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적공원에서 포공사를 가는 방법은 삼국유적공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300路 시내버스를 타고 안휘성 전기학교 정류장에서 내려 119路 시내버스로 갈아 타고 大鐘樓 정류장 하차해서 3~4분 걸으면 된다.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시내버스를 타고 가며 차창 밖으로 비치는 허페이 시내를 구경하다 보면 금방이다.
포공사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좀 넘었다. 관람시간이 6시까지인데 포공묘까지 관람하기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포공사 입장권만 산다.(1人/20元, 포공묘까지 보는 통표 1人/50元)
포증은 우리나라에서는 포청천(包靑天)이라고 더 잘 알려져 있는 중국의 대표적 청백리이다. 포증은 송나라 인종(仁宗)이 넓은 소호(巢湖)를 하사하는 것을 사양하고 고향인 허페이 호성하(護城河;성을 보호하는 해자 역할의 하천)의 작은 구역을 받았다. 그의 후손들이 호성하 하류에서 연뿌리를 재배하고 고기잡이로 생계를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호성하를 바오허강[包河]이라고 부르고, 호성하 안의 작은 섬을 바오섬[包島]이라고 불렀다. 포공사는 화이허(淮河)의 지류였던 은허(銀河)가 호수가 된 환성공원(環城公園)에 섬처럼 떠 있는데 포공사(包公祠)는 명나라 홍치 원년(1488)에 여주지부 송감(宋鑑)이 포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포공서원’을 세운 데서부터 시작하였는데, 가정제(嘉靖帝) 때 포공사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포공사 입구엔 포효숙공사(包孝肅公祠)란 현판이 걸린 작은 산문이 있다. 이 현판은 포증이 죽은 후 조정에서 그를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하고 “효숙(孝肅)”이란 시호를 내린데서 유래된 것이다.
안후이(安徽)성은 유명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성이다.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 재상이었던 관중(管仲),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장량(張良),삼국지의 조조(曺操)와 주유(周瑜), 중국 한의학의 명의로 알려진 화타(華陀), 송나라 때 성리학적 전통을 세운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 성리학을 완성한 주희(朱熹),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 청나라 말 개혁에 앞장섰던 이홍장(李鴻章), 중국 5ㆍ4운동을 주도했던 문학가 호적(胡適), 중국공산당 창당의 주역인물인 진독수(陳獨秀) 등이 모두 안후이성 출신이다. 그런데 특히 세인(世人)들에게 존경 받는 인물이 북송(北宋)시대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포증(包拯)이다. 포증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TV드라마를 통해 ‘포청천(包靑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청렴한 공무원을 보면 “저 사람은 포공이다”라고 말한다.
▶ 사당 정전 입구 돌사자상
▶ 사당 정전
▶ 사당 정전 내 포증과 4인의 호위무사
▶ 포증 석각 초상화
산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포증의 사당 정전이 보인다. 두 마리의 사자상이 사당 입구를 지키고 있고 향내 가득한 사당으로 들어가면 청나라 광서제 때 이한장이 쓴 ‘寒芒正色(한망정색)’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포증이 냉정한 창의 엄정한 빛으로 판결한다는 의미 같다. 사당 내에는 포증이 관복을 입고 근엄하게 앉아 있으며 좌우로는 우리에게도 드라마를 통해 익숙한 인물인 장룡, 조호, 왕조, 마한이 칼을 찬 채 포증을 호위하고 있다. 대문 양쪽에는 '충현장상(忠賢將相)' '도덕전가(道德傳家)'라고 쓴 대련(對聯)이, 벽에는 석각 초상화 1폭이 있다.
