치 못해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국교단절을 선언했을 때, 직접 명나라 서울 금릉(金陵:南京)에 가서 명 태조와 회담해 국교를 회복하기도 했다.”
그때 익힌 외교적 감각과 수완은 훗날 태종의 외교적 업적으로 나타나 밖으로 명(明)과 여진(女眞),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해 조선의 기초를 확립했고, 이 방침이 큰 변화 없이 5백 년을 이어갔다.
진정한 참모 알아보는 인재등용의 리더십
이방원은 피를 나눈 형제를 죽이면서까지 왕위에 올랐기에 늘 자신의 부족한 점을 돌아보는 인물이었다. 지혜나 학식은 부족하지 않았지만 경륜은 아직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이 부족한 부분을 대체하기 위해 당시 최고의 논객이자 거의 스무 살이나 연상이던 하륜을 참모로 활용했다.
하륜은 태종의 오른팔로, 경제와 정치적 모사에 능했던 최고의 참모였다. 태종은 어린 시절 자신의 결혼식에서 하륜과 잠시 스치며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받은 인상을 기억해뒀다. 당시 하륜은 신돈의 측근을 비판했다가 쫓겨나기도 했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여말 권세가이자 장군이던 최영의 정책을 비판해 밀려나기도 했다.
태종은 그를 기억해뒀다가 자신의 참모로 활용해 가장 어려웠을 때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놀라운 반전을 보여줬다. 참모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의견을 실천적으로 주도해가는 건 군주의 몫이다. 태종은 그런 면에서 열린 마음과 눈을 갖고 있었던 리더였다.
이방원은 피를 나눈 현제를 죽이면서까지 왕위에 올랐기에 늘 자신의 부족한 점을 뒤 돌아 보는 인물이었다. 지혜나 학식은 부족하지 않았지만 경륜은 아직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이 부족한 부분을 대체하기 위해 당시 최고의 논객이자 거의 스무 살이나 연상이던 하륜을 참모로 기용했다.
얼음장처럼 냉정해지는 결단의 리더십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자신이 낳은 여덟 아들 가운데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륜이라고는 없는 막내 이복동생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자 조선 건국에 가장 공이 컸던 이방원은 분연히 일어나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자신의 형인 정종을 왕위로 밀어올렸다. 이때 이복형제를 죽인 것에 대해 골육상쟁의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정도전 등이 주창한 왕권 약화, 신권 강화 정책을 더 이상 뒀다가는 애써 이룩한 이씨 왕조의 미래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는 그 후 1차 왕자의 난 때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난을 일으킨 방간 왕자와의 싸움에서도 이겨 명실상부한 최고의 권력자가 됐다. 그는 정종의 양위를 받아 태종으로 등극했다. 1400년 11월 11일이었다.
태종은 1405년 반대하는 일부 신하들의 견제를 무릅쓰고 수도를 송도에서 한양으로 천도했다. 고려의 귀족과 왕족들의 견제와 정치적 잔재를 없애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왕으로 올라서자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을 확립하기 위해 공신과 외척들을 대부분 제거했다. 심지어 1407년에는 처남으로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사사하는 초강수를 뒀다. 1415년에는 다시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민무회 형제를 서인으로 폐하고, 이듬해 사사했다. 태종은 또 같은 해 왕자의 난 때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이숙번을 축출해 정치 일선에서 은퇴시켰다. 이로써 그의 말년에는 왕권을 견제할 만한 강력한 세력은 없었다. 이는 모두 다음 대를 이을 왕권을 지키고 혹시 있을지 모를 쿠데타 세력을 사전에 발본색원하려는 냉혹한 결단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정비한 후 1418년 방탕한 생활을 이유로 장자인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세종)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민심 살핀 위민(爲民)의 리더십
태종은 재위 동안 숱한 업적을 남겼다. 큰 비만 오면 종묘까지 잠기는 서울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하천을 정비하고 돌다리(광평교)를 세워 통행을 편하게 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청계천이다. 창덕궁·덕수궁·경회루·행랑을 세웠고, 백관의 녹과를 정비하고, 호구법을 제정했으며, 호패법을 실시해 호구와 인구를 파악했다.
그는 호적을 만들고 경제제도를 개편해 백성들이 보다 편하게 살 길을 찾는 데 최선을 다했다. 태종은 18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세종에게 양위하고 이후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세종 4년(1422) 5월에 56세로 승하했다. 그가 남긴 업적은 조선 개국의 든든한 초석이 됐고 경제를 살리고 민심을 얻어 그가 죽자 모든 백성들이 슬퍼했다.
출처 : 월간 리더피아 2008년 2월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