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5년 11월 22일
장소: 전북 일원(백정기기념관-김철수선생추모비-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역사광장-삼례문화예술촌-익산미륵사지석탑-국립익산박물관)
참석인원: 35명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열정적인 두집(?) 김영주 남역원 서울본부장의 특강으로 답사는 시작되고...
백정기 의사(義士)상 앞에서...
백정기 의사(1896~1934)는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12세 되던 1907년 정읍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있은 후 같은 해 8월 동지 4명과 함께 인천으로 가 일본인 시설에 대한 파괴활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탄로되어 만주 봉천(현 심양)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음해 본국에 돌아와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자유노동에 종사하며 노동관계서적을 익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해 9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부득이 중국 북경으로 돌아왔다. 백정기 의사는 중국에서 중국 동지들과 노동운동을 하면서 1928년 9월에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 창립에 우리 나라 대표로 참석하였고, 1930년에는 북만주로 들어가 재북만주무정부주의자연맹(在北滿洲無政府主義者聯盟)의 동지들과 함께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을 비밀리에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흑색공포단(B.T.P)”을 조직하여 천진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고 일본군 수송선을 폭파하였다. 1933년 3월 17일 상해 공동조계 무창롱 있는 일본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일본정객 암살을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조국 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34년 6월 5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백정기 의사의 묘는 1946년 7월 6일 서울 효창공원의 3의사묘역에 안장되었고, 1963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구파 백정기의사 순국 기념비
백정기 의사를 모신 사당인 의열사(義烈祠)에서 묵념!
구파 백정기 의사의 유품과 활동상을 보여주는 구파기념관(鷗波紀念館)으로 향하는 회원님들
아나키스트 백정기 의사의 항일운동을 회원들에게 설명하는 이건상 연구실장
육삼정의거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
영상으로 알아본 구파 백정기의 삶
지운(遲耘) 김철수(金綴洙)(1893~1986)선생 추모비
1893년 전북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난 김철수는 1908년 서당을 열고 있던 한학자 서택환의 제자로 들어가 선비정신과 함께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1912년 일본 와세다대 정치과로 유학간 뒤 김철수는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매진한다. 1915년 재일본 유학생들과 ‘열지동맹’을 결성하고, 이듬해에는 조선인·중국인·대만인과 함께 ‘신아동맹단’을 결성, 대일 항쟁을 선언한다. 1920년에는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국내 최초의 사회주의 결사인 ‘사회혁명당’을 결성했다. 이듬해에는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을 창립, 재무담당 중앙위원을 맡았다. 1923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했다. 1926년에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취임한다. 다음해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승인을 받는 등 사회주의 운동사에 굵직한 역할을 담당했다.
사회주의 운동과 독립운동으로 1930년에 붙잡혀 8년8개월 수감한 그는 1940년 다시 감옥에 들어가 해방을 맞아서야 공주형무소에서 출옥했다. 당시 항소를 하자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 제국주의 법률을 인정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김철수는 여운형이 암살된 후 1947년 모든 정치활동을 접고 낙향한다. 좌·우익 대결과 세력 다툼 등 혼란스런 해방 정국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다. 해방 이후 그는 자발적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좌·우익 통일정부 수립과 모든 파당은 통일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했다. 그는 이승만-박헌영 회담을 추진하는 등 좌익과 우익의 가교역을 자임하기도 했다. 비록 통일정부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모두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부안군 백산면 대수리 한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잡은 10평 안팎의 초라한 토담집은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고 통일을 염원하며 작은 고통이라도 나눈다는 자세로 ‘이 정도면 편안하다’는 뜻으로 ‘이안실(易安室)’이라 이름지었다.
그러나 김철수의 삶은 그다지 편안하지 못했다.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과 친북활동의 전력이 없었음에도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로 1급 감시대상으로 분류돼 한평생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았다. 또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민족적’인 성향 때문에 북한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남북 분단 현실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지운 김철수 묘비앞에서 사회주의자로서의 김철수의 위상과 항일정신에 관한 이건상 실장의 설명에 집중하는 회원님들!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삼례재봉기 조형물) 앞에서 동학혁명 정신을 되새기며....
삼례는 공주에 이어 1892년 11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冤運動)의 출발지이며, 1894년 9월 2차봉기의 출발집결지이다. 당시 2차 봉기과정에서 삼례에 집결한 동학군에 관한 내용으로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이렇게 실려있다.
"이때는 갑오 구월간이라. 정부에서는 동학당 토벌 준비가 이미 다 성립되어 경병(京兵)과 일병(日兵)과 청병(淸兵)이 한데 섞여 삼남 지방을 거쳐 들어온다는 말이 들려왔다. 전라도 각 읍에 있는 집강소(執綱所)에서는 재기병(再起兵)을 아니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재기병에 일어선 사람은 …(중략)… 그 수는 십만여명에 이른지라, 당시 대두령으로있는 손화중과 김덕명 등이 총지휘자가 되고 전봉준은 대장이 되어 전라도 대군을 영솔하여 전주에 웅거하니, 그때 군세는 …(중략)… 이때 전봉준은 십만 대 병력을 전주에서 검열한 후 길을 떠나 삼례역에 진(陣)치고 있었다".-동학사
삼례봉기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는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
맛있는 점심시간~~
일제 수탈중심지를 예술촌과 책마을로 변화시킨 삼례의 가을에 물들다....
