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양방죽이 남긴 풍경 셋
7~8할이 농사짓고 살던 시절, 광주에는 많은 관개용 방죽(저수지)이 있었다. 더러는 지금까지 남아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 있지만, 경양방죽처럼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도 있다. 그런데 왜 광주시민들은 경양방죽만을 오늘 가슴에 진한 추억으로, 그리움으로 간직하고 있을까? 6만 5천 평의 크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풍경 하나는 방죽을 가득 메운 연꽃이었다. 지금 광주고등학교와 계림초등학교가 들어선 언덕의 경호정에 오르면 연꽃은 더욱 장관이었다. 당시 언덕을 경호대라 불렀는데 이는 경호정이란 정자와 관련이 깊다.
경호정은 1800년대 초, 광주목사를 지낸 김선이 처음 짓는다. 거울처럼 맑은 모습이 당시 김선에게 감동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 후 1840년 광주 목사 윤치용은 경호정을 고쳐 짓고 이름을 응향정으로 바꾼다. 방죽에서 올라온 연꽃의 향기가 언덕의 끝자락에서 맺히는 것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경양방죽을 달리 연꽃방죽이라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풍경 둘은 둑길의 모습이었다. 1킬로미터가 넘는 방죽의 둑 양쪽에는 200~300백년 된 아름드리 벚나무와 팽나무, 왕버들나무로 가득 찼다. 담양의 관방제림의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젊은 시절 화순, 담양의 수령이 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이 둑길을 걸었던 다산 정약용도 과경양지(過景陽池)라는 시에서 “잡목은 큰 길가에 늘어서 있다.”고 읊는다. 그로부터 100여년 뒤에 지도 군수였던 오횡묵도 “숲길의 끝과 끝이 5리나 족히 된다.”며 그 둑길에 조성된 숲길의 당당함을 그리고 있다. 지금 둑방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옛 둑방길은 좁디좁은 골목길로 바뀌었고, 군데군데 경양지를 노래한 시인 묵객들의 시만이 민가의 담장 벽에 새겨져 있을 뿐이다.
풍경 셋은 푸른 물 위에서 즐기던 뱃놀이의 추억이다. 정약용도 이 둑길을 지나면서 이미 언급한 시에서 “연꽃 피어 뱃놀이하기 좋다.”고 언급하고 있다. 18세기에 정말 뱃놀이가 행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진 속에 보이는 경양 방죽의 뱃놀이는 그리 오래 전 일은 아니다. 방죽의 70% 이상이 매립되고 일부만이 남아 체면을 유지하던 1930년대 말, 광주시에서 배 한척을 띄워 간단한 뱃놀이를 할 수 있도록 했던 것 같다. 그 후 1941년 시 당국은 방죽의 남은 수명을 본격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공모했는데, 이 때 불로동에 살던 일본인 후지가와씨가 봄부터 가을까지는 작은 배를 띄어 유료 보트장으로 이용하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쓰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오늘 우리들이 경양방죽에서 뱃놀이와 스케이팅 모습의 사진을 볼 수 있게 된 이유다.
5백년 넘게 광주의 젓줄이면서 휴양지였던 경양방죽은 두 번에 걸쳐 매립되는 수모를 당한 끝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첫 번째 매립 계획이 시작된 것은 광주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광주읍이 부로 승격 될 무렵인 1935년이었다. 1934년에 공포된 조선시가지 계획령에 의하여 읍이 부로 승격되면 도시계획을 세워 시행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광주는 이를 위한 기초 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경양방죽을 매립하여 신시가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극비리에 추진했다. 이 계획은 곧 탄로나고, 광주 지방민들은 분개한다. 이에 경양방죽 매립 반대투쟁위원회가 구성되고 위원장에는 당시 신망이 두터웠던 최흥종 목사가 선임된다.
위원회의 매립 반대 이유는 다음 여섯 가지였다.
첫째, 경양방죽은 광주민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농업경영의 원천으로서 많은 몽리답을 관할하고 있다.
넷째, 이 방죽을 메우지 않더라도 광주 시내에 주택지를 조성할 만한 좋은 장소가 많다.
여섯째, 장차 광주가 대도시로 발전할 때를 대비해서 경관이 수려한 풍치지구를 아름답게 보전해야 한다.(둘째, 셋째, 다섯째는 생략)
투쟁위원회가 제시한 반대 이유는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넷째와 여섯째의 반대 이유는 미래 가치를 내다 본 탁견이 아닐 수 없다. 투쟁위원회는 이러한 이유를 내세워 관계 기관에 진정서를 내고 찾아다니며 주민들의 반대의견을 전달한다. 주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1939년 일제는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3분의 2만 매립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 그 나머지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1966년 광주시는 몽리답의 수원으로서 기능이 약화되고, 늘어난 인구로 인한 사람들의 쓰레기 투기와 오물로 인한 악취를 핑계로 매립, 시가지를 확장하고 택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한다. 결국 1967년 경양방죽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방죽을 메우기 위해 헐린 명물 태봉산은 덤으로 희생양이 된다.
전주에는 덕진호가 있고, 춘천에는 소양호가 있으며, 경주에는 보문호가 있다. 이들 모두는 인공호수이지만, 오늘 그 도시를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만일 광주의 역사가 뒤틀리지만 않았다면, 광주에도 이런 명물 호수가 있었을 것이다.
경양방죽을 메운 건 인구폭발이 핑계였지만, 미래 가치를 읽지 못한 단견 때문이었다.
김방과 개미의 보은
원래 경양지, 경호, 연지 등으로 불린 경양방죽은 조선 세종 22년(1440) 광주 목사로 부임한 김방이 3년여의 공사 끝에 완공한 인공 호수였다. 연인원 50여 만 명과 제주도 조랑말까지 동원된 대역사였다. 총 면적 6만 5천 평(호수면 4만 6천 평), 옛 시청 자리에 세워진 홈 플러스 뒷길에서 광주은행 본점으로 뻗은 1킬로미터가 넘는 길이 당시의 둑방이었다. 그 둑방으로 막힌 방죽의 물은 광주고등학교, 계림초등학교, 옛 광주상고의 정문 앞을 통하는 담양가도에 닿았으니 그 규모가 짐작된다.
거대한 방죽을 만드는데 그럴싸한 전설이 없을 수 없다. 공사는 시작되었지만 수년째 거듭된 가뭄으로 제 때에 품삯을 지급받지 못한 공사장 인부들은 헐벗고 굶주림에 허덕였다. 어느 날 하루도 빠짐없이 공사장의 인부를 격려하던 광주 목사 김방은 수 만 마리의 개미떼가 개미집을 잃고 우왕대는 모습을 발견한다. 하찮은 미물이지만 집을 잃고 흙더미에 깔려 죽게 될 것을 측은히 여긴 김방은 인부를 시켜 개미집을 무등산 기슭의 완전한 곳으로 옮겨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김방은 양식 창고에 가득 찬 쌀을 발견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양식 창고의 쌀은 계속 쌓이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김방이 숨어 지켜보자, 놀랍게도 수 만 마리의 개미떼들이 쌀알을 물어 나르고 있었다. 개미떼들의 행렬은 공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김방은 집을 옮겨 살게 해준 데 대한 개미들의 보은임을 직감하고 그 쌀을 공사장 인부들을 배불리 먹이는데 다 쓴다. 공사가 기한 내에 마무리되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