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동계 수련회
일시 : 1992. 1. 15 ~ 18
장소 : 남도 순례
참석 : 전원
천의 집에 전원 모여 예정보다 1시간 반 가량 늦게 출발. 차량 2대(천의 프레스토, 이의 록스타).
늦게 출발한 이유는 선이 민방위 소집을 받고 늦는 바람에.
1월 15일
오전 11:30 출발, 88고속도로 거창 휴게소에서 5명이 동시 배뇨하며 세력을 과시하고..
거창에서 빠져서 국도로 함양 안의면 도착, 모 중국집에서 볶음밥, 짜장면으로 점심을 먹었다.(14:00)
다시 출발하여 농월정에서 첫 사진을 찍고, 육십령 만대기를 넘어 모래재를 넘으니..
마이산의 신비한 모습에 모두 탄성!
마이산에 도착(3:50) 하여 계단을 넘어 탑사를 살펴보고 다시 넘어와서 전주를 향해 출발했다.
전주에 도착하니 6시가 다 되었고,
금암동 종합경기장 맞은 편 동백장에 짐을 풀고 시내 구경한답시고 좀 나가봤으나...
어디가 어디인지 알아야지...
여관 근처의 자동차 쇼 윈도우에 전시되어 있던 스포츠 카를 구경하며 차에 관심이 많은 小河의 해설을 들었다.
1월 16일
아침은 순대국 밥(경상도 것과는 전혀 다른)을 먹고 여관을 출발(10:15)
눈발이 날리는 속에 모악산 도립공원에 있는 금산사에 도착(10:53) 하여 답사했다.
남도의 사찰은 경상도 것과는 달리 웅장한 건물은 없지만..
여기 금산사의 미륵전 처럼 국보급 보물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태인(길을 잘못 듬, 신태인으로 가야하는데) 신태인을 지나니 높은 산은 없고 평야지대였다.
동진강에서 부안읍으로 가는 데 (12:03) 표지판이 없어서 잠시 헤매고 있는데 비가 가랑가랑 했다.
좀 더 가니 서해바다가 보이기 시작했고(12:23) 곧 변산반도국립공원이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바닷가 철조망 우연 속에 흩어진 섬들을 보며 반도를 오른 쪽에서 진입해 들어갔다.
변산 해수욕장(12:42), 채석강 등 변산반도의 명물들이 나타났지만 겨울이라 찾는 이가 별로 없고,
국립공원의 입장료, 주차료에 비해 그 기본 시설, 관리상태 등이 형편없다고 모두 불평했다.
변산반도 해안을 따라 비포장 길을 따라가다 보니 주변 산세는 괜찮았다.
도로 확장 및 포장공사로 인하여 산림이 많이 훼손된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포장도로가 다시 나타나자 염전이 여기저기 경상도 촌놈들이 염전 구경을 했다.
줄포에 도착(14:15)해서 중국집에서 짬뽕으로 점심을 먹었다.
천의 동서(배영진)를 만나 점심 값, 양지다방에서 차 값을 신세를 졌다.
빗속에 줄포를 출발해서 정주(정읍)을 통과하여 선운사로 갔는데,
“또 절이가?!!! 으익! 입장료!!”
선운사를 포기하고 내장산으로 출발, 도착하니 오후 4시가 되었다. 사진만 찍고, 큰 실망에 돌아섰다.
“입장료 9,500원이 너무 아까웠다.”
다시 정주로 나와서 오늘의 목적지인 광주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호남고속도로로 접어들어 광주까지는 한시간 조금 더 걸렸다.
광주 송정리 역 부근 삼도장 여관 투숙.
1월 17일
송정리 출발(10:45) 함박눈을 맞으며 시원한 4차선 국도를 타고-
목포 (11:45) - 유달산 도착(12:05), 유달공원, 조각공원 등...
목포는 우리들에게 강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는데, 목포가 예향이라는 것을 실제로 느꼈다.
영산강 하구둑(14:12) - 땅끝을 가보자는 광순을 달래며 - 월출산을 오른쪽에 두고 영암으로..
가는 길에 - 왕인 박사 유적지 관람 - 빵조각으로 배를 채우며 영암군을 통과했다.(15:43) -
드디어 광주 도착(17:30) 리버사이드 관광호텔 투숙,
금남로, 충장로, 지하상가, 가든 백화점 등을 돌아다님,
충장로 식당에서 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이 지역에서는 없는 저녁을 먹었는데 요금체계가 좀 이상했다
봉사료가 따로 있대나?