▶ 포증 좌상
포증(999~1062)은 북송 진종(眞宗) 함평(咸平) 2년(999)에 루저우푸(廬州府) 허페이현(合肥縣:현 안후이성 허페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포의(包儀)는 조산대부(朝散大夫: 종 5품)라는 관직을 역임한 학자로, 그의 집안은 전통적인 학자 관료 집안이었다. 포증의 자는 희인(希仁)으로 흔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는 뜻에서 ‘포공(包公)’, ‘포대제(包待制)’, ‘포청천(包靑天)’, ‘포대인(包大人)’ 등으로 부르고 있다. 송나라 때 역사서『송사(宋史)』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인물로 고관들도 겁 내지 않는 인물로, 절대로 웃지 않았는데 그가 웃는 날은 황하가 맑아지는 날로 비유하고 있다.
▶ 송나라 인종이 하사한 작두
정전의 왼쪽 당(堂)에는 송나라 인종(仁宗)이 부패하고 혼란한 정국을 해결하고자 포증을 카이펑(開封)부의 지부(知府)에 임명하고 그에게 재판의 전권을 위임하면서 내린 개작두, 호작두, 용작두를 전시해 놓았다. 개작두(狗頭鍘, 구두찰)는 서민을, 호작두(虎頭鍘, 호두찰)는 문무대신을, 용작두는 왕공귀족을 참수할 때 사용되었다고 전다. TV 드라마에서 포증이 부패한 관리나 황실 친족들의 죄상을 밝혀내고 그들을 처형시킬 때 “死”라 쓴 표침을 던지면서 “작두를 대령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포증의 가훈과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
정전 우측 당(堂)에는 포증의 가훈과 그의 공적을 기리는 글들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가훈 중에는 그가 남긴 “후대에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우리 포씨(包氏) 집안의 선산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라.”는 유언도 세겨져 있다.
▶염천정(廉泉井)
사당 밖으로 나오니 염천정이란 정자가 보인다. 염천정 안에는 염천(廉泉)이라 부르는 우물이 있는데, 옛 사람들은 그 물이 포증의 영기를 받아 권선징악의 효능이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 포공고사랍상관(包公故事蠟像館)
▶ 국사 장요좌(張堯佐)를 탄핵하는 장면
▶ 황제의 용포를 때리는 타룡포(打龍袍) 장면
염천정을 돌아가면 포공고사랍상관(包公故事蠟像館)이란 현판이 걸린 건물이 있는데 이곳엔 포증과 관련된 이야기를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국사 장요좌(張堯佐)를 탄핵하는 장면, 과거에서 장원을 하자 고향의 부모와 처자식을 버리고 공주와 몰래 결혼했다 참수당하는 찰미안(鍘美案)傳 장면, 황제에게 태장을 가할 수 없어 황제의 용포를 때리는 타룡포(打龍袍) 장면 등을 TV드라마에서 본 것 과 같이 재현해 놓았다.
▶ 찰미안전의 장면
카이펑부의 지부에 임명된 포증은 당시 대리인을 거쳐야 했던 소송과정에서 일어나는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관청 앞에 북을 걸어 놓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은 대리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와서 북을 치도록 했다. 북소리가 울리면 관청은 문을 열어 백성을 맞이하여 억울한 사정을 고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관리들은 더 이상 중간에서 백성의 재물을 갈취할 수 없게 되었고 또한 포증의 법집행이 엄격하여 카이펑의 권문세족들도 함부로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 없게 되었다.
▶ 포증의 업적을 기리는 벽화
또한, 포증은 카이펑부에서 재직하는 30여 년 동안 비리 있는 수많은 관리들의 관직을 박탈시키거나 강등시켰는데 포증에 의해 탄핵된 사람들 가운데 특히 강서전운사(江西轉運使) 왕규(王逵)와 송상(宋庠), 장요좌(張堯佐) 등의 탄핵은 전국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그의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염라대왕에 비유되면서 ‘포염라’, ‘철면대인’ 등과 같은 별명이 붙었고 민간에서는 “청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염라대왕과 포증이다.”라는 노래가 전해졌다고 한다. 포증은 친척과 친구들에게도 매우 엄격하였다. 친척들이 그의 후광을 입으려고 해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세월이 갈수록 친척과 친구들도 그의 강직한 성품을 파악하고는 더 이상 개인적인 일로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 포증의 죽음
1061년, 인종은 포증을 중용(中庸)하여 그를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승진시켰다. 그는 고관이 된 후에도 일반 평민과 같이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던 중 1062년 5월 그는 중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임종 시에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후대에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우리 포씨(包氏) 집안의 선산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라.”