삼례읍은 만경강 상류에 위치하여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한 만경평야의 일원을 이루는 지역으로 일제강점기에 군산, 김제와 더불어 양곡 수탈의 중심지다. 구(舊)삼례 양곡창고는 이 지역 대표적인 일제강정기 양곡 수탈 시설로 당시 상례지역에는 이엽사(二葉社) 농장을 비롯한 수탈에 앞장섰던 일본인 농장 사무소들이 분포하고 있었다. 특히 1914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 삼례역 철도를 이용해 군산으로 양곡을 이출하는 기지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군산 일대 조석 간만의 차가 커서. 만조시에 삼례 비비정(飛飛亭) 마을까지 바닷물이 유입되어 물이 들어오면 배로도 곡물을 수탈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삼레역 주변 주민들은 수탈을 위해 밤마다 ‘한말한섬’, ‘한말한섬’ 쌀을 세는 소리를 들으며 나라 잃은 아픔과 배고푼 설움을 눈물로 삼켰다고 한다.
삼례 양곡창고는 해방 후 2010년까지 양곡창고로 사용되다가 저장 기술 발달 및 산업환경 변화로 기능을 점차 잃게 되어 도시 재생 및 주민의 삶의 향상과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해 완주군에서 매입하여 2013년 6월5일 문화와 예술이 공존하는 복합문화 공간 삼례문화예술촌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 삼례문화예술촌은 4개의 전시관과 공연장 야외마당 다목적관 카페 등 다양하고 독특한 콘덴츠로 구성되어 있으며, 2013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대상 수상, 2016년 전국 군단위 최초 지역문화 대표 브랜드 대상 선정, 한국관광 100선 선정, 로컬 100선에 선정되었고, 삼례책마을, 비비정(飛飛亭) 등 문화와 역사, 예술이 함께하는 대한민국 대표 문화 공간이 되었다.
뜨락의 상서로운 빛은 붉은 작약과 같고 물에 임한 아름다운 빛은 하늘처럼 푸르네(완당 김정희 글씨)
2017년 복원된 미륵사지석탑 앞에서....
미륵사(彌勒寺)는 백제(기원전 18년~기원후 660년) 시대의 가장 큰 사찰로 창건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와 '금제사리봉영기' 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위에 오론 서동(백제 무왕)이 왕비 선화와 함께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중 용화산(현재 미륵산) 아래의 한 연못에 이르자 물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선화비의 간청으로 연못을 메워 탑과 불전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미륵사자 석탑(서원석탑) 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영기’ 에는 백제 무왕 639년 왕비였던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 발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일신라서대 초기에 규모가 커진 미륵사는 조선중기인 1600년경까지 사찰의 기능을 이어은 것으로 추정된다. 용화산 아래 3원(서원, 중원, 동원)의 가람 배치는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성불하여 용화보리수다무 아래에서 설법을 세 번 베풀어 중생을 구제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독특한 가람 배치 외에 석탑의 건립, 금당 기단의 공간 구조, 석등의 조성과 사리장엄구등의 공예품에서 나타나는 독창성은 백제 문화 역량이 최대한 발휘된 건축 문화의 정점이라도 할 수 있다. 나아가 미륵사지가 보여주는 백제 무노하는 신라나 일본의 고대 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륵사지에는 국보 제11호 석탑, 보물 제236호 당간지주, 보물 제1753호 금동향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3호 석등하대석과 석탑 출토 사리장엄구 등 증요 문화재가 남아 있다. 동원의 구층석탑은 고고학· 건측학적인 고증을 통해 1992년 복원 되었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바라본 서탑과 동탑 모습
미륵사지 석탑은 세 개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이다.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었다. 창건당시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으며, 17~18세기 이전 1층 둘레에 석축이 보강되고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운 상태로 전해졌다. 남아있던 6층까지의 높이는 약 14.2m이고 상·하 이층으로 구성된 기단의 전체 폭은 약 12.5m이다. 1층은 각 면이 3칸으로 구성되고 가운데 칸에는 문을 내달아 계단을 통해 사방으로 통하게 하였다. 기둥석은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민흘림기법과 양 끝 모서리를 약간 높인 귀솟음기법이 반영되어 있다. 기둥석 하부에는 목조건물에서처럼 별도의 초석이 있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상ㆍ하 인방석(引枋石)과 기둥 상부에 평방석(平枋石), 포벽석(包壁石) 등이 구성되었다. 옥개부(屋蓋部)는 목조건물의 지붕처럼 모서리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고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는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한편 석탑의 1층 내부에는 ‘十’자형 공간이 조성되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출입이 가능하며, 탑의 중심에는 여러 개의 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린 기둥(심주)이 4층까지 연속된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며, 2009년 1층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의 기록을 통해 639년이라는 석탑의 건립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이듬해 해체수리가 결정되었고 2001년 해체조사에 착수하여 2017년 조립공정이 완료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고대의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충실하게 잘 보여준다. 또한 고대건축의 실제 사례로써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우리나라 불탑건축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화유산이다.-국가유산포털
익산국립박물관 내에 전시된 미륵사지 목탑 모형
이번 답사도 선생님들과 함께해서 행복했습니다^^
언제나 의미있고 밝고 웃음이 넘치는 남역원 답사가 좋아요^^
선생님들! 이번에도 멋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