1월 18일
호텔 출발(11:00) - 전남도청 앞 지나서 사직공원 , 무등산을 바라봄.
광주민주화항쟁 때의 희생자들이 묻힌 5·18 묘역, 망월동의 이 곳이 우리들의 전라도 답사의 마지막 코스였다.
강경대, 이내창, 이한열, 이철규, 등의 무덤...
숙연해진 우리들의 옆에는 누군가의 안내를 맡아 이야기하는 이가 있었는데,
“아! 이 여자가 그래도 이 중에는 제일 이뻣는디...”
하는 등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잔뜩 엄숙했던 우리는 이 지역 사람이 그런 식으로...
그것도 여기서 무언가를 맡고 있는 듯 한 사람이 그렇게 나오니까 민망해졌었다.
묘지 앞의 기념품점에서 비디오 테이프 하나 사서 그 곳을 떠났다.
동광주 I.C에서 88고속도로 - 지리산 휴계소에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대구에 도착(16:00)
다 같이 5 · 18 민중항쟁 자료 테이프를 틀었다.
그런데 화면 상태도 좋지 않고 내용도 너무나 조잡하여 제대로 된 사람이 만든 것 같지 않았다.
이미 텔레비젼에 방송된 것을 복사한 것 같았고
조금 지나니 난데없이 민족의 지도자 김대중 선생... 하는 식으로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
낮에 묘역에서의 그 사람과 오버랩 되면서 거기에 뭔가 차려놓고 있는 그 사람들..
뭔가 질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각자 자기의 둥지로 향해....
“내 나라 내 땅을, 아니 우리 나라 우리 땅을 둘러본다는 것은 민족애의 첫걸음이 된다.
특히 지역감정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경상도인이 전라도를 자주 가 본다면 새로운 이해와 만남을 열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오만가지 편견과 오해를 벗어나려는 노력중의 하나를 우리 가람뫼가 시도했다는 가슴 뿌듯함...” - 道貧
이 번 전라도 행의 일등 공신은 ‘지도’ 였다.
성지 문화사의 이 지도는 그 복잡한 광주 중심가에 있는 호텔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오히려 지도를 믿지 못해 차를 세운 적은 있음) 우리를 인도했다.
그리고 최 경수 같이 차의 진행 방향과 일치시킨답시고..
지도를 거꾸로 보면서 우회전.. 좌회전.. 하는 신기한 조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에 남기고 싶다.
- 편집자 주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산행
남도 순례 후에 겨울 산행을 시도했는데 다른 회원들은 일정이 맞지 않아서 포기하고,
遊壯, 孤峰, 小河는 강원도 쪽을 물색하다가 천의 볼일을 겸해서 오대산 五臺山 등산을 결정했다.
막상 다녀보니 오대산 지역은 사찰과 문화재, 그리고 산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곳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때의 산행은 잊혀지지 않는다.
遊壯의 말년 프레스토로 대구에서 경수와 출발, 진보서 광순과 합류하여
동해안을 타고 강릉까지 가서 대관령을 넘어서 월정사 입구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입구의 여관 촌에서 1박을 하고 월정사 月精寺를 거쳐 적멸보궁 月精寺寂滅寶宮 에서
부처님 사리를 한 번 볼 수 있을까 하며 기웃거리다가.. 사진만 찍고 다시 산을 오르니 중턱쯤에 상원사가 있었다. 상원사 上院寺에 도착하여 살펴보던 중 종각에서 작지만 잘 만든 종을 발견했다.
경수가 그것을 보더니
“상원사의 종이 괜찮다고 하던데...” 하고 한 마디 했다.
정말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종은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게 잘 만들어진 것으로 소리까지 좋다고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 ‘경주문화엑스포’ 행사에 갔다가 사설박물관에 들렀는데..
거기에 이 상원사의 종을 재현한 것이 있었다.
바로 그 유명한 상원사동종 上院寺銅鐘 국보 제36호 까지 친견을 하고
오대산의 정상인 비로봉까지 오르는 이 코스는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잊혀지지 않는 명산이었다.
겨울 산행이 처음이었고 코스 또한 완만하고 좋아서 힘들지도 않았다.
여기서 가람뫼 사상 처음으로 ‘아이젠’이 사용되었다.
정상에 오른 뒤, 바로 아래에 적당한 장소를 발견바람을 피하며 눈을 녹여서 컵 라면과 빵을 먹었는데,
눈을 녹여서 물을 만들다 보니 보기에는 깨끗한 것 같았으나..