▶ 포청천 영화 포스터
포증을 주인공으로 삼은 인기드라마로 ‘포청천’이 유명하다. 포청천은 대만과 홍콩의 합작으로 제작된 드라마지만 대만, 홍콩,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말레이시아에서도 대 인기를 모았고 인도네시아에서도 포청천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 드라마는 아시아 전체를 뒤 흔들며 대단한 인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작년 카이펑에 갔을 때 포공사와 카이펑부에서 봤듯이 중국인들은 포증을 신으로 숭배하면서 사당을 찾아가 그를 참배하고 있다. 그의 공평무사한 판결, 청렴결백한 생활과 예리한 통찰력은 오랜 세월동안 많은 대중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신적인 인물로 승화된 것이다. 포공에 대한 숭배는 마카오에서 가장 성행해 지금도 마카오에서는 매일 포공의 사당을 찾아가서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숭배는 포공이 선한 사람을 보호해주고 악한 사람을 징벌해 주며, 재앙을 없애주고 복을 내려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포공에 대한 숭배는 사회 정의와 바른 정치의 실현을 기대함에서 나온 숭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포증은 시대나 지역을 막론하고 변함없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적으로 정치가나 관료들의 부패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권력자가 징계를 당하는 일이 드문 일이기에 그만큼 서민들은 포공의 활약에 쾌재를 부르는 것이다. 이 세상에 포증과 같은 청렴결백한 관리가 나타나길 절실히 바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바른 정치를 행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청렴한 관리, 공정한 재판관으로 널리 추앙 되고 있는 포증의 이야기는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되지 않는 한 영원히 계속될것이다.
벌써 오후 6시가 다 돼 간다. 포공사의 모든 곳을 다 관람할 수는 없고 포증의 가계와 일생을 보여주는 포증역사문화장랑으로 간다. 울창한 대나무 숲을 지나 작은 문(二門)을 지나면 나오는데 포공사 관리직원인 듯한 사람이 얼른 보고 나오란다. 장랑 내엔 포증의 선조들의 초상화와 그들에 대한 설명 및 가계도가 전시돼 있고 삼면 벽에 포증의 일생을 그림으로 그려 놓아 그림만 봐도 포증의 백성 사랑과 충심을 알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지만 관리인이 시계를 가리키며 빨리 나가라고 재촉이 심하다. 사진만 대충 찍고 나온다.
▶ 청풍각
포공사를 나오니 오후 6시 20분. 포공사 맞은편에 있는 청풍각은 지난 1999년 포청천의 탄신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는데 5층 누각에 올라가면 허페이시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문을 닫았다.
▶ 포증 묘원 입석
마찬가지로 포공 묘도 문을 닫았다. 그가 남긴 시 가운데 그의 인격을 잘 나타내주는 시 한 수가 있다.
청심위치본(淸心爲治本) 맑고 깨끗한 마음은 다스림의 근본이요
직도시신모(直道是身謀) 바른 도는 자기 자신을 위한 도모이다.
수목종성동(秀木終成棟) 곧게 잘 뻗어 자란 나무는 마침내 건물의 동량재 되고
정강불작구(精鋼不作鉤) 좋은 강철은 굽혀진 갈고랑이로 쓰이지 않는 법이다
창충서작희(倉充鼠雀喜) 창고가 가득차면 쥐와 새, 곧 탐관오리가 좋아하고
초진토호수(草盡兎狐愁) 풀이 다 말라 없어지면 토끼와 여우가 슬퍼하게 된다.
사책유유훈(史冊有遺訓) 역사에는 교훈이 있으니
무이래자수(毋貽來者羞) 앞으로 올 후세에 부끄러움을 남기지 말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