녹고 난 뒤에는 여러 가지 불순물이 많이 들어있어서 “국물은 먹지 마!” 해도
시원하게 들이키는 회원이 하나 있었으니 누구였을까?...
허기 진 배를 대충 채우고 하산하여 어두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서울 방향으로 가던 중,
가벼운 해프닝... “어..어! 천씨!.. 차 퍼진다...”
차를 몰던 광순의 다급한 목소리가 모두를 불안하게 했다.
그러잖아도 눈이 와서 도로 사정도 좋지 않고 또,
가람뫼의 일등공신인 프레스토 승용차의 수명을 이야기하며 가던 중이었는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 이어서 모두들 최악의 경우를 순간적으로 상상하며 불안해 지던 순간..
‘비상 해제’의 소리가 들렸다.
“아! 오르막 길이네!...”
어둡고 2차선 고속도로라서 맞은편 차의 불빛의 영향을 받아서 시야가 불편한 가운데
순간적으로 오르막을 평지로 알고 5단 기어로 계속 가니 차가 덜덜거릴 수밖에...
수원을 거쳐 군포시로 가서 遊壯의 처제 집에서 하루를 자고
아침에 수원에서 제일 큰 빈센트 병원에 잠깐 들렀다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6월 월례회 <여기서부터 遊壯 기록>
일시 : `92. 6. 5 ~ 6
장소 : 울산
참석 : 선회장, 이성민을 뺀 전 가족.
의제 : 하계 수련회 계획 및 야유회
의결 : 제주도 하계 수련회 회비 150,000원 징수 결정
“1년 만에 울산에서 선 회장을 제외한 전 가족이 모였다.
울산의 경남교육청 관할에 있는 두 교사는 차 없는 것을 큰 무기로, 자랑 또는 다행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황당한 사람들이다’
매번, 차 있는 경북교육청 소속 두 교사는 250 ~ 300㎞의 엄청난 주행을 감수하며 울산을 간다.
‘정말 성실한 사람들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 회장이 끝내 나타나지 않자 ‘무단불참’으로 결론짓고 상기의 안건을 통과 시켰다.
선 회장의 누적된 행적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는데..
“이런 현상은 여자문제가 아니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하며 열변을 토한 遊壯의 주장에 모두,
“그럴리가?....”
그러나 이것은 후에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道貧은 그로부터 3년 후, 문제의 그 여인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남자들은 아래층에(청파네) 여자, 아이들은 위층(고봉네)에 격리 수용되어 만나면 늘 하던 짓을 했다.
다음날 전원 바닷가로 나가 회식을 하였고 산회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성실한 두 교사’는 석남사 코스를 택하여 가다가 길을 잘 못 들어 죽을 고생을 하였다.
- 선 회장 불참으로 遊壯이 대신 기록
7월 임시회
일시 : `92. 7. 17
장소 : 경주
참석 : 靑波 불참
의제 : 제주 하계 수련회 최종 점검
의결 : 7. 23 ~ 27까지 4박 5일로 확정
조재열 불참
선효영 가람뫼 탈퇴
모두가 무더위 속에 황당하게 비정상적인 국회처럼 나자빠져 있다가..
유장의 요청으로 전격적으로 경주에서 회동을 하게 되었다.
청송에서 전인교육 하던 조 모 교사는 경남교육청으로 옮긴 뒤부터는 소인 교육에 전념,
빨간 날에도 학교에 가서 겨우 눈만 뜨고 있는 애들 붙잡고 악을 쓰느라 불참했고,
그 불쌍한 학생들을 위하여 제주 수련회도 포기했다.
선 회장은 이 자리에서 대권을 포기하고 가람뫼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이유는 불명.
제반 장부와 사무는 회칙에 따라 遊壯이 인수.
수련회 일정은 상기와 같고, 아신 마리너 호텔에서 4박, 매식(買食)을 원칙으로 했다.
회의 후 경주로 얼마 전에 전근을 간 권우택과 접선 집으로 가서 맥주 한잔 후,
보문단지를 둘러보고 우탁이 추천하는 냉면 집으로 가서 먹고
이, 천은 대구로 그리고 울산 경주로 돌아갔다.
이 날 냉면 집에서 신 회원 입회 문제가 잠시 거론되기도 했는데.
宣이 나가자마자 실행한다는 게 문제가 있다는 여론에 미루기로 했다.